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4'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4.04 무덤을 나온 나사로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17.04.04 부활과 생명과 나사로
기도문2017. 4. 4. 04:44

무덤을 나온 나사로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 11:1-44) 


주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나사로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죽음을 박차고 나온 나사로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음에 머물러 있는 나사로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의 주님,

복음을 들은 우리들,

더 이상 이 세상이 주는 죽음의 요인 스트레스

머물지 말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의 복음의 들은 우리들,

성령의 생기를 입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돌아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아픔인지 분별하여

허락된 십자가를 지고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 줄 아는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4. 04:38

부활과 생명과 나사로

(요한복음 11:17-44)

 

예전에 ‘YMCA 야구단이라는 영화를 재미 있게 본 기억이 난다. 김혜수와 송강호가 주연을 했던 영화인데, 구한말,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영화이다. (거기에는 지금 대스타가 된, 황정민과 김주혁도 나온다.)

 

기록을 보면, 한국에 YMCA(Young Men Christian Association)가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시대인 1903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고, 1905년 미국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서 YMCA를 통해 한국에 야구가 소개되었다.

(질레트 (Philip Gillett,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는 소위 스포츠 선교를 했던 분이다. 야구 외에도, 1907년에는 한국에 농구도 소개했다. 그리고 스케이트화와 복싱글러브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몇 년 후, 한국에서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일본정부에 그것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다 추방당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미국으로 돌아가 1938, 향년 66세의 나이로 소천한다.)

 

‘YMCA 야구단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당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인들(한국 사람들)의 생활을 재미나게 그리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것이 두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며 하던 양반의 말이다. “저렇게 땀 흘리는 것은 아랫것들이나 시키지…” 다른 하나는 야구할 때 양반과 상놈이 함께 팀을 구성해서 시합을 하는데, 1루수에는 양반이 있었고 유격수에는 상놈이 있었는데, 유격수인 상놈이 1루수인 양반을 향해 던진 공을 1루수인 양반이 이런 말을 하면서 안 받는 것이었다. “상놈이 던진 공을 양반이 어떻게 받나…” 그리고, 양반이 안타를 치고, ‘허허, 양반이 어떻게 뛰나하면서 뒷짐지고 걸어가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무엇인가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의 반응은 이처럼 낯설고 신기한 법이다. 위에서 언급한 야구와 같이, 복음을 처음 접한 한국인들(조선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 선교사들은 대개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 선교를 갔는데, 1901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의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한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가 남긴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도시에는 오수 처리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물들이 천천히 흘러서 초록 색깔의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운 흰 옷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전쟁으로 황폐했을 뿐 아니라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왕들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부패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건장한 한국 사람들이 국가적인 불행을 슬퍼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가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게 되었다.” (The Korean Pentecost, pp. 16,24-25).

 

윌리엄 블래어 선교사의 말처럼,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구한말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생각을 했겠는가? 아마도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생전에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나사로 이야기를 접했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는가? 예수를 믿으면 천지가 개벽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마음 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지 100년이 훨씬 지났고, 복음을 전해준 나라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우리가 읽은 나사로 이야기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아마도, 100 여년 전 구한말 한국인들에게 다가왔던 믿음과 희망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냐?)’라고 의심부터 할 것이고, 무엇보다,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사로가 살아나든 말든, 돈다발이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나사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는 11 1절의 말씀은 이렇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과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일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베다니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베다니교회를 떠올린다. ‘베다니’, 한국말 어감으로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에게 베다니는 그렇게 좋은 감정을 불러 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베다니의 뜻은 무화과 의 집이라는 뜻과, ‘슬픔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에 있었던, 요즘 말로 하면 위성도시였다. 한국의 성남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요즘에는 성남이 엄청 발전했고, 성남 중에는 분당이라는 곳이 생겨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 되었지만, 옛날에 성남은 서울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어서 살던 곳이었다. ‘베다니는 딱 그런 곳이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문둥병자 시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고,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문둥병자 시몬의 이야기의 배경도 베다니이다. , 베다니는 도시에서 밀려난 병자들이 살던 소외된 곳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곳은 죽음이 가득했던 곳이다.

