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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03 사순절 맞이하기 1
  2. 2017.03.03 재의 겸손

사순절 맞이하기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 쓰는 사순절을 보내고 싶다. 그러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 02:34

재의 겸손

(창세기 3:19, 시편 49:11)

 

우리의 생명은 기대는 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기대고 있는 것이 맑으면 우리도 맑고, 흐리면 우리도 흐리게 된다. 직장인은 직장에 기대고 있는데, 직장이 잘 되면 좋은데, 직장이 잘 안 되면 힘들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고 있는데, 자식이 잘 되면 좋고, 자식이 힘들면 참 마음이 안 좋다. 자식들은 부모가 잘 되면 좋은데, 힘들면 덩달아 힘들다. 한마디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어딘가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오늘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들어서게 되는 사순절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깨닫는 절기이다.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다음의 세 가지에 힘쓰면 좋겠다.

 

첫째로, 기도에 힘쓰면 좋겠다. 기도야 말로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어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겸손의 자세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기도하지 않아도,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 밥 먹어도 소화 잘 된다. 그것은 기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만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 목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노력과 상관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일차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기도를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

 

기도는 철저하게 겸손의 표현이어야 한다. 한 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는 결코 교만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은 어떠한 능력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겸손하다는 것의 표현인 것이다. 기도는 능력의 깊이가 될 수 없다.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신앙의 깊이인데, 신앙의 깊이는 곧 겸손의 깊이이다.

 

둘째로, 절제에 힘쓰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니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5-6). 고린도전서 9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절제를 생각하면 단순히 도덕적인 일을 떠올리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절제하기를, 그저 술담배를 덜하고, 인터넷을 덜하고, 드라마 같은 거 안 보고, 밥 먹는 거 안 하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이것은 절제를 매우 오해하고,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절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절제는 매우 적극적인 일이다. 절제는 생명에 대한 적극적인 갈망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처럼, 절제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육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버리고,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하는 영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빌립보서 4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참 좋아한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여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4:8). 영어로 보면 더 쉽다. “brothers and sist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절제는 뭔가를 안 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이처럼 참된 생명, 참된 진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뭔가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순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힘써야 할 선한 일(사랑의 행위)’로 이어진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은혜로 임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도덕적 인간이 구원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다음의 은혜 갚은 까치처럼: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산을 넘는 중에 유독 까치소리가 시끄러워 가보니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 까치들을 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비는 가지고 있던 활로 구렁이를 쏴 죽여 버린다. 이후 날이 저물지만 주막 하나 없는 첩첩 산중에서 어찌 밤을 보낼까 고민했는데 불빛을 발견하고 가니 왠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젊은 아낙네가 지키고 있는 오두막에 선비는 하루 묵기로 한다.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해서 아낙이 차려준 밥을 먹고 선비는 잠에 든다. 근데 뭔가가 몸을 조이는게 아닌가? 눈을 뜨니 낮에 죽인 구렁이와 같은 거대한 구렁이가 자신을 칭칭 감고 있는데, ‘어찌 이러냐고 묻자 구렁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낮에 쏴 죽인 구렁이는 나의 서방님이다! 나는 너를 죽여 서방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꼼짝 없이 죽게 된 선비가 살려줄 것을 간청하자 구렁이는 날이 새기 전, 이 절의 종루의 종이 3번 울린다면 네놈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점점 날은 밝아 오는데 종이 울릴 기미는 없고, 선비가 이젠 끝이라고 생각한 그때 종이 크게 올린다. 잠시 후 또 다시 크게 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종이 울린다. 약속은 약속이니 구렁이는 선비를 풀어주고 사라진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선비는 감사하며 종루로 올라가본다.

 

그런데, 종루 바닥에는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머리가 깨친 채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으며 종에는 까치들의 피가 흥건했는데 이는 선비가 구해준 까치 새끼의 부모가 동료들을 동원해 있는 힘껏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소리를 낸 것이었다. 선비는 까치들을 고이 묻어주고 다시 한양길에 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편의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산다.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 이 땅 위에서 썩어지고 영원하지 못할 것을 소유하느라 몸과 마음을 쓴 들, 그것이 무슨 위로와 유익이 되겠는가. 어차피 티끌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운명이니, 차라리 흙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 두는 것이 위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흙과 친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해 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아,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이, 재와 같이, 흙과 같이 겸손하여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쓴다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순절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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