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1.30 라마 나욧 같은 교회
  2. 2017.01.26 네가 어디 있느냐?
  3. 2017.01.2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1
  4. 2017.01.19 창조와 신앙
  5. 2017.01.19 들으라
  6. 2017.01.19 세례와 시험
  7. 2017.01.02 세례 요한의 죽음 2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30. 19:17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사도행전 6:1~7, 사무엘상 19:18~24)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66권의 성경 중 사도행전만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성경도 드물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메너리즘에 빠지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면밀히 살펴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우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120 여명의 열 두 사도와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음을 힘차게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가는 곳 마다 거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고쳐주는 기적을 베풀었다.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은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는다! 삶에 어려움이 있거든,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의 절정은 432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무서운 광경이다. 요즘, 이단들이나 하는 일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났다. 신천지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 자식들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분별이 필요한 말씀이다.

 

아무튼, 이렇게 무섭게잘 성장하던 초대교회에 어려움이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어렵게 했는지,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 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6장에 가면, 초대교회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인이 많아졌다는 뜻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 중에 구제 사역이 있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옛날 과부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 삼인 방(나그네, 고아, 과부) 중 하나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 중심의 교회였다. 그렇다 보니, 구제하는 일에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잘 챙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상했다.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 받으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일례로, 배식을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 식판에는 찡긋이 윙크하며 고등어 몸통 부분을 놓아주며 맛있게 드세요!’하면서, 헬라파 과부 식판에는 고등어 대가리나 꼬리 부분을 놓아주며 본 척 만 척 하면, 마음이 안 상하겠는가!)

 

무엇이든지, 몰입을 방해하는 3가지의 요인이 있다. 안정성의 위기, 의미의 위기, 활력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대입해 보면,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다르지 않다.

 

안정성의 위기란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모르면,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강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 대사가 나온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미생은 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으려고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계약직 직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몰입이 떨어진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까, 신앙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면 안 된다.

(<시골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 보니까, 시골의 한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 일을 잘 도와주어서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를 도와주는 이유가 자기들이 안 도와주면 교회가 망할까 봐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도 보면, 어떤 사람은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시키는 사람은 안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안정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걱정시키는 교회’? 아니면, ‘걱정해주는 교회’?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의미의 위기이다. 의미의 위기는 지금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위기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들이 왜 구제사역을 시작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까,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의미이다. ‘나는 누구니? 나는 왜 살지?’ 사춘기 때는 엄청 고독하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어진다. 부모나 선생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의미의 위기가 와서 신앙의 몰입이 안된다. “내가 지금 왜 교회에 나오고 있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의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신앙의 몰입은 굉장히 힘들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독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의미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고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여 신앙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 7절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충만히 찾아가는 교회를 세워가자.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위기는 활력의 위기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정확히 나온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 제자들이 말씀도 전하고 구제도 하고, ,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분주하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활력을 잃은 것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역을 과도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일이 바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일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누구 하나의 헌신으로 세워가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하는 곳이다.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헌신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교회 가면 헌신 안 해도 되니까. 앉아 있으면 다 해주니까.

 

갈라디아서 6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혼자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질 때 교회는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세워 나가야 할 교회는 안정성 있는 든든한 교회,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로해 주는 교회, 그리고, 지금 왜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는 교회, 또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는 활력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한 마디로, ‘라마 나욧 같은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꿈꾸고 세워 나가야 하라 교회의 비전이다. 사무엘상하의 말씀은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중에서 19장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라마 나욧이라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그곳에서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은신하여 생활한다. 그때도 정보 기관이 있었다. 사울은 정보통을 통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특공대, 델타포스, 네이비실)을 보낸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의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전령들은 다윗 죽이기라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연거푸 벌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 왕이 직접 간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겨났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만 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교회!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며 연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라마 나욧같은 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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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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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고린도전도1:10-18)

 

에큐메니컬 주일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

 

요즘 굉장히 이 용어가 오해 받고, 잘못 쓰인다. 복음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쓰인다. 그래서 복음주의 진영(WEA)과 에큐메니컬 진영(WCC)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보수주의고, 에큐메니컬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2013 WCC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WCC 총회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고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일이다.

