'2016/10/06'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6.10.06 낙서 서른 여섯
  2. 2016.10.06 낙서 서른 다섯
  3. 2016.10.06 낙서 서른 넷
  4. 2016.10.06 낙서 서른 셋 1
  5. 2016.10.06 낙서 서른 둘
  6. 2016.10.06 낙서 서른 하나
  7. 2016.10.06 죄인을 불러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8. 2016.10.06 레위의 아픔, 레위의 희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8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내가 나 자신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만족에 대한 부담감에서만 자유로워져도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시편 99:4)

 

주여, 우리는 불쌍한 백성들이니이다.

정의를 사랑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왕이

우리를 통치하기 때문이니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 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정말 힘 센 사람은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정말로 힘 센 사람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린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6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Stabilitas)'라는 개념이 참 좋다. 정주란 자기 자신 곁에 있는 것, 즉 자신의 암자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 교부들의 교부집에 이런 말이 있다. "암자에 머무르며 너 자신과 노동에 집중하여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큼 너의 성장에 이로움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방랑 ''는 영혼의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종의 '버티기'가 결국 영혼을 빚어가는 것 같다. 지금의 답답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일을 해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현재 속한 공동체(가정이든 교회든 회사든)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훈련이 쌓이지 않으면, 결국 공동체를 떠난다 해도 별다른 성과를 내기는 힘들 것이다.

 

사막 교부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한 수도승이 아르세니오스 원로에게 말했다. "저는 금식도 못하고 일도 못하니 나가서 병자라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롭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악의 싹을 알아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가서 일하지 말고 쉬면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거라. 그러나 암자를 떠나지는 마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암자'를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질 없는 일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는 요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깨달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그저 침묵 가운데, 정주할 뿐.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5

현실, 뒤에 있는 진실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4

즐거움은 지나치면 음란으로 빠져들 수 있고

슬픔은 지나치면 상심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니, 절제할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6. 14:44

죄인을 불러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2:13-17)

 

주여,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옵소서.

우리는 죄인이니이다.

우리를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옵소서.

죄인의 자리에 그냥 두지 마시고,

우리를 불러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부르심은 새창조의 부르심이니이다.

주께서 불러 주신다면

우리가 어떠한 죄의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를 따르며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겠나이다.

카라바조의 그림 <세리 마태를 부르심>에서와 같이

새창조의 손가락을 우리들에게 내밀어 주사

우리도 마태(레위)처럼

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의 거룩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임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6. 14:36

레위의 아픔, 레위의 희망

(마가복음 2:13-17)

 

오늘 이야기는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5장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 집에서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이야기, 그것을 보고 바리세인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이야기, 그것을 들으시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히시는 이야기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오시는 이유는 의인을 구원하고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러한 통념을 뒤집는 것 같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핵심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해 보자.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의 직업은 세리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이렇다: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아람어, 열심당원) 시몬, 가룟 유다

 

그렇다면,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는 마태의 다른 이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세리 레위라 소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세리 마태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레위라는 이름보다 마태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마태복음의 영향이 크다.

 

세리 레위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레위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레위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는 자기 분깃을 따로 갖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나의 분깃이라는 믿음으로 살던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열한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십일조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레위는 지금 로마의 세금 청부업자로서, 하나님이 아닌 로마가 그의 기업이 되었다. 그로인해 레위는 동족들(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었다. 그의 이름(레위)과 현실(로마의 세금 청부업자)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이것이 레위의 아픔이었다.

 

죄인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의 범주에 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잘 지켰는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죄인이라 칭하며 그들과 같지 않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

 

레위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어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한 그의 심정이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그림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확대된 그림을 보면, 세리 레위(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 세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돈 세는 일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어두운 표정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그림과 같이 예수님은 그런 죄인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카라바조의 그림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예사롭지 않게 표현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손가락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가리키던 손가락과 같은 손가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세리 레위(마태)의 부르심은 예사로운 부르심이 아니라, 새창조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의 자리에 그냥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레위의 희망이요 기쁨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가 어떻게, 어떠한 연유로 죄인이 되었는지, 즉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 뒤,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 예수님은레위만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과 세리들도 함께 부르셨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러한 광경을 보고 언짢은 말투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마태복음 1119절에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대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여기서 친구는 헬라어의 필로스를 가리키는데, 이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질문해보자. 예수님은 정말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는가? 필로스의 뜻대로라고 하면 만약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면, 예수님도 세리나 죄인 신분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가까이 지내는 죄인이나 세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한 번 알게 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같은 분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생각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병을 고치는 의사가 병든 자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서시는 것은 당연하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정의는 죄인과 사귐을 갖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과 가까이 하다가 오히려 그들이 죄인에게 물들어 죄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선포는 레위에게 희망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이다. 우리도 레위처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얼마든지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레위지파 출신의 레위(마태)가 알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레위는 아픈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죄인의 자리에 들어서면 안 되겠지만, 우리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들어섰을 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레위와 같은 아픔이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려 큰 죄책감에 싸여 생명을 망가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우리는 죄인과 친구될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죄인에게 물들어 우리도 똑같은 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면,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의 자리에서 건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복음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신음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 그림은 김학철 교수의 해석에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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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