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7.03.31 나는 불을 마저 켠다 1
  2. 2017.03.30 거룩과 영광
  3. 2017.03.23 여호와 닛시
  4. 2017.03.20 홍해를 건너라
  5. 2017.03.13 믿음의 사람 갈렙과 옷니엘
  6. 2017.03.09 아그네스의 기도
  7. 2017.03.05 새의 심장 1
  8. 2017.03.03 사순절 맞이하기 1
  9. 2017.03.03 재의 겸손
시(詩)2017. 3. 31. 11:40

나는 불을 마저 켠다

 

나는 불을 마저 켠다

이것은 낭비도 아니고

지나친 용기도 아니다

이것은

어둠에 대한 극기다

나는 잉여의 불을 삼킨다

어둠보다 두 배는 밝아야

혈관이 범람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킨 불이

살갗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

심장에만 고여 있는 불은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다

그가 만질 수 없는 불은

그저 어둠의 수하일 뿐이다

나는 불을 마저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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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0. 15:46

거룩과 영광

(레위기 10:1-7)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실시한 직업만족도조사에서 목사가 3위를 기록했다.



판사가 1, 도선사가 2위를 차지했다. 3위인 목사에 이어, 대학교총장이 4, 전기감리기술자가 5, 초등학교 교장이 6, 한의사가 7, 8위가 교수, 원자력공학기술자가 9, 그리고 세무사가 10위를 차지했다.

 

평가 항목은 △발전 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 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자녀에게 직업을 권유), △수행직무만족도 였다고 한다. 사실, 이 뉴스를 접하고 걱정부터 든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직업만족도만 보고 목사 되기를 선택하게 될까 봐 서다. ‘직업만족도직업선호도는 다르다. 목사가 직업만족도에서는 수위를 차지했을 지 모르나, 목사는 여전히 선호 직업이 아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이발사 다음에 목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만큼 목사는 직업 선호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목회자들이 있지만, 목사가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볼 수 없다. 왜 다른 지 모르는 목회자는 공부가 부족하거나,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하는 일이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의 제사장과 맞닿아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사장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목사가 되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선호할 대상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하기에 불가능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패러독스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즘 목회자들에게는 설교가 굉장히 중요한 임무로 여겨지는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는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설교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해야만 하는 숙명이 목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목사는 어쩌면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성별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운다. 성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아론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 레위기 9장은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를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9장은 이렇게 끝난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 9:23-24).

 

그런데, 이어지는 10장의 이야기, 우리들이 오늘 함께 읽은 이야기에서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그 중에서 첫째와 둘째인 나답과 아비후가 대제사장 아론의 감독하에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게다가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따라 시내산에 올라갔던 인물들이다( 24). 그런데,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그들의 실수는 이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것 때문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한 것 때문이었다. 성경의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직업만족도 3라서 목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를 죽음에 처하게 한 다른 불은 무엇일까?

 

다른 불에서 다른의 히브리어는 자르이다. 이는 이상한, 다른, 생소한, 낯선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단어의 복수형인 자림이방인으로 번역된다. 영어로는 ‘strange, unauthorized, unholy’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다른 불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불, 출처를 알 수 없는 불, 다른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로부터 온 불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을 그들(나답과 아비후)이 이렇게 다른 불을 가져다 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온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분향단 사건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있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모세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9).

 

이러한 규례가 바로 언급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 데, 나답과 아비후는 회막에 들어갈 때 술 취한 상태였던 것 같다. 여기서 포도주나 독주(포도 외에 다른 것으로 담근 술)를 마신 것 자체가 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술 취한 것이 불러온 결과이다. 그들은 술 취한 것 때문에 자기들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있다. “의사가 통풍을 앓고, 공사 감독은 눈이 하나뿐이고, 변호사가 검사처럼 행동하는 지방에 사는 것은 불행하다.”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하는 일은 불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영광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3).

 

거룩과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존재 방식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거룩하게 경험하고 영광스럽게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지 못해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졌다. ,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과 영광은 구원론의 구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살아 있어라고 느끼게 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돈과 자식과 출세이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돈과 자식과 출세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때,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게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한다.