 

에큐메니컬의 진정한 의미는 복음을 위해’ (분열된) 교회가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자는 뜻이다. 공산당처럼 커다란 한 덩어리 조직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연합기구를 만들어서 무슨 조직처럼 힘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효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키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교 율법과 전혀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학 와서 에모리에서 수업 듣는데, 재채기 하면 옆 사람이 왜 그랬슈?”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왜 그랬슈가 아니고, ‘갓 블레슈였다. 미국인들은 재채기 하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갓 블레슈해준단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채기는 힘차게 해야 제 맛이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분리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모교회이지만 유대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지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러한 일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다. 일부러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중심의 복음서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의 복음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들(헬라철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로고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 없이 많은 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곱틱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도 있다. 곱틱교회는 쉽게 이집트교회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는 곱틱어를 썼는데, 그 때문에 고틱교회라 불린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는 100% 인간, 100% 신이라는 주장이다. Vere homo, vere deus라고 한다.

 

영지주의 교회의 실체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는 복음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 문서를 말한다. 이집트 곱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사해문서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발견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분열한다. 가장 유명한 분열은 1054년에 있었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교회 간의 분열이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당시, 동로마제국의 교회와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어떻게 발출하느냐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고 주장했고, 서로마제국는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발출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 수 없는 나머지, 서로의 교회는 서로를 파문한다. 즉 서로 이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 1517년 로마가톨릭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태동인 종교개혁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되는 해인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다.

 

개신교는 그 이후에 엄청난 분열을 겪는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가 생겼고,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가 생겼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교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이다. 앤 볼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캐서린과 이혼한다. 그것을 교황청이 인정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여 만든 교회가 성공회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로서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를 변화시킨 메토디스트 무브먼트(Methodist Movement)를 일으킨 존 웨슬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다. 원래, 존 웨슬리는 메토디스트 무브먼트를 영국 성공회에 남아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하나의 교단이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 개신교는 1884-5년에 들어왔는데,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누가 먼저 땅을 밟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펜젤러 목사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펜젤러 목사는 결혼한 상태여서 부인과 함께 왔다. 미국의 Lady First 문화를 생각할 때, 아펜젤러가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이 둘이 서울에 세운 첫 교회가 각각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정동제일교회(감리교)이다(1887). 그후, 한국 감리교는 분열을 안 하는데, 한국 장로교는 수도 없이 분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WCC 가입 문제로 예장통합(장신대)과 예장합동(총신대)이 나뉜 것이다. 그 후로,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200여개 넘는 교단으로 나눠져 있다.

 

개괄적인 역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었는지 살펴보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들 파벌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울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 철학 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볼로파는 학문적 성향이 강해서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이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했을 것이다.) 게바파는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율법 전통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쉽게 말해 중도파, 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파였을 것이다. 특정 인물에게 속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룹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하는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으로 볼 때는 가장 정통 같지만, 성향으로 볼 때는 이단적인 경향이 가장 강한 분파이다. 직통계시 같은 거 하는, )

 

이러한 분파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근본적으로 시끄러웠다. 교회가 시끄러운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제다. 그러니, 교회가 시끄러운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안 시끄러운 게 이상한 거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낙담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너무 시험에 들지 마시라.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은 다 시끄러운 법이다.

 

다만, 에큐메니컬 주일을 맞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얻었으면 좋겠다.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핵심은 이거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따라해 보자.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게 인간인가? 우리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공산당원인가? 우리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 모시는 북한 주민인가? 도대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차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단순히 파벌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도 4개나 된다.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도 엄청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나그함마디 문서)도마복음서이다. 중국집에 가면, 짬뽕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함께 중국집 가면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하나로 통일해서 먹어야 하는가?

