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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6. 13:54

소금과 빛과 의

(마태복음 5:13-20)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백미라고 불린다. 지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삶 곳곳에 베어 있어 그 가르침의 놀라움이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들어봐서 낯섦이 덜 할 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례로,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은 에 관한 것이데,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유교사상 아래 있는 동양국가에는 오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 장수하는 것, 2)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하면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물질적 부와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세배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서로 물질적 부와 건강을 빌어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보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명예, 자식, 외모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헬라철학사상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요즘 세상에서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은 자신의 행복 또는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 먹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기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모르는 자는 결코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자는 참된 복,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을 사모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소금, , 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 ,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두 어떤 현실을 가르쳐 주는 메타포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과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또는 성경의 저자는 소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이텐티티(정체성)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소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성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 우선 각각의 말씀을 보자.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출애굽기 30장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성막(지성소, 성소, 바깥뜰) 중 성소에는 분향단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 향을 만들고 그것에소금을 쳐서 성결하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금은 일차적으로 성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 2장은 5개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중 소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소제(Grain Offering)는 곡식을 빻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소제를 드릴 때는 소제물에 다른 첨가물(누룩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한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사용된다. 꿀은 달콤하지만 불에 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누룩은 자기과시, 과장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꿀은 달콤하지만 시험이 오면 악취를 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불에 타면 유향처럼 향기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제는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런데, 소제에는 죄 사함의 의미가 없다. 소제는 다른 제사와 더불어 함께 드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왜 그러냐면, 소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제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소금은 불변성, 방부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실함(변함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른다. 소금 언약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민수기 1819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둘째는 역대하 135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신실함(변함없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빛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이 말씀은 이 단어 때문에 굉장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행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이는 착한 또는 선한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로 번역했지만, 요한복음 10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착한 또는 선한은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 ‘착한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을 말한다. 일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신다. 이게 요즘 계산법으로는 안 맞는 수지타산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멍청한 행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착한 행실이다. ? 한 사람이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보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의 이 된다는 것은 남들(사람들) 보기에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단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타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러한 모습, ‘소금과 빛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잘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외적인 의즉 외형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내적인 의이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그 말씀을 지켰다. 살인만 안 했지,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물론, 살인을 외형적으로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미워 죽겠는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죽였는데, 살인만 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살인만 안 했지, 그 앞에서 또는 안 보는 데서 상대방에 대하여 라가(Raka, 심한 모욕을 주는 욕)’라고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남을 미워하면 죽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증언으로 그들이 이끌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일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는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정욕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참된 복이시고 행복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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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