 

이것은 욥기서의 통찰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섬기는가?”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항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9-11).

 

사탄의 요지는 이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얻고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욥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돈과 자식과 출세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욥에게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모두 걷어 가신다. 그런데, 욥이 그것 때문에 죽었는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종용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죽었는가?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다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21-22).

 

,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서 생각하는 영광, 생명을 얻기 위하여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면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말씀에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등장한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 그들의 가족들, 아버지 아론과 그들의 형제인 엘르아살과 이다말, 그리고 그들의 작은 아버지인 모세가 그들의 죽음을 직면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하여 장례를 치르거나 가슴 아파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6).

 

리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7)”라고 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라는 뜻과 같다. 무엇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말씀이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토록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1:45).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기 위하여,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직업만족도 3이기 때문에 선택해야 할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될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은혜,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기꺼이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선택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니, 부디, 젊은이들은 세상이 말하는 직업만족도에 혹하여 목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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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23. 09:13

여호와 닛시

(승리는 어떻게 오는가?)

(출애굽기 17:8-16)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the Lord is my banner)’이라는 뜻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긴 후, 모세가 제단을 세우는데,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세는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 전투는 르비딤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는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문제로 모세와 크게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3).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반석을 치고, 반석에서는 물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르비딤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시험, 다툼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며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툼을 일으켰다. 그냥 대충 봐도 별로 은혜롭지 못한 상황이다. 계속되는 시험과 다툼은 결국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시험과 다툼을 일삼은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되고, 가나안 땅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는다.

 

물이 없던 르비딤에 물이 생겼다. 사막의 물은 금보다 귀한 것이라 주변에서 이것을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다. 오늘 말씀 8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이 쳐들어 왔다. 당연히, 물이 나는 르비딤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전쟁 방식이 흥미롭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 명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겠다고 말한다. 매우 독특한 전쟁 방식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선발하여 아말렉과의 전투에 임하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전쟁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산 위에 올라 전쟁을 관망하며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기도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판도가 모세의 손이 들려 있는지 내려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

 

그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좋은 방책을 낸다. 모세가 계속하여 팔을 들고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자신들이 각각 한쪽 팔을 붙잡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붙들어 준다. 그리하여 결국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무찌른다.

 

여호와 닛시승리를 상징한다. 전쟁터에서 깃발은 지휘관이 그곳에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깃발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한,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 그러나, 깃발이 쓰러지면 지휘관이 죽었거나 적에게 잡힌 줄로 알고 싸움을 포기하게 된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는 것을 전쟁터에 나간 이스라엘 군대에게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지휘관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상수이다. 이 상수와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변수가 있다. 그 변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 승리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논어 이인편 15장에 다음과 같은 공자와 증삼의 대화가 나온다.


子曰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子出.

자왈삼호! 오도일이관지.” 증자왈.” 자출.

 

門人問曰何謂也?” 曾子曰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문인문왈하위야?” 증자왈부자지도, 충서이이의.”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삼),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

증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신 겁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성심성의를 다하는 마음)과 서()(남을 배려하는 마음)일 뿐이구나!”

(논어,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87)

 

오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는 승리의 비결은 논어에서 나오는 충과 서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종합해 보면, 승리의 비결은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2) 성심성의를 다하는 마음, 3)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이 중에서 1번은 상수이고, 2번과 3번은 변수이다. 1번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상수이고, 2번과 3번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 변수이다.

 

맛사 또는 므리바 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광야의 이스라엘은 이 부족했다.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성심성의 다해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 시험했고,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드는 행위를 통해서 전쟁에 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을 보이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여호와의 깃발이 높이 올려 있는 동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상수이다. 이 상수를 성심성의를 다해믿는 것이 이다. 우리에게는 이 있는가? 그야말로 충심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성심성의를 다해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목에도 걸고, 귀에도 걸고, 집에도 걸고, 차에도 걸고 다니는 이유는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팡이이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이상,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을 다해, ‘성심성의를 다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승리를 위해 중요한 변수는 ()’이다. 이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배려했다. 나이 든 모세가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한 창 젊은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우는 게 맞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배려한다. 여호수아를 혼자 전장에 보내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전쟁터가 잘 보이는 산에 올라 그것을 높이 들고 기도하며 여호수아와 함께 했다.

