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2

내 신앙의 화요일

마가복음 11:20-25

(고난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굉장히 피곤한 날이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기록 중 화요일에 대한 기록이 가장 길다. 화요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3장에 이르고, 절수로는 115절이나 된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부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화요일의 기록 중에서 3분의 2는 성전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과 예수님이 충돌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에 대한 묵시와 임박한 인자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수님과 대결한 세력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 그룹이었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질문을 통해 예수님과 대결을 벌이는데, 그들의 질문은 궁금해서 묻는 것, 가르침을 받으려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예수님을 군중의 지지로부터 떼어 놓은 후 죽이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성전관리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여기서 이런 일은 전날 있었던 성전정화 사건을 말한다. 예수님이 성전의 환전상과 제사제물 공급 상인들을 내쫓은 일은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괘씸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영업을 재개하려고 했다.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신학화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팔아 자금을 모았다. 이에 반발한 어거스틴 수도회의 사제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걸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행하고 있는 잘못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마틴 루터에 대한 제재를 가했다. 그의 문제제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응에 의해 그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다른 기득권 세력이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위하여 달려든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은 외통수 같은 질문이다.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면 유대민중들의 공분을 살테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면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다음의 말로 대응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은 기독교 역사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는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정치적 의무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이 말씀을 들이대곤 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는 이 구절을 들이대며 독일국민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구절은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의 주장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일까?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자들의 치부를 드러내어 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히 드러내고자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으신다.

 

우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 하나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두 가지의 동전이 시중에 유통되었다. 하나는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나 동물 등 어떤 상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어떠한 형상을 새겨 유통시키는 것을 신성모독죄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이들은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다녔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고 섬겼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에는 황제에게 속한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선언이다. 특별히 레위서는 이렇게 선포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고,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 모든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훼손하면 안 된다. 탐욕은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실패를 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달려든다. 이들이 지닌 비장의 질문은 사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의 수혼제도를 통해 사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도한다.

 

사두개인은 그 당시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모두 쥔 기득권층이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한 반면에,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예언서는 권력을 가진 부유층에 의해 주도된 사회제도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이다. 한마디로, 예언서는 부와 권력을 쥔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는 성경이다. 그들은 당연히 예언서의 말씀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사후 세계를 안 믿었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동시에 부활도 믿지 않았다. 사후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사후 세계를 질문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그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 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을 가하기 때문이었다.

 

부와 권력은 최고의 영적 장애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신실한 영성가들은 부와 권력을 등지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후 세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대응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주신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가 중심이라는 것이. 사후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후의 종교가 아니라, 현재의 종교이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 먼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과거의 아픔이나 미래의 불안 때문에 죽은 것처럼 사는 자는 산 자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화요일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모든 기득권층이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위에서 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듣고 싶어서 던진 진물이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하나님의 도)은 무엇입니까?’

 

어느 대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중에 노자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한 학기 노자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그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험 문제를 냈다. ‘노자의 사상을 논하시오!’ (나도 대학시절 이스라엘 역사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기말시험 문제가 이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논하시오!’) 그런데, 노자에 대한 기말시험을 친 학생 중 당당하게 100점을 맞은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답안지에는 이러한 답이 써 있었다. “”. 노자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nothing)이다.

 

1세기 바리새파 율법사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있었다. 샴마이와 힐렐이다. 어떤 이가 이들에게 찾아와 위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똑 같은 것을 질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샴마이는 율법을 어떻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느냐고 타박을 주며 그 사람을 쫓아냈다고 하고, 힐렐은 율법을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고 한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에 대한 주석이다. 가서 그것을 배우라.”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 말씀하셨다. 첫째는 신명기 6 4-5절 말씀인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레위기 19 18절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것(우리의 가슴, 영혼, 마음, )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이사(황제, 이세상)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나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힐렐의 해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차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은 차별 받기 싫어하면서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의 다른 어떠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율법학자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12:33). (To love him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understanding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more important than all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보다 정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깊은 설명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하루였다. 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하루였다. 그렇다면, 내 신앙의 화요일은 어떤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의 가르침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는가? 나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한 명의 겸손하고 다정한 인간으로 서 있는가? 이것은 내 신앙의 화요일에 진지하게 던져봐야 하는 질문들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0

예배보다 정의

마가복음 11:12-19

(고난주간 월요일)


어제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묵상하는 절기이지 우리가 고난 당하는 절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고난 당했으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한 번 보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평화와 나음이지,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Passion),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수난(Passion)의 자리로 이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는 말씀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제 말씀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참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힘을 가지면 평화가 올 거라고 사람들은 흔히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부와 권력)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힘을 갖는다고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을 갖기 원하는가? 그래서 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면 점점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마약을 찾게 되는 원리와 같다.

