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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7 주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
  2. 2017.02.23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3. 2017.02.23 나는 걷는다
  4. 2017.02.22 희망
  5. 2017.02.13 가까운 말씀
  6. 2017.02.11 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1
  7. 2017.02.10 장자의 명분과 복
  8. 2017.02.06 소금과 빛과 의
  9. 2017.02.03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7. 18:21

주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

(베드로후서 1:16-21)

 

오늘은 주님의 산상 변모 주일이다. 오늘로 주현절(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 끝나고, 수요일에 있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기에 들어선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안다.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전한다. 그 이야기에 보면,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었는데,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자 논쟁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여 칭찬을 받는다. 그러한 인자 논쟁, 예수가 누구냐?”라는 질문 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산상 변모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정황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그 때에,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누군가 데리고 온 어떤 사람의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이 변형되셨다(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과 2) 변형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과 3)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이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는 것과 4) 그러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아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것과 5)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냐?’라는 인자 논쟁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메시아다)’라는 증언이 펼쳐진다. 그런데,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이는 예수의 모습과 이사야서에서 증거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님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에서 빛이 났지만, 이사야서에서의 메시아는 주 앞에서 자라나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라고 전한다.

 

이사야서에서 전하는 메시야의 모습에 비하면,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어떠한 예수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사야에서의 메시야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부활의 예수이다. 부활의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눈다. 모세는 율법을 의미하고, 엘리야는 예언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다.

 

부활의 예수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을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산에서 내려와 마주한 그들의 일상은 녹록치 않았다.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제자들은 쩔쩔 맸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 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서 아픈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소용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장면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밤낮으로 예배하며 기도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4). 이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깨닫아 알아야 한다. 자신도,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모두 그렇다. 마음은 공부하고 싶은데 몸은 노는데 가 있으면 안된다. 가정도 부부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자녀들도 잘 키우고, 가정에 복이 임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교회가 부흥되는 법이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합시다!)

 

그 전까지 우리가 본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비겁한 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은 뒤,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도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도망치고 숨던 제자들은, 성령 받은 뒤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도행전 214절은 그 정황을 이렇게 증거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의 증언을 보면,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해도 거기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듯 하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이전에 있었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담대한 마음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한다고 증거한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 일어난 주님의 변모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실 주님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의 예언이었다. 예수님이 변모하여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의 증언에 따르면,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말한다.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뜻은 그 분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께서 예언의 성취라는 뜻은 그가 바로 오실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것을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변모는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베드로의 고백대로, ‘그리스도(메시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제자들은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산에 그냥 머물러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인지 안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을 목격한 세 명의 제자들처럼 그냥 이곳에 머물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을 산에서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데리고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괜찮으니, 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을 예언하는 자로 부르신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19). 성경의 예언은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과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이 궁금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에 출세길이 열릴까 하고 점쟁이를 찾는다. 한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은 충청도 산 골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부자가 많다고 하는 서울의 강남구, 서초구에 점집이 가장 많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증거하는 더 확실한 예언이다. 그 예언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 우리는 모두, 이 예언을 선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변하고 싶지 않은가?(여러분, 변하고 싶죠?) 그래서 우리는 소소하게,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예쁜 옷도 사고, 여행도 가고, 어떠한 일이든 변화를 구하며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모두 예언자로 부르신다. 그 예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이다. 그렇게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꽁꽁 숨어 있었는데,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 예언을 전한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21). 그러므로, 우리의 변모는 성령의 감동하심에서 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예배하며 기도했던 제자들에게 불같이 내려 주셨던 그 성령, 바로 그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변모하여, ‘예언의 일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성령을 날마다 기다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을 이루셨는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를 세상에 증언하는,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우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성령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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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한다. 독서를 하되 신학서적이나 신앙서적만 읽지 말고,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도 병행하여 읽는다.

 

2. 다른 설교자의 설교는 가급적 듣지 않는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많이 들으면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설교를 무의식적으로 베끼게 된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독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근본적인 밑거름이다.

 

3.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언론 기사를 주목한다. 특별히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적 사건 사고를 챙겨 본다.

