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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3. 19:35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창세기 12:1-9)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다. 그 중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은 우르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간다. 성경은 데라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인간적인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식을 잃은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을 하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머물러 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하란 땅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데라가 우상을 숭배하던 하란에 그의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두란노 주석 참조)

 

11장의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사래는 임신을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먼저 죽은 데라의 셋째 자식 하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밀가, 이스가)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향년 205세에 하란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먼저 죽은 막내 아들을 그리며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란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 거다.

 

12장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간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떠나.. 가라이다. 이는 너 스스로 가라”, “너 자신을 위해 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표현된다. 떠나야 할 것은 확실한데, 도착해야 할 곳은 불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게 함정이다. 인간의 심리는 확실한 것에 거하고자 한다. 보장된 유익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보장된 유익이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떠나, 불분명한 곳,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의 떠남은 보장된 모든 유익에서 떠나는 것,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1)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

2)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3) 네가 복덩어리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가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생의 아들이라 큰 아버지인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둘째는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정에 조카 롯을 아들 삼기 위함이다. 아마, 이 둘 다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을 아들이 계속 안 생기자 롯을 실제로 자신의 유업 이을 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모든 유익을 버리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는 이익이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많은 자식을 얻어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관련된 약속을 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 이것은 아브라함의 교만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나 건드려봐! 하나님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 말씀은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 보게 된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신다. 위기만 모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복을 내리신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거래(Deal, 또는 Business)가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뻐함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4절과 5절 말씀에 있다. 먼저 5절 말씀을 보면 이렇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일단 떠났다. 하나님은 그가 떠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이 그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났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떠나는 것 조차도 못한다. 죄가 관영한 곳에 머물며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떠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울하게 죽어간 곳,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곳 하란을 마침내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떠난 아브라함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느냐 이다.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목적지는 원래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자신의 어두운 영적 상태와 어울리는 하란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목적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신앙인은 이 구절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 줄 땅,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 5절은 이렇게 전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사실, 여기에서 박수와 아멘이 쏟아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에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증거 삼아 이야기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도착해야 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성경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반드시 도착해야 할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너무도 자명하다. 지난 몇 년 간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했던 과거의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을 떠난 육체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물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분명 회개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지키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라.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교회 공동체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가? 교회를 떠나면 되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떠나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교회에서 잘 발생하는 육신의 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과 같은 것에서 떠나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육신의 일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과거의 그 어려웠던 시간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없다. 갈라디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나안 땅’, 즉 성령의 열매는 이렇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5:22-24).

 

우리는 아브라함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령으로 시작한 일,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은혜가 우리 교회, 아브라함 공동체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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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