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12. 20. 05:38

현몽을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1:18-25)

 

주여, 현몽하여 주옵소서.

꿈 속에서든, 어디에서든

주의 뜻을 밝히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어리석어

사건의 실체를 알지 못하나이다.

갈팡질팡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마리아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듣고

그를 가만히 끊고자 했던

의로운 요셉에게 현몽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에게도 현몽하여 주셔서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옵소서.

현몽의 은혜를 통하여

요셉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주의 뜻을 역사에 드러냈던 것처럼

우리도 현몽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역사에 드러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20. 05:26

현몽

(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 오신 일)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4 ㅡ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조차 일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잘 된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마리아 주변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세례요한과 그의 엄마 엘리자베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 그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도 보여준다 (시므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아버지)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어렸을 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  둘째, 신랑과 신부가 성인으로 성장해 실제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약혼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서로의 관계가 법적 구속을 받는데,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인 약혼 파기로만 가능하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 정도 되며, 약혼 기간에 신랑과 신부는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순결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실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은 큰 잔치를 벌이며,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 문구에서 성령으로라는 말을 빼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 기간에 여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임신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데, 이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그 당시 약혼 기간에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상식과는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이 문장 자체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의로운가만히 끊고자 하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간음한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간음한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의로움이란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법이지,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살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한다.

 

그의 의로움의 절정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아두고, 요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마리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진실과 지혜는 바로 그 때 뜻밖으로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요셉은 이 일로, 아마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drift off to sleep, 스르르 잠들다). 바로 그때, 요셉은 꿈을 꾼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20). 요셉의 꿈 속에 주의 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현몽한 사자는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문제적 심리학자,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요셉의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곤혹스러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요셉의 욕망이 표출되고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건한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것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전한 뉴로사이언스는 이것을 잠자는 동안 일어난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요셉의 기억 통합 작용(memory consolidation process)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요셉의 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떠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우리는 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실체가 드러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순실 국정논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한국의 역사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현몽을 통해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간음 사건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마리아 임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은 꿈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 구원은 그들에게 언제나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일이 꿈을 통해서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진다. 꿈을 통해 진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24).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게 할까라는 것이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러한 계시(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일)를 받은 것이 아니라(물론 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행동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5). 참 조마조마한 이야기이다. 만약,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참 이상한 꿈이 다 있군하면서 그 꿈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리고 율법대로 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건, 또는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 건, 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공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든 것은 모두 너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약속 따로, 믿음 따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셉은 행동의 근거를 경건(율법 또는 자기 의)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믿음에서 찾았다. , 그는 믿음으로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꿨고, 행동을 바꿨고, 역사를 바꿨다. 믿음은 내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바꾸는 일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만 바꿨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은 바꾸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 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왔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살다가 마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믿음은 마음과 행동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평화의 촛불을 켰지만, 왜 우리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이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교회 공동체니까 교회 공동체 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왜 교회 공동체 내에 평화가 없는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5:23-24).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실체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은 진리가 드러났을 때, 실체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형제에 대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서, 역사를 만들며 사는가? 말씀을 통해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하는 행동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마음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으로만 마리아를 데리고 오니까, 평안도 없고 역사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 하니까 예배 드린 후에도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고민 가운데 있고, 그 고민을 놓아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현몽(말씀, 계시, 실체)’을 받으셨는가? 성경에서 요셉은 현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삶의 문제가 있고, 구원이 간절하시거든, 우선 성경을 보시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뜻밖에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거든, 요셉과 같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보시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시라. 주님께 마음을 두고, 주를 의지하는 자, 주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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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보고 듣는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선포되고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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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7. 12:47

그리고, 비가 왔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신발을 들고

아가는 엄마를 든다

목인사를 건네며

바삐가는 바람에게

길을 묻는다

낙엽이 대신 대답한다

친구가 오지 않아 슬펐던 가을은

장마같은 눈물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늘어진 목구멍 사이로

저녁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산등성이에 다다른 하늘은

구름과 시선을 맞춘다

 

등을 더듬는 구름아

그건 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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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17. 12:45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마가복음 5:35-6:6)

 

오늘 말씀은 믿음과 불신이 충돌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다. 믿음은 한계(불신, 죽음, 친숙함)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 그 사이에 낀 혈루병 여인,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얼른 가시면 우리 딸이 죽지 않을거야.’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저 절망에만 휩싸였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곁에선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 “두려워하지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à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말씀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떠드는 것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훤화함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mmotion’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두려울 때,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이나 소란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이 봤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계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뒤나, 그 이후를 못 본다. 절망은 그때 다가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 절망이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에게 임한 죽음을 보고, 절망했다. 그 뒤나, 그 이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봤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여기서 떠들며 우느냐는 왜 시끄럽게 우느냐는 뜻이 아니다. 이는 왜 너희들이 한계 상황에 부닥쳐 그 뒤를 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왜 그렇게 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보셨다.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좀 일이 안 되면, 좀 일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들의 불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비웃음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험한 한계는 죽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 때문에 불신에 쌓인다.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얼토당토한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먹을 게 없으면 굶어야 했던 노인 세대와 먹을 게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간격보다 더 큰 간격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 손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드시지 왜 굶으셨어요?

