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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3. 05:56

최고의 제자? 최악의 제자?

마가복음 14:1-11

(고난주간 수요일)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 일주일의 시간 밖에 안 남는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나도 예수님처럼 좋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것이다.

 

베다니는 예수님께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그곳은 예수님의 주 사역지였던 갈릴리와 비슷한 곳이었다. 도시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된 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베다니였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았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언니 마르다가 동분서주한 것을 보면, 그 남매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예수님은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이 있어 갈 때마다 베다니에 들러 거기에 거주하는 좋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셨다. 월요일과 화요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이런 저런 일을 겪으신 후,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물며 그곳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다. 같은 시간,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한 쪽은 생명이 넘치고, 한 쪽은 죽음이 넘친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일어난 사건을 전한다. 식사 중, 한 여자(마가는 그 여자의 신원을 자세히 밝히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헷갈리면 안된다. 장소도 다르고, 시간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pure nard)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이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는 설명이 나온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렇게 비싼 향유를 깨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은 것을 본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힐난한다. 그들이 힐난하는 것도 나름 의로운 이유였다. 그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가난을 구제하는 데 쓰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힐난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신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유례 없는 특별한 칭찬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9).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중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이 시간 이 여인에 대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된다. ‘왜 그녀는 그토록 유례 없는 특별한 칭찬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면,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 사건은 세 번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 예언이다.

 

예수님의 수난 예언은 세 번에 걸쳐, 8, 9, 10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세 번째 수난 예언이 가장 자세한데, 그것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수난 당하게 될 것인지 예견할 수 있다. 그 말씀은 이렇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을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10:33-34).

 

성경을 펴고 천천히 확인해 보라. 이 예언은 실제로 14장에서부터 16장에 걸쳐 하나씩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난 예언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다. 마가복음은 수난 예언이 세 번에 걸쳐 나올 때마다 그 예언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 수난 예언을 예로 들어 그것을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수난 예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수난 예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10:35-37).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언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도 자신처럼 죽음과 부활의 길(폭력과 불의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 나라(정의)를 살아내는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분명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8:34-35).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는 데 실패한다. 그러니 자꾸 딴 소리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하는 제자들과는 다른 한 존재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예수님께서 유례 없이 특별히 칭찬한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다. 열 두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서 수난 예언(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는 길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들이 가는 길에만 관심을 가졌다.

 

오직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이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유례 없이 칭찬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빈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첫 번째 기독교인이었다.

 

오늘 말씀에는 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이야기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를 팔아 넘길 음모를 꾸미는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이야기다. 그는 그냥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가 아니다. 마가복음은 그를 콕 짚어서 열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10).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도상에서 세 번에 걸쳐서 수난 예언(죽음과 부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했던 열두 제자들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가슴이 더 아프다.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을 찾아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26:15).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무엇을 받았는지. 그는 예수를 넘겨준 대가로 은 30냥을 받는다.

 

마음이 무뎌져 있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위험에 빠뜨린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밤, 가룟 유다가 딱 그랬다.

 

우리도 지금, 도상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우리는 어떤 제자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제자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처럼 최고의 제자인가, 아니면,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크냐논쟁하며, 영광의 자리에 앉을 생각만 하는가? 더 나아가, 30냥에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처럼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고 말하며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최악의 제자는 아닌가?

 

마지막 수요일,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다. 바라건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바로 그 좋은 사람들’, 그 좋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최고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최고의 제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어떤 제자이니이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제자이니까?

우리는 주께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을 정도의

좋은 사람들이니이까?

주님, 우리도 값비싼 향유를 주의 머리에 부은 한 여인처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기억되는

최고의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무뎌진 이 마음을 깨워 주옵소서.

주의 말씀을 믿고

주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살아내는

최고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