 

본문에서 쓰인 분쟁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마이다. 이는 , 간격, 분열, 불화를 뜻한다. , 어떠한 이슈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 것(불화)’이 문제인 것이다. 중국집 갔는데, 짬뽕 먹는 사람이 짜자면 먹는 사람보고, 짜장면 먹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어? 이 상종 못한 놈!”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쓰인 합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르티조이다. 이것은 원문에서 분사 완료 수동태의 형태(과거의 한 시점 표현)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들이 분쟁 이전의 온전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바라는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합하라라는 말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통일해서 한 가지만 먹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서로 양보해서 그냥 모두 짬짜면먹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짬뽕 먹는 사람은 짜장면 먹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짜장면 먹는 사람은 짬뽕 먹는 사람 인정해 주라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먹느냐는 것이다. 중국집 가서, 짬뽕 먹는 사람이나, 짜장면 먹는 사람이나 왜 그것을 먹는가? 짬뽕을 좋아해서? 아니면 짜장면을 좋아해서?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중국집 가서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이다.

 

, 그리스도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 십자가의 도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엘까미노 리얼에 있는 옛날 짜장면집에 가서 우리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 묻는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묻는 거 자체가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국집에 왜 왔겠는가? 식당에 왜 가나? 배고프니까 가는 거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김 집사가 내가 먹는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가서 따진다. ‘당신 왜 짬뽕 안 먹고 짜장면 먹어? 정말 웃겨? 웃기는 짬뽕이네!’ 그러면서 둘이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갈라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에 왜 왔는가? 교회 와서 서로에게 여기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교회에 왜 왔는가? 오늘 말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의 도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회에 온 것이다.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연합하고 일치하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니겠는가?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념처럼 생각하지 말라. 복음주의 진영, 에큐메니컬 진영, 이런 큰 개념을 생각할 것도 없다.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고 협력하고 양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문제다.

 

짬뽕 좋아하시는 분?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 짬뽕 좋아하시는 분들만, “짜장면 맛있게 드세요!”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들만, “짬뽕 맛있게 드세요!” 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우리, 탕수육 같이 시켜 먹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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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6

창조와 신앙

(창세기 1:1-5)

 

요즘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성경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엄청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창세기의 말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된 창조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아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통치하던 지역의 문명을 말한다. 요즘의 이란, 이라크 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정설이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와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 구약성경의 최고본인 사해사본’,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태고의 압수,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 티아맛이 그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도 형성되지 않았었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은 이 두 신의 전쟁을 통해 창조된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이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치며 탄생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마르둑을 통해서 그들은 세상의 지배를 꿈꾼 것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때 문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에 굴복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신,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 굴복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일반인들, 대중들)은 바벨론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힘에 의해 재편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사는게 상책(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그들을 P문서 그룹이라고 한다. P문서는 Priest, 즉 제사장 문서이다. 이들은 바벨론이 이 세상의 질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때에, 그들을 향해 “NO”를 외친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태초에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하며 세상 질서를 편입한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이러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 또 한 번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고, 헬레니즘 문명이 왔을 때,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의 힘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었다. 그들은 그 세상을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이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로 불렸다. 그는 온 세상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주피터(제우스) 신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생산한 문서 중에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는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근거로만 삼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하늘과 땅)에 대한 긍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아무렇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존재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어떠한 면 때문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불경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국제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IS 대원들의 테러를 보면,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알라 아크바를 꼭 외친다. 이는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테러를 저지르면서 그가 예수는 위대하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증오속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가 상대방(존재)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존재를 보면서 꼴보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생명)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일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질병, 인간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기 참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 외에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창조되었다는 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그들의 힘과 문명을 경험하면서 바벨론 세계의 절대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바벨론에 동요되어 그들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이 심어준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똑 같은 일이 로마제국 시대, 즉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로마제국(황제)의 힘에 압도되어 그들에게 순응하면서 살았다. 지도자 그룹(사두개인)도 있지만 그보다 서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사케오이다. 사케오는 로마의 세금징수법에 순응해서 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안락하게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케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삶의 방식(로마제국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일례로, 요즘 부모들이 왜 그렇게 자녀들 교육에 신경을 쓰고, 자녀들을 소위 명문대에 들여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절대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구속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분히,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속회공과 2).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못살게 구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한 고백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함몰되어 그것이 절대적인 양 얽매이지 않는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속회공과 2과 질문)”,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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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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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1

세례와 시험

(마태복음 3:13-4:11)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16일이 주현절인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났는지를 알려준다. 왕의 별을 보고 헤롯 대왕을 찾아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일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천사의 현몽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다.

