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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3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2. 2017.02.23 나는 걷는다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한다. 독서를 하되 신학서적이나 신앙서적만 읽지 말고,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도 병행하여 읽는다.

 

2. 다른 설교자의 설교는 가급적 듣지 않는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많이 들으면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설교를 무의식적으로 베끼게 된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독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근본적인 밑거름이다.

 

3.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언론 기사를 주목한다. 특별히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적 사건 사고를 챙겨 본다.

 

4. 교인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당면한 문제, 그들의 고민 등을 잘 메모해 둔다.

 

5. 성서 본문을 택할 때, 사회적 문제, 교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먼저 맞추지 말고, 되도록이면 성서정과에 맞춰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먼저 맞춘다.

 

6. 성서 본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성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닌, 평소 성경을 많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서학 분야와 조직신학 분야의 책을 평소에 많이 읽어 두어야 한다.

 

7. 선택한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을 한다. 성서 본문이 원래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밝혀낸다. (이것을 충분히 하지 않고 설교를 하면 다 사기치는 거다.)

 

8.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져 오는 작업을 한다.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평소에 해 놓은 독서이다.

 

9. 성서의 본문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를 공적인 사회 문제에 적용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사적인 교인들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교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 선을 넘으면, 설교가 아니라 잔소리가 된다.

 

10. 설교 준비는 일주일에 걸쳐서 하되, 최종 설교문 작성을 주일에서 너무 멀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주일 설교문 작성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끝내는 것보다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끝내는 게 더 좋다. 왜냐하면, 최종 정리는 뇌 속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인데, 우리의 뇌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문을 뇌가 기억하고 있어야, 단순히 설교문을 읽는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문에 기초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내 기억에 없는 것은 그만큼 영감과 감동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자신이 내 설교에 영감과 감동이 넘쳐야 그것이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는 법이다.

 

11. 주요 요점을 적은 메모 형식의 설교문을 작성해서 설교하면 안 된다. 설교문은 반드시 완성된 문장 형태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또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전한 형태의 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기가 지금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12. 최종 설교문을 작성했다면, 반드시 두 세 번 읽으며, 색깔 있는 팬으로 첨삭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첨삭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야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

 

13. 설교 초보자라면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한 게 낫다. 그래야 말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하되, 때로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내맡기는 것도 괜찮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말로 때우기식의 설교는 죄이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14. 예배를 마친 후,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여 자기 자신의 설교를 다시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문 작성에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최종 설교문에 표시되어 있는 첨삭 부분을 다시 정리하여 파일에 저장한다.

 

15. 스스로 자신의 설교의 청중이 되어 자신의 설교를 들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피드백을 해 본다. 더 나아가, 배우자에게 피드백을 받아 본다. 배우자의 피드백만큼 좋은 피드백이 없다.

 

16. 설교 준비와 실제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설교 작업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설교를 소비적으로 하면 남는 게 없고 영적 허탈감만 올 뿐이다. 설교 작업을 생산적으로 한다는 것은 설교 작업을 통해서성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압박감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을때우면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설교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실력과 영성을 기르는 실전(實戰)이어야 한다.

 

17. 믿음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예배 때 드려지는 찬양이나 선포되는 설교는 감정을 고양시키는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변화는 사건이 발생해야만 일어난다.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전의 존재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게 문제고 과제다. 과연 우리는 설교를 사건이 되게 하는가?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만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누구보다 성령께 모든 존재를 맡길 줄 아는 깊은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3. 09:04

나는 걷는다

(창세기 5:21-24)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오늘 말씀은 아담의 계보(족보)를 말하는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계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파악하려면 창세기 4장의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얻은 그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죄가 들어온 후, 아담, 즉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해졌는지 알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인정 받기 위해 사람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단한 삶을 살았는데 인정 받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악해진다. 독일의 대 철학자 헤겔은 일찍이 이러한 삶의 모습을 인정투쟁이라고 명명했다. 헤겔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인정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가인은 인정투쟁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아벨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정투쟁이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며 그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있는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자기 긍정의 좋은 심리적 조건으로 본다.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가인은 저주 받고 추방당해 떠돌이(나그네)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형별의 가혹함을 호소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는 표식을 주신다.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다.