 

목숨이 끊기는 것만 죽음이 아니다. 목숨이 끊기는 것은 궁극적인 죽음이지만, 차라리 목숨이 끊기면 고통이 없지만, 살아 있는 생명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죽음의 상태가 즐비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베다니에 살던 사람들이 느꼈을 사회적 소외의 고통이다. ,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프면, 아픈 것 자체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아픈 것 때문에 주변에서 받는 눈총이 더 아픈 법이다. 주변의 아픈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최선을 다해 돌봐주라.)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병자들이 사회적 죽음을 경험한 이유’, 그리고 그렇게 분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은 곧 죄라는 개념이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병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이었다. 병은 죄 때문에 온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고,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고 병이 낫는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된 그가 기뻐서 만든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어두운 밤에 깜깜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자주 들르셨다는 것,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다는 것, 특별히 베다니에 사는 병자였고 결국 그 병 때문에 죽게 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4)이 지나 다시 살게 해주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부활을 예언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사로(Lazarus)’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나사로는 단순히 그 자신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죽음 가운데 처해진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죽음, 사회적 죽음을 맛보며 고통 가운데 사는가?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무엇으로부터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우리는 엄청나게 발전된 도시에 살고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대한 베다니’(죽음의 도시, 슬픔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복음에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일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는 실로 엄청난 선언이 나온다. 이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리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아멘이 간절하게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빨리 끝나고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엄청난 사건이 나온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이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큰 소리에, 죽은 지 나흘(4)이나 된 시체가 무덤에서 살아 나온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장면을 들으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아니면, ‘무슨 좀비냐라고 속으로 웃는다.

 

우리가 거대한 베다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세상을 보는 것이다. “박근혜가 구속되면서 세월호가 바닷속에서 올라왔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이 이것이다. ‘그만 말하라. 지겹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반응할까? 곡을 하여도 왜 함께 울지 않는 걸까?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말한다. 한국의 유명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이런 말도 한다. “24시간 신경이 곤두서 있는 피로 사회 한국, 이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암이 안 걸리는 게 이상합니다.”

 

현대인의 사망원인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1위가 암이다. 건강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여 죽는 이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죽을 때 암에 걸려 죽는다. 20-30대 젊은이들의 최고 사망원인은 무엇인지 아는가? 자살이다. 참혹하다. 암 중에서도, 폐암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간암이고, 3위가 위암이다. 사망원인 순서만 놓고 보면, 1위가 암이고, 2위가 심장질환(심장마비(돌연사)이고, 3위가 뇌혈관 질환(중풍병)이다.

 

이 모든 사망원인 뒤에는 거대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스트레스. 스트레스 받으니까, 담배피고, 그래서 폐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술을 먹는다. 간이 상한다. 그래서 간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매운 거 많이 먹는다. 그래서 위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열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든가, 뇌혈관이 터져 죽는다. 무엇보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자살해 죽는다. 이게 우리가 사는 사회의 자화상이다.

 

피로사회’, 거대한 베다니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지겹다. 왜냐하면, 이미 삶 속에서 매일 같이 죽음과 지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온통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 남의 기쁨에 감흥이 없다. 남의 슬픔에 감흥이 없다. 모든 게 다 지겨울 뿐이다. 그러니, 배 안에서 305명이나 되는 생명이 몰살 당했는데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지겹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들도 죽음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다. (8살짜리 여자 아이를 죽인 17짜리 고등학생 여자 아이의 진술, ‘꿈 인 줄 알았다’. 자기가 죽음에 처해 있으니, 자기 손에 남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남의 죽음에 감흥이 없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믿는 자, 그분의 부활과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 그에게는 생명력이 넘친다. 생기가 넘친다. 생기가 넘치는 자는 피리 소리가 들리면 덩실덩실 춤출 줄 안다. 생기가 넘치는 자는 곡 소리가 나면 함께 슬피 울 줄 안다. 기쁨이 무엇이고, 아픔(슬픔)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나사로인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 나사로인가? ‘부활이요 생명이신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을 박차고 나온 생명을 얻는 나사로인가? 아니면,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어두운 무덤에 머물러 있는, 여전히 죽어 있는 나사로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가? 스트레스 받아서, 피곤해서 죽어가는가?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는가? 윤동주의 시 <십자가>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무덤을 나온 나사로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나사로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죽음을 박차고 나온 나사로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음에 머물러 있는 나사로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의 주님,

복음을 들은 우리들,

더 이상 이 세상이 주는 죽음의 요인 스트레스

머물지 말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의 복음의 들은 우리들,

성령의 생기를 입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돌아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아픔인지 분별하여

허락된 십자가를 지고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 줄 아는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0) 2017.04.11
마라라 하지마라  (1) 2017.04.06
거룩과 영광  (0) 2017.03.30
여호와 닛시  (0) 2017.03.23
홍해를 건너라  (0) 2017.03.2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