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7. 4. 24. 15:30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20:24-29)


주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니이까.

우리가 마주한 근본적인 현실은

부활의 현실인 줄 믿나이다.

도마는 자신이 마주한 부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하였나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필요하나이다.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한

부활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30

도마가 마주한 현실

(요한복음 20:24-29)


도마(Thomas)는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로 쌍둥이는 디두모이다. 도마는 쌍둥이였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때문이다. 도마에게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이다. 우리는 도마를 흔히,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른다.

 

의심 많은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흔히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심신앙의 적(enemy)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의심은 나쁜 것인가? 의심은 죄인가? 의심하면 신앙인도 아닌가?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기사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처음은 막달라 마리아(부활을 경험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던 마가복음의 기사와는 달리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다)이고, 다음은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추정)’이고, 그 다음은 안수 첫날 저녁 때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긴 곳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도마가 동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시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예수님)를 보았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도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의 의심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그저 나도 너희들처럼 예수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의심한다.

 

도마의 의심이 있은 후 여드레(8)가 지나 그의 의심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마침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그리고 난 후의 도마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제가 제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 보았으니,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성경은 이 후의 도마의 행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생성된 문헌이나 전설을 보면 도마가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짧게 나오나, 기독교 전통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생길 정도인 것을 보면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도마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도마복음서)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여 인도의 마라폴이라는 곳에 묻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인도가 힌두교나 불교가 강한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인도의 기독교는 아주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매우 독특한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긴 세월(기독교 태동과 역사를 같이 하는)을 보내며 주변 종교(힌두교나 불교)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마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강의가 있다. 하버드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가 유명하여 얼마전 유명세를 탄 일이 있고, 예일대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철학적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이 유명하다. 내가 한국에서 다닌 학교에서는 한태동 교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가장 큰 인가를 누렸는데, 그 이유는 이 분이 박사학위가 네 개나 있는 데다가, A 폭격기로 소문 나 있었고, 금요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수업을 안 하고, 비 오는 날은 비(아닐 비) 온다고 수업을 안 해서 그랬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신학 공부할 때, 그곳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강의가 있었다. 토마스 탕가라지 교수의 <Image of Christ>라는 수업이었다. 조기 등록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강의였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에서도 살짝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인도 출신 신학자였는데,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복음을 전한 인도의 마을 출신이었다. 그분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도의 전통 악기를 연주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선율이 귀에 선하다.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매우 독특하고 우주처럼 넓고 깊었으며, 그것을 통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도마는 실증주의자이다. 그의 의심은 믿음 없는 의심’, ‘냉소적인 의심이 아니라, 마주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더 잘 믿기 위한 거짓 없는 신앙, 진실한 신앙의 자세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의(의심)’는 철학에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회의의 방법을 써서 상대방이 진리에 도달하게 도운 대표적인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다는 이 말,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이라는 말도 결국 그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질문)’을 가지라는 뜻이다.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인생의 현실에 파묻혀 의심하는 것을 잊고 산다. 괜찮지 않은데 왜 괜찮다고 현실을 외면 하는가.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없는 듯 태연하게 있는가. 아픈데 왜 안 아픈 것처럼 있는가. 믿어지지 않는데 왜 믿는 척하는가. 그러니까, 불의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채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미운 오리새끼>라는 것이 있다. 그 동화를 보면, 오리의 무리 중에 유독 미움을 받는 오리 한 마리가 있다. 그 오리는 하도 미움을 받아서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미운 오리새끼.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우아하게 날고 있는 백조를 본다. 그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날았으면 좋겠다고 미운 오리새끼는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미운 오리새끼는 성장했고, 어느 날 호숫가에서 백조 한 마리를 만난다. 그 백조는 미운 오리새끼에게 엄청난 사실을 알려 준다. ‘너는 오리가 아니라 백조야!’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미운 오리새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해보지 않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데, ‘의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미운 오리새끼는 더 이상 미움 받는 오리가 아니라, 하늘을 우아하게 나는 백조가 되었다.

 

도마가 마주한 현실은 부활의 현실이었다.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대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반응은 세 가지이다. 1)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주변을 안 보거나, 2) 꿩처럼 두려워서 고개만 파묻고 있거나, 3)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 같은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도마가 보인 반응은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진실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을 잃어 버린 자는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마는 부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그 현실에 순종하여 이교도의 땅에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여러분이 마주한 현실은 무엇인가? 부활의 현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여기에 와 있고, 몸의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이 선포 앞에서, 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교육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준비시켜,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현실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것을 대비시켜 주면서 살고 있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살 수 없는 현실이 왔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배우도록 독려하고, 대학교를 나오는 것이,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대학을 나오면 현실을 더 잘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제 4차 산업 혁명 시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마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도마처럼 의심(회의, 질문)’을 품고 있는가? 그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수용하기 위하여, 도마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도마와 같은 고백이 동일하게 나올 거라는 것이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현실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깨달아, 진실이요 진리인, 부활의 삶, 하나님의 나라, 몸의 부활을 나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우리도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문(회의, 질문)’을 가져보자.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자. 그리고, ‘부활의 현실을 참으로 믿는 자가 되어보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진리요 길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니이까.

우리가 마주한 근본적인 현실은

부활의 현실인 줄 믿나이다.

도마는 자신이 마주한 부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하였나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필요하나이다.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한

부활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27

성령님, 예수님, 그리고 우리들

(마가복음 1:9-20)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이다 (특별히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복음서는 시작한다.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오실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실 이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예언된 그 오실 이가 실제로 등장한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그가 바로 그 오실 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세례 받을 때 하하늘부터 들려온 음성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런 후,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 받은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을 곧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이끌려 시험을 받는다.

 

그가 받은 시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모두 출애굽 2세대들이다. 1세대들은 여호와께 불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고,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사탄을 흔히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사탄을 표현할 때 뿔 달린 흉측한 모습으로 그린다. 사탄이 하는 기본적인 일은 시험하는 일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은 기소하는 일을 한다. , 어떠한 존재의 의로움을 달아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에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를 통해 공격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기소에 맞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가는 그것을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 당할 때 실패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험 당할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을 바라보았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시험에서 벗어날 줄로 잘못 생각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 당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것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악(더러운 귀신)과 싸우신다. 이 일련의 이양기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우연히, 어쩌다 오신 것이 아니라, 예언에 의해서 오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제자도의 퀄러티를 가르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낳은 자식과 예언, 또는 예정된 자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그 자식이 부모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너는 실수로 낳은 자식이야! 너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 자식의 자존감을 무너질 수밖에 없고, ‘자기 인식에 대한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생각해 보자. “너는 예언된 자식이야. 너는 예정된 자식이야.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야.”

 

성경에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예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이다.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를 일컬어 이렇게 평가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6:24).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27:3-10).

 

그러나,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가 하나님의 예언과 예정가운데 태어난 것에 대하여 찬송을 지을 정로도 기뻐했다 ( 1:67-79). 그 찬송 다음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1:80).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자기 인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퀄러티를 다르게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렀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믿으시는가?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광야에 나가서 시험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어떠한 일도 감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어떤가? 성령의 충만함 없이 어떠한 일을 하면, 사탄에게 기소 당하기 딱 쉽다. 거기에는 육신의 일이 가득하게 되어, 우리의 죄된 본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룟 유다를 보라. 성령의 충만함 없이 그가 저지를 일을 보라. 그리고, 저지른 후에 그가 행한 처신을 보라. 사악함과 죽음만이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이 가득한 상태에서 행하는 일에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함을 받았는가?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 성령 충만함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들짐승과 함께 있는 적막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천사가 거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머물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 성령의 열매 가득 맺히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