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10. 27. 17:00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를 간구하는 기도

( 4:12~13)

 

주여, 저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는

영혼을 팔아먹는 중한 죄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들의 양심을 깨부수는 도끼와 같은 설교,

저들의 영혼과 골수를 쪼개는 날 선 검과 같은 설교,

저들의 팔 다리를 부들부들 떨게 하는 천둥 같은 설교를 수행하는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통하여

저들의 죄악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16:59

설교하기 전 드리는 기도

( 2:14~41)

 

주여, 오늘 하는 설교가

저들의 귀에 들리게 하시고,

저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쪼개게 하옵소서.

저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회개와 회심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나의 입술과 마음과 영혼이

성령의 감동으로 벅차 오르게 하옵소서.

성령에 취해

담대함으로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설교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07:25

예수의 가족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3:20-35)

 

주여, 예수의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 서기관들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죽음과 죄와 질병을 지배하며

인류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는 바알세불의 세력을

주의 권세로 물리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지배 받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인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듭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며 사는

주의 자녀들이니이다.

주여, 우리는 예수께서 일으키신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는

믿음의 백성이오니

우리를 예수의 가족으로 받으시고

평화의 나라로 들이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7:02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20-35)

 

오늘 말씀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야기 속에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구조다. 구조를 보자면,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바알세불 논쟁이 들어가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끝나는 구조다. 이야기의 샌드위치 구조는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또는 귀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가 미쳤다는 헬라어의 엑세스테를 옮긴 것인데, ‘온전했던 정신을 다른 곳에 두다또는 정신이 나가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천지 이만희: 자기 자신이 보혜사 성령이다. 자신만이 봉인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미쳤거나, 진짜이거나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확신범인가 2)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기꾼인가 3) 진짜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성경 전문가)은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혹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일을 주술로 이해했다. 그 당시 주술은 중범죄로 취급했다. (미쉬나 산헤드린 7:4). , 그들은 예수님이 치료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사탄)의 힘을 빌어 주술을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논리적인 대답을 펼치신다. ‘만약 하나님께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탄이 다른 사탄을 사람에게서 내쫓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일이 되어 자신의 세력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같은 편끼리의 분쟁은 좋지 못하다.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이야기 1)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 결국 그 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살아남은 금붕어 한 마리는 이제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물을 썩게 만들더니, 결국 살아 있던 한 마리 금붕어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야기 2)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 의 오랜 우정에 위협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 R. 리브)


둘 중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감동적인가? 금붕어 이야기는 쓴 웃음을 유발하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유발한다. 금붕어 이야기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춰주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왜 더 감동적인가?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승들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평화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평화로운 자아,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부지런한 자기 비하에서 온다. 자기 비하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의 평화를 깨는 요소를 세 가지 지목한다. 죽음, , 질병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음, , 질병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강한자를 공격하심으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시고, ‘죽음, , 질병이 없는 하나님 나를 가져오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한자(사탄)를 결박하는 것은 유대 묵시 사상의 특징이고, 기독교 종말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은 그저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대되고 있음을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시며,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블라스페미아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특히 다른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죄 용서 능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 말씀의 문맥 상,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서 마가복음 공동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시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여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러 온 것처럼 미친자가 아니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메시아이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님)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의 사역(하나님 나라 사역)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를 미친 자로 생각하는 자는 예수를 떠날 것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공동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근본적으로 성령에 의한 사역으로 보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관심, 교회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단순히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예수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이지만, 결국에는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예수님은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누가 나의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예수님께 아뢨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는데, 나가서 맞이하거나 사람을 시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거나 해야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이렇게 대응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인지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 이것은 오늘 말씀의 처음에 언급했던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대비되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를 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동참하며 헌신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간다의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죽음과 죄와 질병을 몰아내는 일, 즉 사탄(귀신)을 몰아내는 일을 계속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가? 아니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가족이라 칭하여 주신다.

 

주님의 가족이라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의 일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주님은 평화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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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6:59

특별한 부르심

(마가복음 3:7-19)


3 7-12절은 116절에서 35절까지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갈릴리 전기 사역을 요약하고 앞으로 있을 갈릴리 후기 사역을 전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기 사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유대 전역에서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는가? ‘경고하다(에피티마오)’는 경고나 꾸짖음과 같은 강한 의미의 동사이다. 이는 마가복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메시아의 비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감춰져 있다. 사실 아직까지 감춰져 있다. 예수의 메시아성(메시아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갈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메시아성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메시아되심(메시아성)이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날 날이 온다. 그날을 종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을 말한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고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 열 둘을 세우신다. 이것은 제자들을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갈릴리 후기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사역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헌신된 사역자가 꼭 세워져야 한다. 교회 다니면서 마음 속에 품어야 하는 것은 헌신된 사역자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이어서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교회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스스로 구원에서 멀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사역자는 단순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인격이란 지속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심신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자아가 아니라, 심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인격이라고 한다. ‘사역하는 일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의 인격과 사역(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KBS 2TV '제보자들'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한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교회 목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며 아들의 유전자 감식을 병원에 의뢰했다. 그리고 감식 결과, 99.99%의 확률로 목사의 아들임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그런데 아내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도 아들이 하나님의 자식인 것은 때려죽여도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목사는 "(그 여성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기도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한 것 외에는 없다, 불륜 관계는 아니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목사는 그 아이는 기도해서 생긴 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을 보고, 이들의 인격과 사역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벗어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이다. 사도행전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아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재현했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되니까,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고, 한 마음이 되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낸 일과 정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 얼마간 감추어 두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일이 소개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일을 베드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5:3-4).

 

성령이 마음에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사탄에게 이 마음을 빼앗기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사탄에 의해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자취를 감추고,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죽이는 일로 돌변하고 만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위임하신다. 이 위임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위임이다. 모든 교회는 이것을 위해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고,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열 둘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위임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 부르신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자가 에녹과 노아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 되어야지, 누가 데려갔는지 모르면 안 된다.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내 죽음은 그냥 개죽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데려가신 죽음인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6장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을 구원할 방도를 알려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덕분에 세상은 홍수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예수님이 우리(제자)를 부르시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한다. ‘복음(유앙겔리온)’은 예수님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수반한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진다. 이게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위에서 보았던 제보자들의 방송을 통해서 보는 저들의 모습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음란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음란 귀신을 오히려 불러들여 처참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면, 탐욕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탐욕 귀신을 불러드린다.

 

여러분을 죄악으로 옭아매는 귀신을 내어 쫓으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는 권세이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을 불러들여 죄악에 얽매인 자가 어떻게, 무슨 힘으로 복음을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전하겠는가? 이런 말이나 듣지 않겠는가! “너나 잘하세요!”

 

우리는 예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일컬어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1장의 안디옥에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가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1)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2)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우리를 죄악에 얽매이게 하는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르심에 우리는 잘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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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