 

이러한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경험한 자들에게 박힌 불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실 거라는 믿음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40절 말씀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은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렇다.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이 바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었다. 아이의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벌이실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을 간절히 믿었다. (우리도 우리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제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드디어, 불신과 믿음의 간격이 메워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예수님의 이 한마디이다.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일은 단순히 죽은 소녀를 살게 해서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다. 12살 먹은 여자 아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머지 않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인 복음이 될 수는 없다. 12년 사나, 120년 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다른 게 뭐가 있는가?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과 믿음 사이를 메워주는 궁극적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고향으로 간다. 우리는 거기가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그들의 놀람은 믿음의 놀람이 아니라 불신의 놀람이었다.

 

예수에 대한 의문의 서술들이 펼쳐진 후,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하다는 믿음과 반대되는 반응이다.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직업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은 그와 어려서부터 함께 컸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6:4).이는 다른 곳에서 존경 받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친숙함이 모욕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다. 친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가를 몰라볼 때가 많다. 특히 가족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인정을 못 받는 부류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참으로 특이한 집단이다.

 

또한 가족 외에, 나와 더 친숙한 부류가 있다.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라. ‘못해요, 안돼요하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을 때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지,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는 불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죽음친숙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개의 한계는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죽음에 친숙하거나, 또는 친숙해서 죽어 있거나,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깨어 있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친숙하거나, 친숙해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보자. , 죽음의 한계(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갇히는 것)에 부닥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친숙해져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면, 그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Do not be afraid any longer, only believe.” 그러면, 분명,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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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2. 12. 18:20

시간

 

토끼가 굴에서 나왔다

독수리가 하늘을 유유히 난다

땅거미 질 무렵

길게 늘어진 거미줄에

잠자리 한 마리가 걸터앉는다

붕어가 잠수를 한다

스스로 꼬리를 잘라낸 도마뱀이

칼 춤을 춘다

올빼미가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다

별똥별이 지그재그로 하강한다

나무가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집게벌레가 하품을 한다

모래바람이 분다

시계가 서쪽으로 기운다

창문에 노란색 손수건을 단다

거북이가 총총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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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2. 11. 12:58

토요일 오후

 

아픈 귀,

만지면 고장 날 것 같다

차마 손바닥을 갖다 대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눈은 손가락에 갇힌다

구름이 지나며

비웃음을 뿌린다

이 세상에 괜히 왔다

누구든지,

나무에 오르면

떨어지는 관성을 잊는다

바람이 콧등을 살짝 건드린다

분노는 심장을 뚫고

머리카락의 최전방까지 돌진한다

나뭇잎이 한가롭게 떨어진다

말 걸기도 힘든 노인네가

젓가락처럼 서 있다

세발 자전거를 탄 아이가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곳에서

기억이 탄생한다

노을이 새털구름에 스민다

손바닥에서 자꾸 아픈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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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2. 10. 15:46

후회

 

간다고 해 놓고

몇 걸음 못 가서 주저 앉았다

눈시울이 붉어졌을 땐 이미

심장에 금이 간 후였다

강물은 흘렀고

그림자는 멈췄다

가야하나

말은 숨어버렸고

생각은 밀려왔다

입술은 말라버렸고

피는 체온에 갇혀 증발했다

잘못 온 것이다

아니, 아직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바꾸지 못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신이 이미 진행시켜버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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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2. 10. 15:46

혐오

 

지붕이 뜨겁다

새 한 마리가 지붕 위를 날다

날개 한 쪽이 꺾인다

꺾인 건 새의 날개인데

추락하는 건 구름이다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괴팍한 햇살이

심장까지 침투한다

피는 우주를 한 바퀴 돌고

눈은 열광하며 집을 나간다

이건 누구의 거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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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6. 12. 9. 13:12

나라를 위한 기도 2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나이다.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주님과는 달리

국민의 울부짖음을 전혀 듣지 않으려 하나이다.

아마도 그는 국민이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국민은 대통령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믿는 듯 하나이다.

이 얼마나 큰 반역이니이까?

주께서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건만,

주의 권세 아래 있는 한 명의 위정자에 불과한 대통령이

어찌 국민의 울부짖음을 무시하며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 않을 수 있나이까?

이것만큼 불의와 불경이 어디에 있나이까?

이것은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이니이다.

공의로우신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그를 심판하옵소서.