 

주현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 씻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피조물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우선, 다른 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에 차이가 있다. 다른 이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이유는 15절 말씀 때문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씻음을 위한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뜻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구원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를 행하시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그 운명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를 뜯어 말린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세상에 정체가 드러나면 시험을 당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시험이 닥치는 것을 종종 본다. 조그마한 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까지 일어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 가다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딸은 잃은 분도 있다. 그분은 교회 가다 그런 일을 당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말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예수님도 아기 예수 때 동방박사를 통해 세상에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해졌었다.

 

교회 오는데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여러분은 예수 믿는데 있어 마귀의 극심한 방해를 벗어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 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본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배고플 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느끼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리는 쉽게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그럴 때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우리도 끊임 없이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특별히 예수를 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헌신했으니까, 나한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안 들어 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또는 헌신을 빌미 삼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지만, 시편 91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것 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약속도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시험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다. 예수님께 드리운 시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지만 손쉬운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이러한 시험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택할 것을 끊임 없이 유혹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이야기 이다. 그들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야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경배하도록 유혹 받고 강요 당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물어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리는 이유는 그것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마약하는 사람이 왜 마약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미친 사람이 왜 돈돈하는지 아는가? 돈을 셀 때, 돈 냄새 맡을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 살 것 같아.)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와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 것과 그 결과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정체를 밝히면, 시험을 당한다. ‘저는 시험을 안 당하는데요라는 분은, 두 가지 중 하나다. ‘귀신이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시험을 당하거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보다 먼저 시험을 당하신 주님께서 도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3)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례를 받은 것이고, 시험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구원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언제나, 어느 때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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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 16:57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7-29)


이것은 피에타 상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피에타는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제작한 작품이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다. 그 후로,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데…”라며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젊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처녀인 동정녀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자식을 잃었다.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어머니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비판 받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큰 슬픔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가냘픈 생명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오늘 말씀도,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는 장면을 볼 때다, 그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과 의문이 몰려든다. 물론,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덜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4개의 복음서를 받아 든 우리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 아들(늦둥이)을 얻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라.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이다. 특별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아들 요한의 탄생을 놓아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까지 지어 불렀다. 그 중에서 아기 요한을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니리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76-78, 80).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뻤으며, 그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존귀한 자라고 믿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물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허무한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요한이 태어날 때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과 말타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큰 윤리적 잘못이 있었는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일을 비판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 선지자로 생각하여 그의 메시지를 무서워했는데, 오히려 헤롯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를 죽일 명분을 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을 맞아 음모를 꾸민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자신의 딸 살로메가 신명나는 춤을 추게 만든 뒤, 헤롯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주문하기를 헤롯 왕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한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친 헤롯은 차마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가져다 준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한 여인의 음모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서 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야기에 삽입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도 여행에 나설 것을 주문하신다. 사실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하나님 나라) 전파에 있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없어도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 30: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들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는 게 좋다. 이게 좀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간편한 삶(simple life)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으로 여겨져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말라 고쳤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은 단순히, ‘회개하시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은 삶이 간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먹고 마시는 것’, ‘소유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는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평강은 쉽게 말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희락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잘 지내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데서 온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꼭 인지해야 하는 말씀은 다음 구절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은 제자들인데, 이름이 드러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미덕)으로 보지 말라. 제자들(우리들)의 이름은 없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도덕적인 일, ‘미덕과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겉말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내가 행한 사역을 통해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시험에 드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러내고 싶으면 드러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데 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떤가! 괜찮다. 서로 이름을 드러내고 많이 칭찬해주시라. 지금 나는 기독교의 도덕(미덕)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말씀, 너무 식상하지 않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권사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세요!” 이렇게,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드러내는 일을 경쟁이라도 하듯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겸양과 겸손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우리는 겨우 우쭐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서만 끝나지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즉 예수의 이름은 구원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보았을 때 매우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그린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과 연관되어 묘사된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픈 죽음,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것에 대한 복음 증거의 죽음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허무해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죽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제자도의 마지막 길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은 흥하여야 하고, 나의 이름은 쇠하여야 하는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리 드러나고 흥해 보았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하는 이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내 이름만을 드러내고 죽는 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다. 내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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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