 

아론과 훌은 모세를 배려했다. 모세가 아론과 훌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옆에서 딴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 곁에서 모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늙은 모세의 손이 얼마나 오랫동안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아론과 훌은 지혜를 발휘한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계속 높이 들려 있게끔 하기 위하여 그들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모세의 손을 양쪽에서 붙든다.

 

사실, 우리가 ()’까지는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까지는 잘 못한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삶을 돌보는 데는 어려워하고 힘들어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삶을 돌아보자. 삶의 여러 가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들은 언제나 말씀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승리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그 세 가지 중, 하나는 상수이고, 다른 두 개는 변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상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수도 우리가 충으로, ‘성심성의를 다해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믿지 않으면 입에서 불평과 불만만 나오고, 결국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인해 오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수가 상수되게 하는 것은 결국 이다. 우리가 성심성의를 다해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못하기 때문에 신경을 더 써야 하는 것이 바로 ()’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도 자주 간과해 버리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 주어야 한다. 특별히 공동체(가정 공동체, 교회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주지 못하면 세워져 가기 힘들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1)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성심성의를 다해 믿읍시다.

3)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 줍시다.

4)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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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20. 02:05

홍해를 건너라

(출애굽기 14:10-25)

 

Perhaps Love

(John Denver)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 a shelter from the storm.

아마도 사랑은 쉼터와 같은 거에요. 폭풍으로부터 지켜주는 은신처 같은 것.

 

It exists to give you comfort. It is there to keep you warm.

그것은 당신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존재해요. 당신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있는 거죠.

 

And in those times of trouble when you are most alone,

그리고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그 힘든 시간들 속에서,

 

the memory of love will bring you home.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집으로 데려올거에요(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

 

Perhaps love is like a window, perhaps an open door.

아마도 사랑은 창문과 같아요, 아마도 열린 문과도 같죠.

 

It invites you to come closer. It wants to show you more.

당신을 더 가까이 오도록 초대해요. 당신에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길 원하죠.

 

And even if you lose yourself and don't know what to do,

그리고 당신이 헤매고 무엇을 할지 모른다고 할 지라도,

 

the memory of love will see you through.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도와줄거에요.

(어느 웹사이트에서 퍼옴)


* 'Perhaps Love'를 부른 존 덴버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관광명소 '몬터레이(Monterey)'에서 경비행기를 타다가 추락해서 죽었다. 예전 같으면 그가 죽은 장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으나, 이곳으로 이사오고 나니 그의 죽음이 특별해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살면서 집(home, 고향)을 잃었고, 자기 자신을 잃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고단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히스테리가 많고, 울부짖음이 많다. 그들의 애굽의 삶은 참으로 어려웠다.

 

사람은 충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고단해지고, 포악해진다. 인간은 충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악에 노출될 위험성이 매우 커진다. 섬머타임에 대한 연구 중에, 한 시간 잠을 덜 잔 것 때문에 판사들이나 의사들이 판결의 형량을 더 구형하거나 수술할 때 실수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연구가 있다. 충분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한 일에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의 연구 결과도 있다. 삶에 너무 긴장이 없으면 인간은 악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명언도 있다. “한가한 머리를 악마의 일터”. 적당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한다. 실제로, 바닷가에서 잡은 고기를 도시로 옮길 때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바다고기의 천적을 수조에 함께 집어 넣고 올 때 생선들이 최고의 싱싱함을 유지한다는 말도 있다.

 

인간은 사랑(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인간생명)는 살면서 절대자, 하나님, 절대 사랑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의 경험이 평생 떠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경험, 홍해를 건넌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험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애굽에서 살면서 외로웠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통해, 모세를 따라 나서긴 했는데, 뒤에서 애굽 군대가 따라 오자 이스라엘은 두려워 떤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원망한다.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

 

어떻게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나,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이것은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또는 믿음이 약해지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이야기이다.

 

우리는 안식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일까? 십계명 중에, 4계명에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안식이 도대체 무엇인가?