 

창세기 416절 이하의 말씀은 가인이 놋 땅에서 꾸린 가정 이야기가 나온다. 가인은 결혼하여 애를 낳는데, 에녹이라 칭하고, 성을 쌓은 후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 부른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에녹과 다른 인물이다. ‘에녹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이다.

 

가인의 족보는 우울한 이야기로 끝난다. 가인의 6대손 라멕의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이 펼쳐진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떠나보낸 후 세번 째 자식을 낳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다. 셋째 아들이어서 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Seth’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임명하다이다. 그리고 은 에노스를 낳는데,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부른다.

 

5장에서 시작되는 아담의 계보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것이 5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계보의 첫 번째 특징이다. 앞서 보았듯이, ‘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씨인데, 아담의 계보는 아담에서 곧바로 으로 건너 뛴다. ‘다른 씨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아담의 계보의 또다른 특징은 일정한 패턴으로 계보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그 패턴을 이루는 동사가 세 개 있다. “낳았다.”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이다. 특히, “죽었더라는 말은 217절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의 계보에서 이 패턴이 깨지는 부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녹의 삶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낳고, 사는 부분까지는 같다. 그러나 죽었다는 부분이 다르다. 에녹에게는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쓰인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명을 말할 때, 에녹과 엘리야를 꼽는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곳은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성경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11:5).

 

이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가? 아니면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만일 호사가들이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겠지만, 우리는 믿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어야 한다. 창세기 기자는 왜 에녹에게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다른 표현을 써서 그의 마지막을 말하고 있는가?

 

아담의 계보 중, 에녹에 이르러 시선을 머물게 되는 표현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다. 우리 말로는 동행이라고 옮겼지만,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본 뜻을 그대로 옮겨, ‘Enoch walked with God’이라고 쓴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구약성경에서 무려 1,562번이나 나온다.

 

할라크는 기본적으로 걷다, 가다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할라크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느냐 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동사이다. 그런데, 특별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아담의 계보가 나오기 전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이다. ‘함께 걷는다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함께 걷다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어린시절(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5학년 2학기 때 양재초등학교가 생겨서 그곳으로 집단 전학을 가서 양재초등학교를 1회로 졸었했다.)를 다녔는데, 그때는 차비로 오락을 하거나 떡볶이나 순대 같은 거 사 먹고 말죽거리에서 우면동 집까지 걸어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집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1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놀다가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수도 없이 걸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거나 시간이 길다고 느끼지 못했다.

 

목적이 같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셨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실 때를 표현하는 말로 할라크를 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신다. 그런데, 창세기 3장과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오시는 하나님을 나가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고, 모두들 자기들이 가고 싶은 데로 가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아담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심지어 숨는다. 가인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그의 6대손 라멕은 아예 대놓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짓만 일삼는다.

 

그러는 중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이것만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아담의 계보이후 나오는 이야기도 모두 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세상이 뿌리 깊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아 때에 가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의인이라고 소개된다.

 

실제로, ‘걷는 행위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고속도로를 한 번 걸어본 적 있는가? 걸어가면 빠르게 지나가며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다. 차 안은 안락하고 편리하지만 걸어서 가는 고속도로는 엄청난 소음 때문에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걸으면서 보는 세상과 무언가를 타고 빠르게 지나며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이 아이들과 함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했던 <나는 걷는다>의 기행문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비행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통해 인생을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책에는 이런 말도 등장한다. “존재 자체가 일종의 행군 아니던가.”

 

위에서 나는 함께 걷는다는 말이 굉장히 시적이고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 내리기 보다는 그냥 각자의 상상력에 맡겨 두는 게 훨씬 풍요로울 거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실제로 너무 걷지 않는다. 운동 삼아 약간 걸을 뿐, 어떠한 것을 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기 위해서 30분이든 1시간이든 걸어서 왔다면, 바로 이 시간 이렇게 예배 드리며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그리고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시라. ‘걷는다는 것이 주는 풍성한 의미 안에 머무시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풍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죽음을 맛 볼 겨를이 없다. 하나님은 분명 에녹처럼 그를 데려가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느 찬양에서처럼 구원 열차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해서, 즉 주님과 걸어서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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