 

성경은 힘에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서 평화가 온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성경은 오직 그것에 대한 증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마서의 언어로 옮기자면, 하나님의 정의는 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로마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가 어디에 나타났다고 말하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평화는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온다. 그래서, 의인(평화를 누리는 자)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의 말씀 중에 가장 기괴한 말씀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오늘 말씀을 본 이들은 분명 예수를 성질 더러운 이로, 도대체 따르기가 힘든 위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저주와 폭력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오늘 이야기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고 있다. 베다니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을 지녔다(물론 슬픔의 집이라는 뜻도 있다.). 베다니 동네에 무화과나무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날 때 배가 고프셨다고 한다. 저 멀리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니 잎이 무성하여 그 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많이 맺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나무 가까이 가셨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저주를 무화과나무에 퍼붓는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은 말씀이 곧바로 등장한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무화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 잘못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그토록 심한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지는 성전정화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사건에 이어 나오는 성전정화 사건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또 한 번 깡패처럼 행패를 부리시는 장면을 연출한다.

 

성전에는 돈 바꾸어 주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을 한 것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영업이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원전 900년 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성전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라는 신학을 펼쳤다.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거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성전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유일한 장소였고, 희생제사는 용서의 매개 수단이었다.

 

성전신학에 따르면, 어떤 죄는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용서될 수 있었으며, 어떤 종류의 부정한 것들은 단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정화될 수 있었다. 용서와 정화의 매개체로서 성전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화되고 용서받은 상태로 성전 안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마커스 보그, 도미니크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25)

 

이러한 성전신학에 따르면, 당연히,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졌고, 순례의 목적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먼 곳에서 순례를 온 이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고 제사용 제물을 공급해 주는 일은 오히려 그들의 편의를 생각한 좋은 일이다.

 

그렇게 칭찬 받아야 할 법한 환전상과 제사 용품 공급 상인들은 내쫓으시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예수님의 책망은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집인 성전을 사람들은 강도의 피난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 7장의 말씀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7 11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강도의 소굴, 피난처)으로 보이느냐?” ‘강도의 소굴, 강도의 피난처가 무엇인가? 강도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몸을 숨기는 곳이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은 책망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강도같은 짓을 저지르며 살면서 성전에 오면 자신들이 행한 불의한 일들이 감추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예배를 동시에 강조하지 않고 예배보다 정의가 더 우선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내가 너희의 예배를 거부하는 것은 너희에게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으며, “너희의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너희의 정의를 거절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 이를 증명하는 구절들이 여럿 있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90)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21-24)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 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 6 6)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 6-8)

 

예수님은 성전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잘못 사용하는 자들이 더 이상 성전을 욕되게 만들지 못하도록 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성전을 폐쇄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복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는 기분 내키는 대로 신적인 능력을 남용하는 사람이거나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처럼 성전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격한 용어를 써 가며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예배에 목숨 걸어라!”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왜곡이다. 예배와 정의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없기 때문에 예배를 안 받아 주시지,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의 행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을 보이면, 예수님처럼 수난(Passion) 당하기 마련인데,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Passio)을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것을 등한시 하면서 예배만 드리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성전이 성전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예배가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구는 메조키스트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새벽예배는 극기훈련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목숨 걸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이루어 내기에 불가능하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고, 예배를 예배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하여, 그래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46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1:1-11)

종려주일

 

옛날에는 산불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요즘 한국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는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없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미술 시간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림(포스터)의 주제가 두 개 있었다.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 당시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미술을 통해 교육시켰는지, 그 배경을 너무도 잘 안다. 한국에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우면산이 있었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산에 불이 났다. 사람들의 부주의(특별히 담배꽁초)로 인해 불이 나기도 하고, 아이들의 호기심에 불이 나기도 했다. 옛날에는 놀게 별로 없어서 불 장난을 많이 하고 놀았다. 그리고 특별히 겨울이 되면 하늘에서 눈도 내렸지만, 북풍을 타고 내려온 삐라도 하늘에서 엄청 내렸다. 한 겨울, 논두렁 밭두렁에 나가면 눈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삐라도 여기 저기 많이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주워 파출소에 가져다 주면 학용품을 주곤 했다.

 

이처럼 어떠한 행동이나 주장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존재하는 법이다. 불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산불이 많이 났기 때문이고, 공산당 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남북으로 갈린 국가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포스터)에는 그러한 배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그 (그림)포스터를 보면 그 뒤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모두 알고, 그 그림(포스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데,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이렇게 쓰여진 데에는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가복음의 역사적 배경은 로마제국시대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진술을 듣는 우리는 아멘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당시 마가복음의 이 첫 진술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여겨졌던 사람은 로마의 황제지 예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예수는 로마제국의 반역자로서 그들의 형벌인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니, 마가복음의 주장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기록되고 있는데,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러한 순서를 지닌다.