 

안식이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생명에게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 하나님의 품에 안 기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 안식이란 믿음의 회복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430년 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안식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부족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졌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약해졌다. 믿음이 약해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전형적인 말을 오늘 이스라엘은 모세와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안식이 부족했던 이스라엘, 하나님과 사랑을 깊이 나누지 못한 이스라엘,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우선,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귀에 쟁쟁히 들리는 선포가 되기를 바란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건,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반복하여 이런 말을 한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 14).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가 제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기도신학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깨달은 기도신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 기도는 가만히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에 부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 하기를 그치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는 가만히 있으려고 기도한다.”

 

생각해 보라.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온다.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쫓아오는 군대와 맞서 싸웠다면 그들은 홍해 앞에서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는 것을 원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길을 내어 주신다. 이스라엘은 막혀 있는 홍해 바다를 보면서 두려워 떨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홍해를 가르셨다.

 

홍해를 가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가르신 홍해를 건너면 되는 것이다. “When you are most alone. The memory of love will bring you home. And even if you lose yourself. And don't know what to. The memory of love will see you through” 힘들고 외로울 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기억하시라. 자기 자신을 잃은 것 같고,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시라.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홍해를 건너시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가만히 계시라. 충분한 안식을 취하시라. ,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누시라. 믿음에 믿음을 더하시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홍해를 건너시라. 여러분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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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13. 15:41

믿음의 사람 갈렙과 옷니엘

(여호수아 15:13-19)

 

1. 오늘 말씀은 갈렙의 헤브론 정복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갈렙의 이야기는 크게 세군 데 나온다.


1) 가데스 바네아 (민수기 14) –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선출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미리 가서 정탐하는 임무를 행한 사건

 

2) 정복전쟁 1 ( 14) – 땅을 분배할 때 여호수아에게 가데스 바네아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해 달라는 요청 –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2) –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고, 다른 이들이 차지하기 힘든 땅, 아낙 자손이 자치하고 있던 곳을 자신이 정복해서 취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3) 그리고 오늘 말씀이다. ( 15)

 

2. 갈렙은 헤브론의 세 장수 (세새, 아히만, 달래)를 무찌르고 드빌을 정복하려고 한다. 드빌은 헤브론의 남쪽에 있던 성읍이었다. 갈렙은 이미 나이가 85세가 된 노익장이었다. 갈렙은 헤브론을 자치하느라 이미 기력을 다 소진한 듯싶다. 그래서 갈렙은 자기 대신에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공언한다.

 

3. 이와 비슷한 대표적인 예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서 볼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주변의 여러 나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는데, 그 중에서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가장 심하게 괴롭혔다. 그들의 괴롭힘이 오죽 심했으면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우리도 블레셋처럼(또는 다른 이방 나라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탄원했겠는가. 그래서 뽑힌 왕이 사울이었다. , 사울 왕은 블레셋의 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고자 뽑힌 왕이었다.

 

4. 그런데 그 임무가 순탄치 않았다. 특별히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거인 장수 골리앗의 출현으로 인해 온 이스라엘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방을 내고,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세 가지를 약속한다.


1) 많은 재물을 주겠다

2) 사위를 삼겠다

3)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

 

4. 이 사건을 통해 혜성처럼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윗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형들에게 아버지(이세)의 심부름을 갔다가 이스라엘을 능멸하는 골리앗을 보고 물매 돌 하나로 그를 물리쳐 순식간에 국가적 영웅이 된 인물이다.

 

5. 갈렙의 입장에서 다윗과 같이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해준 인물이 오늘 말씀에 등장한다. 그는 갈렙의 조카(동생의 아들) 옷니엘이었다. 옷니엘은 갈렙을 대신하여 드빌을 정복한다. 그것으로 헤브론 정복을 마무리 짓게 된다.

 

6. 오늘 말씀 15-19절은 컴퓨터의 Copy & Paste 기능을 사용하여 그렇게 한 듯이, 사사기 1:11-15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여호수아의 말씀은 사사기와 함께 보아야 하고, 사사기는 룻기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고,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혼란한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돌보시고 이끌어 가시는지 알 수 있다.

