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7.06.27 어떤 날 1
  2. 2017.06.25 소통의 능력
  3. 2017.06.24 위로의 힘
  4. 2017.06.15 부활의 신비 1
  5. 2017.06.12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6. 2017.06.12 잔치는 시작되었다 1
  7. 2017.06.12 빛은 어둠을 이긴다
  8. 2017.06.06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9. 2017.06.06 예배 - 주께 돌아옴
시(詩)2017. 6. 27. 15:28

어떤 날

 

나는 까만 염소가 되어

애처롭게 울었다

이마 주름에 저녁 노을이 고이고

무릎 사이로 시린 바람이 흘렀다

우리 아버지 시신 화덕에 들어가던 날처럼

세상은 무심하게

노란 장미를 피우고

별을 공중에 띄웠다

 

피가 역류한다

심장이 뛰는 것은 기적이다

눈은 더이상 하늘을 보지 못하고

바닥만 보게 되었는데

먼지를 일으킨 건 바람이 아니라

눈물의 중력이었다

 

나는 또 한 번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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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25. 04:38

소통의 능력

(여호수아 22:10-34)

 

대개 인간관계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집약 노동이다.” 인간관계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래서 일 중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얼마 전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이사회에서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나는 이유에 대하여 분석한 적이 있다. 그곳의 고위 보좌관 폴 아킨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교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부족, 질병, 테러, 향수병이 아니다. 심지어는 결실이나 복음에 대한 반응이 없어서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재정과 질병과 테러에 대비를 잘 한다. 향수병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준비를 한다. 하는 일에 대하여 결실을 맺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것들을 하느라 소통의 능력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결국 소홀하게 준비한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만다. 

 

오늘 본문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보고 되고 있다. 가나안(요단 서편)에 대한 땅 분배 후, 이제 정복 전쟁을 마친 요단 동편의 세 지파 반(르우벤, , 므낫세 반)은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으며 자기들의 거처(요단 동편)로 돌아가면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는다. 그들이 쌓은 제단은 제법 컸기 때문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았고, 그들이 쌓은 제단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요단 서편의 지파들 사이에 퍼졌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오해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 제단이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느하스를 대표로 한 진상조사단을 꾸려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파견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들이 겪는 두 가지의 일 때문이었다. 하나는 바알 브올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아간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른 그 두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적지 않는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바알 브올 사건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아간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만 했다. 그들은 그러한 끔찍한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우리도 충분히 숙지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죄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죄는 단순히 못된 짓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섬기는 게 아니라, 온 천하보다 귀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헤치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는 진상조사단은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이르러 그들이 거기에 제단을 쌓은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바알 브올 사건과 아간 사건을 언급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제단 이외의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라는 것을 확인시면서, “만일 요단 동편의 소유지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면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요단 동편 땅으로 건너와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지고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하여 자신들이 그렇게 제단을 쌓은 정당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말로 시작한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 엘로힘, 여호와! 그리고 자신들이 제단을 쌓음으로 우상숭배 한 것이라면,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마시고, 천벌을 내리시라고 말한다. 그만큼 자신들의 행위에는 아무런 우상숭배의 의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단 동편 지파들은 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은 것인가? 그것은 번제를 위함이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요, 오직, “요단 서편의 후손들로 하여금 요단 동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자들로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일종의 증거물이라고 말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그 제단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은 요단 서편 사람들(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들)이나 요단 동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한 식구요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를 헤치는 가장 나쁜 요소는 분리(separation)’배척(exclusion)’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분리하고 배척할 때이다. 분리와 배척이 일어 나면, 상대방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짐승 대하듯 상대방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결코 못된 짓을 못한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더 이상 존엄성을 갖춘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게 될 때, 사람은 사람에게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범죄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상실이고 존엄성의 상실이다. 그 현장에 생명도 없고 인간도 없다. 그저 흉악한 죄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차원의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무엇보다 상실된 인간성, 상실된 생명의 되찾음이다. 인간성과 생명이 상실되어 있는데, 그 상태로 천국으로 이동해 보았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곳에서도 상실된 인간성과 생명 때문에 분리와 배척이 일어나게 될 텐데! 구원은 존재의 변화이지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구원은 더 이상의 인간성 상실이나 존엄성 상실, 즉 생명의 상실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상실하지 않고, 다른 이(이웃, 타자)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이의 생명을 사랑한다.