 

4. 교인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당면한 문제, 그들의 고민 등을 잘 메모해 둔다.

 

5. 성서 본문을 택할 때, 사회적 문제, 교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먼저 맞추지 말고, 되도록이면 성서정과에 맞춰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먼저 맞춘다.

 

6. 성서 본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성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닌, 평소 성경을 많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서학 분야와 조직신학 분야의 책을 평소에 많이 읽어 두어야 한다.

 

7. 선택한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을 한다. 성서 본문이 원래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밝혀낸다. (이것을 충분히 하지 않고 설교를 하면 다 사기치는 거다.)

 

8.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져 오는 작업을 한다.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평소에 해 놓은 독서이다.

 

9. 성서의 본문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를 공적인 사회 문제에 적용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사적인 교인들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교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 선을 넘으면, 설교가 아니라 잔소리가 된다.

 

10. 설교 준비는 일주일에 걸쳐서 하되, 최종 설교문 작성을 주일에서 너무 멀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주일 설교문 작성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끝내는 것보다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끝내는 게 더 좋다. 왜냐하면, 최종 정리는 뇌 속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인데, 우리의 뇌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문을 뇌가 기억하고 있어야, 단순히 설교문을 읽는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문에 기초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내 기억에 없는 것은 그만큼 영감과 감동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자신이 내 설교에 영감과 감동이 넘쳐야 그것이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는 법이다.

 

11. 주요 요점을 적은 메모 형식의 설교문을 작성해서 설교하면 안 된다. 설교문은 반드시 완성된 문장 형태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또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전한 형태의 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기가 지금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12. 최종 설교문을 작성했다면, 반드시 두 세 번 읽으며, 색깔 있는 팬으로 첨삭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첨삭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야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

 

13. 설교 초보자라면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한 게 낫다. 그래야 말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하되, 때로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내맡기는 것도 괜찮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말로 때우기식의 설교는 죄이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14. 예배를 마친 후,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여 자기 자신의 설교를 다시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문 작성에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최종 설교문에 표시되어 있는 첨삭 부분을 다시 정리하여 파일에 저장한다.

 

15. 스스로 자신의 설교의 청중이 되어 자신의 설교를 들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피드백을 해 본다. 더 나아가, 배우자에게 피드백을 받아 본다. 배우자의 피드백만큼 좋은 피드백이 없다.

 

16. 설교 준비와 실제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설교 작업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설교를 소비적으로 하면 남는 게 없고 영적 허탈감만 올 뿐이다. 설교 작업을 생산적으로 한다는 것은 설교 작업을 통해서성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압박감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을때우면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설교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실력과 영성을 기르는 실전(實戰)이어야 한다.

 

17. 믿음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예배 때 드려지는 찬양이나 선포되는 설교는 감정을 고양시키는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변화는 사건이 발생해야만 일어난다.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전의 존재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게 문제고 과제다. 과연 우리는 설교를 사건이 되게 하는가?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만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누구보다 성령께 모든 존재를 맡길 줄 아는 깊은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3. 09:04

나는 걷는다

(창세기 5:21-24)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오늘 말씀은 아담의 계보(족보)를 말하는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계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파악하려면 창세기 4장의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얻은 그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죄가 들어온 후, 아담, 즉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해졌는지 알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인정 받기 위해 사람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단한 삶을 살았는데 인정 받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악해진다. 독일의 대 철학자 헤겔은 일찍이 이러한 삶의 모습을 인정투쟁이라고 명명했다. 헤겔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인정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가인은 인정투쟁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아벨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정투쟁이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며 그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있는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자기 긍정의 좋은 심리적 조건으로 본다.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가인은 저주 받고 추방당해 떠돌이(나그네)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형별의 가혹함을 호소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는 표식을 주신다.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다.

 

창세기 416절 이하의 말씀은 가인이 놋 땅에서 꾸린 가정 이야기가 나온다. 가인은 결혼하여 애를 낳는데, 에녹이라 칭하고, 성을 쌓은 후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 부른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에녹과 다른 인물이다. ‘에녹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이다.

