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9'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1.19 창조와 신앙
  2. 2017.01.19 들으라
  3. 2017.01.19 세례와 시험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6

창조와 신앙

(창세기 1:1-5)

 

요즘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성경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엄청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창세기의 말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된 창조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아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통치하던 지역의 문명을 말한다. 요즘의 이란, 이라크 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정설이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와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 구약성경의 최고본인 사해사본’,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태고의 압수,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 티아맛이 그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도 형성되지 않았었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은 이 두 신의 전쟁을 통해 창조된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이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치며 탄생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마르둑을 통해서 그들은 세상의 지배를 꿈꾼 것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때 문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에 굴복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신,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 굴복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일반인들, 대중들)은 바벨론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힘에 의해 재편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사는게 상책(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그들을 P문서 그룹이라고 한다. P문서는 Priest, 즉 제사장 문서이다. 이들은 바벨론이 이 세상의 질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때에, 그들을 향해 “NO”를 외친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태초에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하며 세상 질서를 편입한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이러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 또 한 번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고, 헬레니즘 문명이 왔을 때,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의 힘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었다. 그들은 그 세상을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이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로 불렸다. 그는 온 세상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주피터(제우스) 신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생산한 문서 중에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는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근거로만 삼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하늘과 땅)에 대한 긍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아무렇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존재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어떠한 면 때문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불경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국제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IS 대원들의 테러를 보면,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알라 아크바를 꼭 외친다. 이는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테러를 저지르면서 그가 예수는 위대하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증오속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가 상대방(존재)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존재를 보면서 꼴보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생명)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일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질병, 인간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기 참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 외에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창조되었다는 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그들의 힘과 문명을 경험하면서 바벨론 세계의 절대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바벨론에 동요되어 그들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이 심어준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똑 같은 일이 로마제국 시대, 즉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로마제국(황제)의 힘에 압도되어 그들에게 순응하면서 살았다. 지도자 그룹(사두개인)도 있지만 그보다 서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사케오이다. 사케오는 로마의 세금징수법에 순응해서 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안락하게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케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삶의 방식(로마제국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일례로, 요즘 부모들이 왜 그렇게 자녀들 교육에 신경을 쓰고, 자녀들을 소위 명문대에 들여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절대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구속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분히,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속회공과 2).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못살게 구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한 고백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함몰되어 그것이 절대적인 양 얽매이지 않는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속회공과 2과 질문)”,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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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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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1

세례와 시험

(마태복음 3:13-4:11)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16일이 주현절인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났는지를 알려준다. 왕의 별을 보고 헤롯 대왕을 찾아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일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천사의 현몽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다.

 

주현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 씻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피조물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우선, 다른 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에 차이가 있다. 다른 이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이유는 15절 말씀 때문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씻음을 위한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뜻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구원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를 행하시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그 운명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를 뜯어 말린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세상에 정체가 드러나면 시험을 당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시험이 닥치는 것을 종종 본다. 조그마한 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까지 일어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 가다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딸은 잃은 분도 있다. 그분은 교회 가다 그런 일을 당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말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예수님도 아기 예수 때 동방박사를 통해 세상에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해졌었다.

 

교회 오는데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여러분은 예수 믿는데 있어 마귀의 극심한 방해를 벗어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 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본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배고플 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느끼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리는 쉽게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그럴 때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우리도 끊임 없이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특별히 예수를 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헌신했으니까, 나한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안 들어 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또는 헌신을 빌미 삼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지만, 시편 91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것 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약속도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시험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다. 예수님께 드리운 시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지만 손쉬운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이러한 시험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택할 것을 끊임 없이 유혹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이야기 이다. 그들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야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경배하도록 유혹 받고 강요 당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물어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리는 이유는 그것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마약하는 사람이 왜 마약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미친 사람이 왜 돈돈하는지 아는가? 돈을 셀 때, 돈 냄새 맡을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 살 것 같아.)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와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 것과 그 결과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정체를 밝히면, 시험을 당한다. ‘저는 시험을 안 당하는데요라는 분은, 두 가지 중 하나다. ‘귀신이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시험을 당하거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보다 먼저 시험을 당하신 주님께서 도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3)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례를 받은 것이고, 시험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구원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언제나, 어느 때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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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