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7'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7.04.27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7. 15:46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이가

(마가복음 10:35-45)


한국에서는 권력투쟁이 한창 중이다.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권력투쟁이 발생하면 피바람이 분다. 권력은 그만큼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사회제도가 민주화되어 옛날처럼 권력투쟁이 발생한다고 피바람이 불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현대 사회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정치와 경제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출세의 길을 가려면, 정치나 경제 분야로 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느 분야나,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호령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 발생한 사건이다. 자신이 고난 당할 것에 대하여 세 번째로 말씀하신 뒤,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인가를 청한다.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세요!” 그들이 구한 것은 이것이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이것은 명백하게, 야고보와 요한이 권력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과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권력투쟁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옛날의 다윗 왕처럼 (다윗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인들(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권력을 다시 찾아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앞서가고 뒤따르며)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9).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들은 조상 다윗의 나라가 그의 자손 예수를 통해서 오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이 기대하던 다윗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오지 않았다기 보다,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왔다). 이방인(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세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의 자손 예수는 이방인(로마제국)의 손에 처참하게 죽는다. 이것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칠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이 골리앗에게 처참하게 죽게 되는 형국과 같다.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그들이 힘없이 고난을 당하는 예수에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성낸 것이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욕을 해댄 것은, 그들의 기대가 허탈하게 무너진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망이 커지면 분노가 표출되는 법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그들은 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정치는 개인(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고, 경제는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실현된 사회를 정의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사회 덕목은 정의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이 불평등하다고, 부정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회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내 놓아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권력의지를 드러내자,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41). 그들은 왜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을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의 무지를 향해 화를 낸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보다 먼저 권력의지를 예수님께 전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시샘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권력의지를 나무람과 동시에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다. 권력을 가지려고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자들은 권력을 손에 쥐고 권세를 부리기 위함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여기서 임으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는 뜻은 권력을 잡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맘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한다. , 권력은 자유를 극대화시킨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유를 극대화시키려 할까? 그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크면 클수록 사람은 생명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자유는 권력을 잡을 때 오는 것이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는 최고의 자유를 누려서 좋긴 한데, 권력을 잡지 못한 이들, 권력을 잡은 자에게 부림을 당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평등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권력의지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은 그런 식으로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성취는 권력의지를 드러내서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데서 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대방을 섬기는 데서 생명의 성취된다는 가르침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

 

어떤 목사님이 SNS에 연회 참석 후기를 올렸다.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공유한다. (비문은 약간 손 봤다.)

 

지난 주 00연회가 있었다. 올 해는 감리사 선거가 있는 연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회는누가 감리사가 되느냐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점차 아니 전적으로 연회나 총회의 존재 목적이 감리사나 감독을 뽑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이나 본질은 뒷전이다.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영성과 믿음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언급도 없다. 오로지 회무처리(그게 그리도 중요한가 보다), 그것도누가 장을 맡고, 누가 중요한 자리에 앉는가가 중요하다(돈이 안 되는 자리에는 관심도 없다).

 

감리교회가 마치 감리사나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감리사와 감독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감리사와 감독의 조건을 봐도 그 사람(영성) 자체보다 감리사나 감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규모가 되는 교회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성보다 규모가 중요하다. 교회의 규모를 나타내는 재정과 교인수가 중요하고 절대적인 조건이다. 돈이 없는 교회, 즉 돈을 내는 교인이 적은 교회는 감리사나 감독 (자리)에 눈길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을 섬기는 감리교회이다. 재물이 곧 능력이고, 재물이 곧 지도자의 조건과 기준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열다툼을 하였던 제자들과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리게 될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였던 것과 같이 현 감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따르는 흉내만 낼 뿐, 실상은 제자들처럼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나는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 없는 종교의 형태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서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약에 메소디스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그 교리와 그 정신 그리고 그 훈련을 다같이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 존 웨슬리

 

세상은 권력과 재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세상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력과 재물을 통해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제자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생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도를 따르고 있는가!

 

이 말은 정치와 경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정치이고, 무엇이 올바른 경제인가에 대해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정의가 올바로 세워지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제자도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도를 내 삶의 자리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제자도 관점에서의 정의는 섬김이다. ,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제자는 섬김의 종이어야 한다. 웨슬리의 주장처럼, 이것이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하나님 나라)이요,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종교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