 

가인의 족보는 우울한 이야기로 끝난다. 가인의 6대손 라멕의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이 펼쳐진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떠나보낸 후 세번 째 자식을 낳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다. 셋째 아들이어서 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Seth’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임명하다이다. 그리고 은 에노스를 낳는데,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부른다.

 

5장에서 시작되는 아담의 계보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것이 5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계보의 첫 번째 특징이다. 앞서 보았듯이, ‘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씨인데, 아담의 계보는 아담에서 곧바로 으로 건너 뛴다. ‘다른 씨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아담의 계보의 또다른 특징은 일정한 패턴으로 계보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그 패턴을 이루는 동사가 세 개 있다. “낳았다.”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이다. 특히, “죽었더라는 말은 217절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의 계보에서 이 패턴이 깨지는 부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녹의 삶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낳고, 사는 부분까지는 같다. 그러나 죽었다는 부분이 다르다. 에녹에게는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쓰인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명을 말할 때, 에녹과 엘리야를 꼽는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곳은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성경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11:5).

 

이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가? 아니면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만일 호사가들이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겠지만, 우리는 믿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어야 한다. 창세기 기자는 왜 에녹에게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다른 표현을 써서 그의 마지막을 말하고 있는가?

 

아담의 계보 중, 에녹에 이르러 시선을 머물게 되는 표현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다. 우리 말로는 동행이라고 옮겼지만,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본 뜻을 그대로 옮겨, ‘Enoch walked with God’이라고 쓴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구약성경에서 무려 1,562번이나 나온다.

 

할라크는 기본적으로 걷다, 가다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할라크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느냐 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동사이다. 그런데, 특별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아담의 계보가 나오기 전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이다. ‘함께 걷는다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함께 걷다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어린시절(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5학년 2학기 때 양재초등학교가 생겨서 그곳으로 집단 전학을 가서 양재초등학교를 1회로 졸었했다.)를 다녔는데, 그때는 차비로 오락을 하거나 떡볶이나 순대 같은 거 사 먹고 말죽거리에서 우면동 집까지 걸어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집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1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놀다가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수도 없이 걸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거나 시간이 길다고 느끼지 못했다.

 

목적이 같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셨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실 때를 표현하는 말로 할라크를 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신다. 그런데, 창세기 3장과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오시는 하나님을 나가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고, 모두들 자기들이 가고 싶은 데로 가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아담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심지어 숨는다. 가인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그의 6대손 라멕은 아예 대놓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짓만 일삼는다.

 

그러는 중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이것만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아담의 계보이후 나오는 이야기도 모두 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세상이 뿌리 깊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아 때에 가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의인이라고 소개된다.

 

실제로, ‘걷는 행위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고속도로를 한 번 걸어본 적 있는가? 걸어가면 빠르게 지나가며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다. 차 안은 안락하고 편리하지만 걸어서 가는 고속도로는 엄청난 소음 때문에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걸으면서 보는 세상과 무언가를 타고 빠르게 지나며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이 아이들과 함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했던 <나는 걷는다>의 기행문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비행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통해 인생을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책에는 이런 말도 등장한다. “존재 자체가 일종의 행군 아니던가.”

 

위에서 나는 함께 걷는다는 말이 굉장히 시적이고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 내리기 보다는 그냥 각자의 상상력에 맡겨 두는 게 훨씬 풍요로울 거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실제로 너무 걷지 않는다. 운동 삼아 약간 걸을 뿐, 어떠한 것을 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기 위해서 30분이든 1시간이든 걸어서 왔다면, 바로 이 시간 이렇게 예배 드리며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그리고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시라. ‘걷는다는 것이 주는 풍성한 의미 안에 머무시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풍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죽음을 맛 볼 겨를이 없다. 하나님은 분명 에녹처럼 그를 데려가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느 찬양에서처럼 구원 열차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해서, 즉 주님과 걸어서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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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7. 2. 22. 07:51

희망

 

내 잘못이구나

형벌이 내리겠구나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해야겠구나

멀미같이 시간을 앓겠구나*

기억의 지층이 두꺼워지겠구나

넋이 처용처럼 춤추겠구나

운명에 고인 고름이 터지겠구나

주어 담지 못하니 그냥 흘러가겠구나


* 박경리의 [사마천]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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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3. 17:13

가까운 말씀

(신명기 30:11-20)

 

내가 살던 조지아 컬럼버스 근처에는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생가가 있다. 언젠가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이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에 가면 한 가지 생각 밖에 안 든다. “정말 개천에서 용났네.”