 

7.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갈렙과 사사기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옷니엘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갈렙도 믿음의 사람이고, 옷니엘도 믿음의 사람인데,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많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우리 자신이 얼마큼이나 믿음의 사람인가,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8.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1) 갈렙: 민수기 14장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갈렙은 정탐꾼으로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2) 옷니엘: 사사기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옷니엘은 사사로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3:9)

 

3) 우리: 부르심을 받았는가? ‘소명은 그리스도인(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첫번째 단추와 같다. 소명의 확신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사무엘은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끄는지, 우리는 사무엘상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다.

 

9. 두번째,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1) 갈렙: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 정탐의 임무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수행하였다. 여호수아서 14장에서 갈렙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했는지 이렇게 간증한다.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보고하였고”(14:7),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다”(14:8). 그리고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 참여한다.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2) 옷니엘: 사사기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옷니엘을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 3:10). 옷니엘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순종하여 나가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싸워 이긴다.

 

3) 우리: 주님이 부르실 때, ‘아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0. 셋째, 그들은 문제 해결자였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troublemaker)가 아니었다.)


1) 갈렙: 여호수아서 14장에서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는데, 그것은 내 땅 내놔!’라는 탐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정복하기 힘들어 하는, 즉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었다.

 

2) 옷니엘: 옷니엘은 갈렙이 힘에 부쳐 해결하기 힘든 일, 드빌을 정복하는 일을 해결했다. 사사기에 보면, 옷니엘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이스라엘이 해결하기 힘든 일,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냈다.

 

3)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문제(problem)’를 해결하라고 부르신다. 그 문제가 구원(하나님의 은혜)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4) 밀알봉사: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problem)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장애를 고쳐보려고 의학기술의 발달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태도와 시각이다. 어떠한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정말 장애인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자신과 다르다고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보통 장애인 사역을 하는 분들의 사역은 그들을 돌보는 일도 하지만, 무엇보다 보통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는 사역이 훨씬 더 중요하고 힘든 사역이다.

 

5) 한국의 정치 상황을 통한 묵상 대통령 탄핵: 대통령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가, 문제를 만드는 사람인가?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 이유는 그 사람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잘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 판결문을 보면, 헌법을 수호하며 사회의 문제(정경유착, 사익취득, 빈부격차)를 바로 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대통령이 오히려 헌법을 어기며(지킬 의지 없이)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6) 우리도 인생을 살며, 똑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현재 탄핵된 대통령에게 가장 자주, 크게 지적되었던 문제가 불통이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을 자주 깨야 한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인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공동체(가정, 교회)를 힘들게 하고, 악이 고개를 들게 하는 문제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7)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늘 걱정한다. 내가 목회를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복음은 제대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 설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공부를 손에서 놓치 못한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기 성찰이고 현자와의 대화이다.

 

8)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Stay hungry”.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다. 늘 부족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주변과의 소통을 통해 배고픈(부족한) 자기 자신을 채워 나가라는 뜻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고, 꾸짖어 주시라.)

 

9)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늘 겸손함을 잃지 말고, 소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11. 넷째,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


1) 갈렙: 그는 장수의 복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땅을 받았다.

 

2) 옷니엘: 그는 약속대로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유다의 남방 네겝 땅과 그곳에 있는 윗샘물과 아랫샘물을 선물로 받았다.

 

3) 우리: 우리는 어떠한 복을 받았는가? 받은 복을 세어보라.

 

12. 마지막 다섯 번째로, 그들은 복을 베푸는 자였다. 그들은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베풀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베풀 복이 있었다. ‘복 있는 사람이란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베풀 복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1) 갈렙: 딸 악사가 옷니엘에게 시집가면서 아빠인 갈렙에게 요청한다. “복을 주소서!” 복이란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갈렙은 자신의 딸과 사위 옷니엘에게 밭과 샘물을 주어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2) 옷니엘: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 나라를 물리치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옷니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3) 우리: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LA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고사성어와 신앙이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LA에서 유명하다.) 내가 참 좋아하는 한자성어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뜻이다. 복을 베푸는 자는 결코 외롭지 않다.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12. 우리는 믿음의 사람인가?