 

* 일요일: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11 1) – 예루살렘 입성 사건

* 월요일: “이튿날” (11 12) – 성전 정화 사건

* 화요일: “이른 아름에” (11 20)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사건

* 수요일: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14 1)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모의

* 목요일: “무교절 첫째 날에,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14 12) -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체포

* 금요일: “새벽에” (15 1) – 고난과 십자가 죽음

* 토요일과 부활주일: “이레의 첫날 새벽” (16 2) – 침묵과 부활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날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지키고 있는 종려주일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절기로 유월절에 일어난 일이다. 유월절은 오순절(칠칠절)과 초막절(장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절기(명절) 중 하나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오는 것이 그들의 신앙적 전통이었다. 그들이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차츰 알게 될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순례 행렬 가운데, 두 개의 특이한 행렬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본 것처럼,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렬이다. 다른 하나는 말씀 가운데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보다 더 관심 있어 하고 눈 여겨 보았을, 로마 총독(빌라도)의 행렬이다.

 

그 당시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았다.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6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에 거주했다. 예루살렘은 오래된, 배타적인, 살기 힘든 도시였지만, 가이샤랴는 해변에 건설된 신도시로서 모든 주거 환경이 매우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 로마 총독은 유대인의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이 온 것이다. 왜 왔을까?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며 그들의 절기를 지키러 온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완전히 다른 데 있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몰리는 명절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을 예방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마를 타고, 칼과 창과 방패와 전차로 무장한 로마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러한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하며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

 

지금은 한국도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해서 그렇지 않지만, 2,30년 전만해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그렇게 발전된 수준이 아니었다. 예전에 한국에는 검소한 차와 럭셔리 차의 대명사가 있었다. 티코와 그랜저이다. 티코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그 당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탄 것은 그랜저를 탄 것이 아니라 티코를 타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그랜저 타지 말고 티고 타라. 예수님도 티고 타셨는데, 목회자가 그랜저 타면 못쓴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멘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들의 잔치 같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촛불집회. 그리고 이것은 예언의 성취이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어떤 왕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그가 갈릴리를 중심으로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아야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다. 번역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3절 말씀이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에서,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부분이다. 우리 말 성경의 이부분은 이런 뜻인 것처럼 읽힌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나귀 주인이 나귀를 즉시 내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NIV).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뜻이 정확해 진다. “주님께서 나귀를 쓰신 뒤 곧바로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잠시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막 내주나그리고 저렇게 남의 나귀를 막 가져다도 되나?” 그리고 이 본문으로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드리라.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마음대로 쓰시겠다고 하는데, 안 내어 드리면 죄다.” 이것 또한 위에서 본 티코와 그랜저 이야기처럼 성경을 오용하는 예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스가랴서에는 이러한 예언이 나온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9:9). 마태복음은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21:5).

 

중요한 것은 왜 왕이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말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어지는 스가랴의 말씀은 이렇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9:10).

 

로마 총독과 예수님의 행렬, 이 두 개의 행렬은 대조를 이룬다. 로마 총독의 행렬은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영화 그리고 폭력의 과시였고, 예수님의 행렬은 예수님께서 전하고 다니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의 폭력과 완전히 대조되는 평화의 나라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시편 118 25절에 나오는 이 말씀에서 왔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편 118:25).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인데, 이는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우리도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호산나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외치는 오산나는 어떠한 호산나인가? 혹시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이러한 호산나가 아닌가? “우리도 로마제국이 가졌던 권력을 가졌으면 좋겠! 우리도 그런 부를 누렸으면 좋겠다! 우리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위치에 올라서서 그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했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 미가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4:4). 이러한 일들은 정의와 번영과 안전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정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땅을 갖는 것이다. 번영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생계를 유지하고도 남을 정도인 상태를 말한다. 안전은 끊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있는가? 모든 사람이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이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빈부의 격차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상위 1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미국 전체 부의 거의 80%이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사느라 허덕이고 있다. 번영은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 끊임 없이 들려온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러한 불의를 나몰라라 하면서, 다른 이들이 어떻든, 이 사회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호산나, 주여, 나를 지금 당장 구원해주소서, 형통케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넘어서는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말도, ‘신뢰믿고 맡김의 뜻을 지니고 있다. ,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소식을 신뢰하고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57)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참된 평화를 외치며, 예수님께서 외치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부추기는 권력과 폭력의 길을 따르지 말라.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라. 다른 누구, 또는 무엇이 아닌, 오직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 자신, 가정,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자.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교회,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가득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함께 외쳐보자. ‘호산나!’ 서로 인사 나누자.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우리 평화롭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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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