 

거기는 아직까지 시골이다. 지미 카터 생가를 가면 그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장식과 스토리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학창시절에 관한 것이다.

 

우선, 교장은 학생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 교장의 이름은 Julia Coleman인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단다. “Readers make Leaders.” 굉장히 훌륭한 표현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뭐 이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한 말 중 지미 카터를감동시켰다는 말이 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Always do your best, someday one of you may grow up to become president.” ‘언제든지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언젠가 너희 중 누군가는 자라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뜻이다.

 

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가했다. 내 일찍이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많은 문화가 얼마나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인가를 깨달았는데, ‘장래 희망: 대통령이라는 것까지수입된문화였는지를 몰랐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어린 시절, 그네들의 장래 희망은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서가 한국 땅으로 건너왔고, 1948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이래로 대통령이 뽑혔고,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제일의 장래 희망은 그때부터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초등학생 시절 (1970, 1980년대)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에 단연 위인전기가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위인처럼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떠한 위인에게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장 좋았고, 커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된 것에 대하여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목회하고 있는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꿈이고, 아버지처럼 사랑의 목회자가 되고 싶은 게 꿈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나, 또는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행동이나 모습을 떠올리면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누구든지,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기억에 남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영향력을 끼치던 훌륭한 인물, 영도자가 있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모세이고, 다른 한 명은 다윗이다. 이 둘 중에서, 모세에게 훨씬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간접적으로 모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뿐 만이 아니다. 신약에서 모세는 예수님과 비교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태복음 같은 곳에서는 예수가 누구냐를 논증할 때 모세를 들어서 비교한다. 이는 모세에게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도자인 것처럼, 예수는 죄(죽음)의 종살이에서 인류을 구원한 영도자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가 궁극적인 구원자라는 뜻이다. 아마도, 2천 년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수를 비교한 복음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 생명보다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 당부의 말씀을 전한다. 상상컨데, 전하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고, 듣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을 것이다. 사실, 말씀은 이렇게 선포되고 받아야 한다. 절절한 마음으로 전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서 생명을 꽃 피우게 된다.

 

모세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제 곧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세는 두 가지 삶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과 복의 삶, 그리고 사망과 화의 삶. 이 둘 중, 어느 삶을 살고 싶으신가? 당연히 생명과 복의 삶이다. ‘사망과 화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금 모세는 이 두 가지 삶 중에서 너희가살고 싶은 삶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절절한 마음으로 그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복을 주기 위하여 애쓴 것 밖에 없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전부이다.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한 삶의 가르침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핵심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16절 전반부). 그러면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16절 후반부).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의 핵심 말씀이라고 하는 64절에서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함께 나누는)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지도자(영도자) 모세가 절절히 전해준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순종하여 생명과 복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계속 들여다 봤지만, 거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땅을 분배한다. 여기에서 벗어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게 바로, 아이성 전투다. 말씀에서 벗어나 행동한 아간때문에 온 이스라엘에게 사망과 화가 미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교훈 삼아, 이전보다 더욱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

 

모세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의 율법(명령)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가서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고, 바다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우리에게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담긴 말씀이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어떠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또는 바다처럼 멀리에 있는가? 아니면 입과 마음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가? 모세의 이 당부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입에 그리고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영복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입과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한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 남자가 직장 때문에 멀리 떠났다고 한다. 그 둘은 서로의 애달픈 마음을 전하고자 매일매일 서로가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서로의 편지를 매일같이 전해주던 우체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총각이었다. 결국, 이 여인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아는가? 멀리 떠난 애인이 아니라, 매일 본 우체부 총각과 결혼했다고 한다.

 

가까움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저 하늘에 있는가? 저 바다에 있는가? 아니면, 여러분 가까이, 입과 마음에 있는가? 그 말씀을 매일 같이 만나는가?