1) 하나님께 부르심(선택)을 받았는가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는가

3)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

4) 복을 받았는가

5) 복을 베풀고 있는가

 

13. 날마다 묵상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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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9. 06:51

아그네스의 기도

(벧전 5:7 / 4:6-7)

 

지난 수요일,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다. 재의 수요일 예배를 통해 우리는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순절 동안 세 가지에 힘쓰기로 했다. 그것은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사랑의 일)이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왜 이 세 가지 일에 힘써야 하는가? 오늘은 우리가 힘써야 할 세 가지 일 중, 기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제목을 아그네스의 기도라고 붙인 것은 미학적인 의미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기도란 무엇인가?’이다.

 

아그네스의 기도라는 제목을 듣고 기도하는 아그네스라는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어차피 인생은 바람인 걸 / 누구나 날리는 꽃잎인 걸이 노래의 가사도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과 의미적인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만큼 누구나 인간은 인생을 덧없음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김세화이다. 또다른 곡, ‘야생화’ – ‘난 한적한 들에 핀 꽃,…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만 나 웃으며 피었다네, 음율의 쇼팽의 야상곡 같다)

 

어느 기사에서 매력적인 사람이 갖춘 몇 가지 요소들을 본 적이 있다. 6가지 정도를 기억하는데, ‘(내면의 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 따뜻함, 너그러움, 다정함, 그리고 침착함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매력적인 신앙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매력적인 신앙인은 어떠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을까? 단연 기도의 능력을 갖춘 자가 매력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최근 미국에서 ‘War Room’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종교 영화임에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관람한 관계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영화이다.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문화의 밤이라고, 함께 모여 영화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제시장볼 때 모두 눈물을 훔치며 본 기억이 있다. ‘War Room’을 볼 때도 많이 은혜 받고 도전 받았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큰 점수를 못 받은 영화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많은 영감과 도전을 준 영화이다.

 

최근 작성된 시간 사용에 대한 통계를 보니,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쓰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은 잠을 보통 8시간 잔다고 한다. 밥을 2시간 먹고, 노동을 4-5시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가시간은 5시간이고, 남자는 가사노동을 39분하고, 여자는 3시간 25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독서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인은 보통 하루에 얼마큼 독서를 하는지 아는가? 평균 6분이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은 가정 당 일년 평균 1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나라는 일년에 17 패러그래프(문단) 읽는 나라도 있다. 여러분은?)

 

나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얼마나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의 양도 중요한 것 같다. 어떤 통계를 보니, 미국 목회자들은 하루 평균 20분 정도 기도하는데 반해, 한국목회자들은 하루 평균 1시간 정도 기도를 한다. 그리고 2012년 한국 기독교인의 평균 기도시간은 24분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것은 통계이기 때문에,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더 많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애제자 셋을 데리시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기도하실 때에 몇 시간을 기도하신 줄 아는가? 그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에 보면 세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14:37-38).


예수님은 이렇게 세 번 제자들에게 오신다. 그것을 계산해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시간 기도하신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 기도 시간은 1시간이신 것 같다. 물론 매일 3시간 내지 1시간씩 기도하면 좋지만, 적어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 정도 기도하는 것은 신앙의 양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무조건 기도 시간을 채우려고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의미를 모르면 지루한 법이다.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가 중요한 것인지, 알고 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구절을 모두 찾은 뒤, 그 구절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를 간추려 보면,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도는 믿음이다. 이것은 매력적인 사람의 요소 중 내면의 힘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4). 이 말씀에 보면, ‘믿으라고 한다. 믿음은 내면의 힘이다. 어떠한 신념도 없는 사람만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일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일 뿐이다.

 

둘째, 기도는 간구이다. 기도는 겸손한 마음이다.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7-8). 주께서 말씀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실존의 문제이다. 우리의 필요를,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길 주님께 왜 간구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에게 구하면 구걸이지만, 아버지께 구하면 사랑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인가, 아버지인가?

 

셋째, 기도는 감사이다. 기도는 따뜻한 마음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기도는 항상 기뻐하는 마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내 삶이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기도생활을 보면 안다. 한탄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매력적이듯이, 기쁨과 감사 가운데 기도하는 자가 매력적인 신앙인이다.