그의 귀를 여시고 돌같이 굳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어주사,

주의 섬김을 본받아

하루빨리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위해 국민의 뜻에 순복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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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6. 12. 9. 13:11

나라를 위한 기도 1

 

주님, 새날이 밝아오고 있나이다.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역사의 주인이 되신 주님,

십자가에서 이 땅의 모든 불의와 악을 심판하셨던 주님,

이제도 오셔서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의 불의와 악을 심판하옵소서.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펼쳐진 날이옵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정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위정자들과 장사치들을

주께서 종말에 높이 세워주실 '작은 자들(국민들)'의 이름으로

심판하게 하옵소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며,

불의가 정의를 이기지 못함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계시하신 주님,

새로운 역사를 열어젖힐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새날을 보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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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8. 18:41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2:25-33)

 

주여,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게 하옵소서.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나이다.

사랑은 도덕이 아니라

주의 존재방식이니이다.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사랑은 우리를 영원 속에 거하게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기에

주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몸을 가지고 시간 안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셨나이다.

삶을 살며 우리가 왜 눈물을 글썽이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느라

시간과 몸을 내어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는 고백이

삶의 마지막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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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6. 12. 8. 18:27

건강한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5:21-34)

 

주여, 건강한 믿음을 주옵소서.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처럼

주의 옷자락만 만져도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병이 나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피의 유출이 있는 부정한 여인이

정결법을 어기면 처벌 받을 것을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옷자락을 만진 것은

주만이 죽음으로부터 건져줄

구원자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니이다.

그 여인이 구원 받은 것은

병 낫기를 바라는 욕망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믿음 때문이니이다.

진리이신,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를 아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오니

일생동안 주를 힘써 알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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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6. 14:50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누가복음 2:25-33)

 

작년에 한창 화재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 선교사 두 명이 있었다. 소록도에서 평생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과 마가레트(70) 수녀다. 그들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이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 봐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다. 두 사람의 방문 앞에는 그들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한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신문 기사에서 발췌 및 편집)

 

존경스러운 사랑의 삶을 사신 이 두 분들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사랑에 대한 이런 찬양이 생각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

 

어떤가? 사랑은 이런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것에 머무는가? 이것은 굉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해할 요지가 있다. 사랑을 도덕으로 생각할 요지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적인 삶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Love is eternal. No matter how short it was. That's the mystery of love." - Reverend Junsik Chang *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 장준식 목사

 

* 이것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 후배의 문병 중에 내가 말씀을 전하며 한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후배에게사랑의 영원성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후배는 이 문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오늘 말씀을 보자. 유대인은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 받으러 성전에 간 것이다. 그때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구원을 보는 장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래서, 도덕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한 아기가 태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 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은 상대방에게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행위요, 상대방의 시간을 침범해도 된다고 허락 받은 일종의 자격증이다. 그러므로 남의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상대방의 시간에 침범하려면 먼저 그를 사랑하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의 시간에 침범하는 것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은)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을 경험하게 한다. 즉 초월을 일구어 낸다. 초월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통로이다.

(요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라.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부인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또는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나 이웃이 있는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얼마나 많은 미움 가운데 사는가.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합일의 상태로 인도한다. 영생 (하나님의 생명), 영원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말에서 (spirit)’은 하나님을 말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다가선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실천한다. 물론 우리의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의 사랑의 삶을 보면 그냥 멋지기만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엄청난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목원대학교를 세우신 Charles Stokes(도익서 박사)의 사모님(이명은, Marilyn Stokes)이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선교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늘 고향이 그리워서 갈등하고, 삶의 환경이 힘들어서 갈등하고, 그렇게 인간적 갈등 가운데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은퇴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도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이 보이는데, 그것을 껴안고 보듬어 주는 일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릴 적 사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라.

 

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맡겨주시고 만나게 해주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잘 해주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해줘야 하는지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늘 이런 주문을 했었다. ‘교회 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담임목사를 사랑해 달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일 거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일 하려 들지 마시라.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면, 문제가 생긴다.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남이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꼴보기 싫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기대했던 리워드가 안 오면 시험에 든다. 교회에서 일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라. 사랑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유익을 구하지 않기에 시험에 들 일도 없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시는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한 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가인(농부)과 아벨(목자)의 제사 중,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가? 가인은 곡식 바치고,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 것이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냐의 문제, 사랑으로 제사(예배)를 드렸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인은 자기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리워드가 안 오자, 동생을 죽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열심이 결국 살인으로 간다. 그렇다고 뺀질 대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WORK’ 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로 가르쳐 주신다. 큰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큰 아들이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고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되,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 뉘우치고 갔으니,”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사랑은 말이 아니라 ‘WORK’ 이다. 여러분의 시간과 몸을 주는 행위가 사랑이다.

 

사랑은 ‘WORK’ 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성육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다(대속).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는다. (살모사, 사마귀 등)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시가 있다.


꽃에 해 둔 메모

- 김용과 김경주의 만남


오래도록 너무 많은 별을 보아서 불행한 꽃,

그 꽃에 해 둔,

웃는 얼굴이 유난히 슬펐던

한 사내의 메모,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여야 한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슬픔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신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가?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사랑하다, 눈물 글썽이며 세상을 떠나는 자가 되자.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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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