 

매일, 가까이 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 말마따나, 우리들, 얼마나 서로 자주 보는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보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본다. (이곳에 이사 와서, 뉴비전에 있는 내 친구는 두 번밖에 못 봤다.) 남들이 보면, 이런 말 할 정도다. ‘니네 사귀냐?’ 그렇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다. 누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사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귐이라고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서 무슨 일을 하는가? 교회는 뭐 하는 곳인가? 싸우는 일? 미워하는 일? 먹는 일? 아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모여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모여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아시나 모르겠어요!)

 

나는 부교역자를 맞을 때 한 가지만 당부한다. ‘맡은 일 열심히 해주세요!’ 이런 말 안 한다. ‘전도사님, 저를 사랑해 주세요. 교회를 사랑해 주세요!’ 저도 전도사님을 사랑할게요!’

 

성경에서 모세를 보니까, 무슨 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무슨 일을 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분이다. 그렇다 보니, 모세는 출애굽 역사를 이룬 것이고, 그렇다 보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출애굽 역사, 십자가, 그것은 사랑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것,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 그래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뜻과 맘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되는 데, 이것이 교회의 어떠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모은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먼저 세상을 떠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새로운 사도 한 명을 뽑는 이야기가 나온다. 두 명이 후보에 오르는데, 한 명은 요셉(유스도)이고 다른 한 명은 맛디아였다. 그들은 기도했고,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혔다. 이들은 이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안 뽑힌 요셉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치거나, 요셉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친 일이 없다. 왜 그랬을까? 맛디아가 뽑힌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사랑이다.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주님의 제자들인지 오늘 회의를 통해서 보여주자.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더해 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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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나는 군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최상위 부대에서 최고 고위급 인사를 모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잊혀지지 않는,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훈이 있다.

 

모시는 분의 보직 상 장거리 운행이 잦았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에 운전병이 꼭 해야 할 일은 정비대에서 차량을 점검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거리 운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량 정비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얼마전 차량 정비를 받았던 터라 별 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때가 여름 가까웠던 것 같다. 사건은 그때 터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천안 쯤에서 갑자기 차가 서 버린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일이 벌어지자 장군은 나에게 차량 점검 여부부터 물었다. 점검을 못 받았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수송대에 전화해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견인차에 끌려 이동 도중 차 안에서 장군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장군 그 때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사건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니,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조속히, 그리고 잘 수습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라."

 

인생을 더 살아보니,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목회를 해 보니 그때 장군의 교훈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알겠다.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진다. 갈등은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공간, 또는 어긋난 공간을 매울 수 있는 기회도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사건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인간관계, 공동체를 만드느냐, 아니면 사건과 갈등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살다보면 원치않는 사건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과 갈등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사건과 갈등을 통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0. 17:16

장자의 명분과 복

(창세기 28:10-22)

 

(퀴즈: 야곱 이야기는 창세기 몇 장부터 시작되는가? 쉽게 외우는 방법은?) 창세기는 네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의 50장 중 반은 아브라함 이야기, 반은 야곱 이야기이다(야곱 이야기는 그래서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 이론에 따르면,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범한 탄생, 갈등, 떠남, 성장, 되돌아옴. 야곱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의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탄생은 범상치 않았다. 그의 태생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이 말씀을 듣고 태어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이 된 것이다. (발꿈치를 잡았다.)

 