 

넷째, 기도는 용서이다. 기도는 너그러운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어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11:25).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2).

 

기도 가운데 일어나는 용서의 역사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용서에는 두 가지 용서가 있다. ‘구하는 용서와 해주는 용서가 그것이다. 우리는 대개 기도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주님,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께만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며 바로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한다.

 

또한, 기도하며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준다. 대개 사람들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자기가 한 잘못은 용서해 주기를 바라면서, 남이 자기에게 잘못한 일은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 저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죽일 놈을 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주님, 저에게 바쁜 짓을 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보듯이, 주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우리가 하기 더 어려운 용서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했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다섯째, 기도는 책임이다. 기도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삼상 12:23). 이것은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의 직위에서 물러나면서(즉 은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성경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사무엘만큼 책임감이 투철했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는 기도한다. 책임감 있는 신앙인은 사명(교회를 위해서 세상을 향해서)을 위해서 기도한다. 책임감 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자기 인생에 책임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는 책임감의 지표다.

 

나는 목회자 자녀이고 나 자신이 목회자라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가난한 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신앙의 유산 밖에는 없지만, 인생이 힘들 때 힘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던 부모님의 책임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빨간 밍크 담요 깔고 밤새껏 기도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제 엄마는 너무 늙으셔서 젊으실 때 하던 대로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시지만, 아직 비교적 젊으신 장모님은 요즘도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무슨 일 있을 때는 금식기도원 가서 몇 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신다.

 

기도는 종교행사나 자기 탐욕의 수단이 아니다. 기도를 종교행사나 자기 탐욕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 없다. 그런 자가 기도하면 뭐하는가, 기도하고 나서도 탐욕의 눈길이 치솟는데.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삶 속에서 매순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삶을 맡기는 믿음이고, 주님만 바라보는 순결이고, 주 안에서 누리는 감사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러한 충고를 한 적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이 시간,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십시오!”

 

초대교회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의 기록에 보면, ‘아그네스라 불리는 처녀가 있었다. 291,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그 시대를 살던 아름다운 아그네스는 많은 남성들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하나님께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했다. 아그네스를 사모하던 많은 남성들 중, 로마제독 셈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에게 사랑을 거절 당하자 앙갚음을 하기 위해 아그네스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폭로하고 그를 처형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처녀를 처형하면 안 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그네스를 발가벗겨 매음굴로 보내 버린다. 아그네스는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머리카락이 자라서 벗겨진 몸을 가려주고, 그녀에게 손대려고 하는 자의 눈이 머는 일이 발생했다. 그 후, 그녀를 화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장작에 불이 붙지 않고, 불 속에 던졌으나 불꽃이 양쪽으로 갈라져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목이 베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기도에 대하여 이러한 모토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자.”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든 일이 있거든, 모두 주님께 가지고 와서, 그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라. 그리고 사람 앞에서는 웃으라. 반대로 하면 안 된다. 사람 앞에서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든 일을 토로하면 원수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면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무엇보다 기도의 능력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7).

 

 

기도

주님, 이 시간 결단합니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서,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기도하는 신실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겠나이다. 기도는 믿음이고, 간구이고, 감사이고, 용서이고, 책임인 줄로 믿사오니,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해 주옵소서.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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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7. 3. 5. 15:37

새의 심장

 

섞었다고

잘라내야 한다고

도끼를 갖다 댄 가엾은 나무에

둥지를 튼

절박한 새

 

봄이 오면

나무 등짝 한 가운데 난

도끼 자국에서

푸른 싹 돋아날 거라는

직감

탄식

 

오오 하늘이여

생명을 우습게 본 자

생명을 내팽개친 자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게 하소서

 

바람을 일으킬까봐

숨죽인 심장

생명의 자맥질 멈출 수 없어

복종의 이름표 달고

뛴다

타 들어간다

 

아아 만날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른 새벽

샛별과 반달이 입맞춤 하는 날

절박한 새의 심장은

동 터 오는 허공 속에서

급히 오는 새날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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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순절 맞이하기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 쓰는 사순절을 보내고 싶다. 그러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 02:34

재의 겸손

(창세기 3:19, 시편 49:11)

 

우리의 생명은 기대는 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기대고 있는 것이 맑으면 우리도 맑고, 흐리면 우리도 흐리게 된다. 직장인은 직장에 기대고 있는데, 직장이 잘 되면 좋은데, 직장이 잘 안 되면 힘들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고 있는데, 자식이 잘 되면 좋고, 자식이 힘들면 참 마음이 안 좋다. 자식들은 부모가 잘 되면 좋은데, 힘들면 덩달아 힘들다. 한마디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어딘가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오늘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들어서게 되는 사순절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깨닫는 절기이다.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다음의 세 가지에 힘쓰면 좋겠다.

 

첫째로, 기도에 힘쓰면 좋겠다. 기도야 말로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어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겸손의 자세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기도하지 않아도,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 밥 먹어도 소화 잘 된다. 그것은 기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만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 목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노력과 상관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일차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기도를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

 

기도는 철저하게 겸손의 표현이어야 한다. 한 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는 결코 교만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은 어떠한 능력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겸손하다는 것의 표현인 것이다. 기도는 능력의 깊이가 될 수 없다.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신앙의 깊이인데, 신앙의 깊이는 곧 겸손의 깊이이다.

 

둘째로, 절제에 힘쓰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니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5-6). 고린도전서 9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절제를 생각하면 단순히 도덕적인 일을 떠올리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절제하기를, 그저 술담배를 덜하고, 인터넷을 덜하고, 드라마 같은 거 안 보고, 밥 먹는 거 안 하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이것은 절제를 매우 오해하고,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절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절제는 매우 적극적인 일이다. 절제는 생명에 대한 적극적인 갈망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처럼, 절제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육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버리고,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하는 영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빌립보서 4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참 좋아한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여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4:8). 영어로 보면 더 쉽다. “brothers and sist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절제는 뭔가를 안 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이처럼 참된 생명, 참된 진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뭔가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순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힘써야 할 선한 일(사랑의 행위)’로 이어진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은혜로 임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도덕적 인간이 구원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다음의 은혜 갚은 까치처럼: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산을 넘는 중에 유독 까치소리가 시끄러워 가보니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 까치들을 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비는 가지고 있던 활로 구렁이를 쏴 죽여 버린다. 이후 날이 저물지만 주막 하나 없는 첩첩 산중에서 어찌 밤을 보낼까 고민했는데 불빛을 발견하고 가니 왠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젊은 아낙네가 지키고 있는 오두막에 선비는 하루 묵기로 한다.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해서 아낙이 차려준 밥을 먹고 선비는 잠에 든다. 근데 뭔가가 몸을 조이는게 아닌가? 눈을 뜨니 낮에 죽인 구렁이와 같은 거대한 구렁이가 자신을 칭칭 감고 있는데, ‘어찌 이러냐고 묻자 구렁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낮에 쏴 죽인 구렁이는 나의 서방님이다! 나는 너를 죽여 서방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꼼짝 없이 죽게 된 선비가 살려줄 것을 간청하자 구렁이는 날이 새기 전, 이 절의 종루의 종이 3번 울린다면 네놈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점점 날은 밝아 오는데 종이 울릴 기미는 없고, 선비가 이젠 끝이라고 생각한 그때 종이 크게 올린다. 잠시 후 또 다시 크게 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종이 울린다. 약속은 약속이니 구렁이는 선비를 풀어주고 사라진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선비는 감사하며 종루로 올라가본다.

 

그런데, 종루 바닥에는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머리가 깨친 채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으며 종에는 까치들의 피가 흥건했는데 이는 선비가 구해준 까치 새끼의 부모가 동료들을 동원해 있는 힘껏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소리를 낸 것이었다. 선비는 까치들을 고이 묻어주고 다시 한양길에 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편의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산다.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 이 땅 위에서 썩어지고 영원하지 못할 것을 소유하느라 몸과 마음을 쓴 들, 그것이 무슨 위로와 유익이 되겠는가. 어차피 티끌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운명이니, 차라리 흙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 두는 것이 위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흙과 친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해 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아,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이, 재와 같이, 흙과 같이 겸손하여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쓴다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순절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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