에서와 야곱의 성장과정을 보면, 성향 상 우두머리(장자)는 에서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에서는 장성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냥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일을 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유약해 보이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보이지 않게 시작된다. 하루는 사냥에서 집으로 돌아온 에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야곱의 떡과 팥죽을 요구한다. 야곱은 평소에 자신이 쌍둥이 동생으로서 장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만든 떡과 밭죽을 에서의 장자권을 사는 데 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이렇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우리는 인동 장씨인데,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할머니께서 백령도에서 피난 나오시면서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시며 족보 없는 이에게 파셨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족보 조사해 오는 숙제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우리는 그냥 인동 장씨, 예수파로 써가라 하셔서 그렇게 숙제를 해 간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2634절과 35절 두 절에 에서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안타까운 장면이 나온다. 에서는 이방인 아내들을 맞이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성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이 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을 그대로 섬겼을 것이다. 가정에서 신앙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갈등이 증폭된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주려 한다. 이 축복은 일반 축복과 달리, ‘유언이고 상속이다. 요즘도 부모가 죽기 전에 유언과 상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싸움 하는 집안이 심심치 않게 있다. 부모에게 를 더 많이 물려 받기 위해서 자녀들이 경쟁한다. 그래서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한다. 그래야 자식들이 끝까지 잘한다고 한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도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승자는 야곱이었다. 야곱은 변장을 하여, 형 에서에게 내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다. 아버지 이삭이 내린 축복은 이것이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만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7-29).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물질과 명예와 형통의 복이 이 말씀에 다 들어 있다. 자녀들에게 물질을 직접 주지 말고 (줘 받자 탕진하거나 싸움 할 가능성이 크다), 날마다 이 말씀을 주면 좋다. 인간은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라고 베푼 것이 나중에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심으로 변질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야말로 복이 된다. (오늘 밤, 자녀들에게 이 복을 빌어주고 주무시라.)

 

기회를 놓친 에서에게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27:39-40). 참으로 안타까운 축복이다. 에서의 주소는 척박 시 척박 구 척박 동이다. 칼을 믿고 살아야 하고, 아우를 섬기며 살아야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이렇게, 에서의 말 대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형에게서 두 가지를 빼앗아 간다. 장자의 명분과 복.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27:36).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나만 이상한가?) 야곱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것은 장자의 명분과 복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은 실물이 아니다. 야곱에 에서에게서 실제로(실물로는)는 빼앗아 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사건 이후, 더 어려워진 것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야곱이다.

 

야곱은 이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이 쉬운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이민자인 우리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 서로 위로해 주라. 충청도 사투리로, 고생이 많아유~)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만나 적도 없는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장자의 명분과 복을 차지한 야곱과 그것을 빼앗긴 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 보자. 대표적인 예로 결혼 문제를 보라.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 그런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야곱은 아버지의 당부를 지킨다. 그런데, 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에서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 한다.

 

야곱은 계속 말씀 위에, 복 위에 있고, 에서는 계속 거기서 벗어난다. 결정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은 땅과 자손의 복,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칭하고, 거기에서 제단을 쌓는다.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이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약속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

 

위대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을 위한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저절로 장자가 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자와 복은 소망이고 약속이다. 야곱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위대함은 조지프 캠벨의 말 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있다. 야곱은 원래 장자가 아니었고, 복을 받을 위치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자와 복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받고, 그것을 이루어 갔다. 차남으로 태어났고, 유약했고, 엄마 치마폭에서만 놀았던 야곱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입지전적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소망대로 장자와 복을 일구어 낸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야곱이 받았던 약속과 소망을 똑같이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여러 민족, 여러 사람 중에 장자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께 나아와 예배 드리는 이유는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과 복을 믿기 때문이며, 힘들고 어렵지만, 그 약속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멈추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임한 줄로 믿는다.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약속과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서로 지치지 않게 격려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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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6. 13:54

소금과 빛과 의

(마태복음 5:13-20)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백미라고 불린다. 지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삶 곳곳에 베어 있어 그 가르침의 놀라움이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들어봐서 낯섦이 덜 할 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례로,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은 에 관한 것이데,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유교사상 아래 있는 동양국가에는 오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 장수하는 것, 2)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하면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물질적 부와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세배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서로 물질적 부와 건강을 빌어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보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명예, 자식, 외모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헬라철학사상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요즘 세상에서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은 자신의 행복 또는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 먹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기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모르는 자는 결코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자는 참된 복,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을 사모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소금, , 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 ,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두 어떤 현실을 가르쳐 주는 메타포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과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또는 성경의 저자는 소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이텐티티(정체성)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소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성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 우선 각각의 말씀을 보자.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출애굽기 30장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성막(지성소, 성소, 바깥뜰) 중 성소에는 분향단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 향을 만들고 그것에소금을 쳐서 성결하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금은 일차적으로 성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 2장은 5개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중 소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소제(Grain Offering)는 곡식을 빻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소제를 드릴 때는 소제물에 다른 첨가물(누룩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한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사용된다. 꿀은 달콤하지만 불에 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누룩은 자기과시, 과장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꿀은 달콤하지만 시험이 오면 악취를 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불에 타면 유향처럼 향기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제는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런데, 소제에는 죄 사함의 의미가 없다. 소제는 다른 제사와 더불어 함께 드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왜 그러냐면, 소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제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소금은 불변성, 방부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실함(변함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른다. 소금 언약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민수기 1819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둘째는 역대하 135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신실함(변함없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빛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이 말씀은 이 단어 때문에 굉장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행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이는 착한 또는 선한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로 번역했지만, 요한복음 10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착한 또는 선한은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 ‘착한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을 말한다. 일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신다. 이게 요즘 계산법으로는 안 맞는 수지타산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멍청한 행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착한 행실이다. ? 한 사람이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보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의 이 된다는 것은 남들(사람들) 보기에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단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타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러한 모습, ‘소금과 빛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잘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외적인 의즉 외형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내적인 의이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그 말씀을 지켰다. 살인만 안 했지,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물론, 살인을 외형적으로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미워 죽겠는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죽였는데, 살인만 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살인만 안 했지, 그 앞에서 또는 안 보는 데서 상대방에 대하여 라가(Raka, 심한 모욕을 주는 욕)’라고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남을 미워하면 죽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증언으로 그들이 이끌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일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는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정욕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참된 복이시고 행복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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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3. 19:35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창세기 12:1-9)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다. 그 중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은 우르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간다. 성경은 데라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인간적인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식을 잃은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을 하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머물러 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하란 땅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데라가 우상을 숭배하던 하란에 그의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두란노 주석 참조)

 

11장의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사래는 임신을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먼저 죽은 데라의 셋째 자식 하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밀가, 이스가)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향년 205세에 하란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먼저 죽은 막내 아들을 그리며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란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 거다.

 

12장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간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떠나.. 가라이다. 이는 너 스스로 가라”, “너 자신을 위해 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표현된다. 떠나야 할 것은 확실한데, 도착해야 할 곳은 불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게 함정이다. 인간의 심리는 확실한 것에 거하고자 한다. 보장된 유익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보장된 유익이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떠나, 불분명한 곳,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의 떠남은 보장된 모든 유익에서 떠나는 것,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1)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

2)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3) 네가 복덩어리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가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생의 아들이라 큰 아버지인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둘째는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정에 조카 롯을 아들 삼기 위함이다. 아마, 이 둘 다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을 아들이 계속 안 생기자 롯을 실제로 자신의 유업 이을 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모든 유익을 버리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는 이익이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많은 자식을 얻어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관련된 약속을 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 이것은 아브라함의 교만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나 건드려봐! 하나님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 말씀은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 보게 된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신다. 위기만 모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복을 내리신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거래(Deal, 또는 Business)가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뻐함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4절과 5절 말씀에 있다. 먼저 5절 말씀을 보면 이렇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일단 떠났다. 하나님은 그가 떠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이 그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났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떠나는 것 조차도 못한다. 죄가 관영한 곳에 머물며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떠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울하게 죽어간 곳,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곳 하란을 마침내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떠난 아브라함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느냐 이다.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목적지는 원래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자신의 어두운 영적 상태와 어울리는 하란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목적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신앙인은 이 구절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 줄 땅,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 5절은 이렇게 전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사실, 여기에서 박수와 아멘이 쏟아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에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증거 삼아 이야기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도착해야 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성경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반드시 도착해야 할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너무도 자명하다. 지난 몇 년 간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했던 과거의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을 떠난 육체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물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분명 회개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지키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라.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교회 공동체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가? 교회를 떠나면 되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떠나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교회에서 잘 발생하는 육신의 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과 같은 것에서 떠나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육신의 일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과거의 그 어려웠던 시간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없다. 갈라디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나안 땅’, 즉 성령의 열매는 이렇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5:22-24).

 

우리는 아브라함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령으로 시작한 일,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은혜가 우리 교회, 아브라함 공동체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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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