 

소통은 단순히 서로의 말을 교환하는 행위가 아니다. 소통은 서로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이다. 소통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기뻐하고 잘 지내는 것이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은 그들의 해명을 이해하고 기뻐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대로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헤치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서로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기 전에 요단 동편 지파들이 요단 서편의 지파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우려를 여호수아나 비느하스, 즉 지도자들에게 적극 알리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 나갔다면, 이렇게 불필요한 오해와 일촉즉발의 상황은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법이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그것을 푸는 일은 괴롭고 힘들다. 그러므로, 오해를 만들지 않도록 자기가 가진 생각을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혜롭게 알리는 일은 관계를 부드럽게 풍성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삶의 능력 중 하나이다. 소통의 능력을 키워 인간관계가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을 더욱더 누리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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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24. 08:21

위로의 힘

(룻기 2:1-13)

룻기 3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반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져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싶다. – 서정윤

 

2.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3. 오늘 말씀을 읽으며 이런 시들이 생각났다. 청소년, 청년 시절, 이러한 시들을 접했을 때, 그 시들은 흔들리는 영혼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3편 이상의 시를 읽는다. 그것이 내가 정해 놓은 하루의 목표 중 하나이다. 대학교 다닐 때, 엄마에게 하루에 5천원씩 용돈을 받아서 다녔는데, 하루에 1천원씩 아껴서 한 권에 5천원이던 시집을 일주일에 한 권씩 사서 읽었다 (지금은 시집 1권도 8천원에서 1만원 한다).

 

4. 스무 살 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책에서 눈을 못 떼던 시절도 생각난다. 베르테르의 눈을 통해서 그려지는 여인 로테의 모습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도 젊은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그 소설을 읽은 뒤, 자신이 창업하려는 회사의 이름을 롯데로 정할 정도였다.

 

5. 심리학에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있다. 유명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사회적 문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괴테 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이 발표된 직후, 베르테르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젊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른다.

 

6. 오늘 말씀을 읽으며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는, 세상과 소통 못하고 사는 사람이다.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꽃을 보면서 ~ 이쁘다!’고 감탄사를 날릴 줄 안다. 그러나, 소통을 못하는 사람은 계절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만다. ‘덥다, 춥다’. 더 심한 사람은 더워 죽것다. 추워 죽것다.’ 모든 말에 죽것다를 붙인다. 그리고, 둘째,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유머가 없어진다. 이런 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7. 룻과 보아스의 운명적인 만남을 보라. 너무 가슴 설레지 않는가. 오늘 말씀은 나오미가 남편도 잃고 아들도 모두 잃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1).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이다.

 

8.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서 가슴 아픈 사진과 기사를 봤다. 태국 방콕에서 일어난 일인데, 주인이 자신을 버리고 이사간 줄도 모르고 한 달 째 빈집 대문 앞에서 대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개의 사진과 기사였다. 얼마나 충직한지, 차가 자기 앞에 다가와도 비키지 않고, 누군가 집 앞을 서성이면 매섭게 짖어 댔다고 한다.

 

9. 누군가를 외롭게 두지 말라.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롭게 두지 않으신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겠는가. ‘임마누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힘들게 하긴 하시지만, 우리를 결코 외롭게 두지는 않으신다.

 

10. 외로움은 좋지 못하다.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지어주시게 된 이유가 이렇게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사람에게 가장 안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외로움이다. 요즘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가 무엇인가? 고독사이다. 이것은 사회적 죽음이고, 사회적 살인이다.

 

11.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뜻을 지나고 있다. 특별히 우리처럼 이민사회에서 교회 공동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오미와 룻에게 희망이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 보아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력한 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오늘 말씀에는 룻과 보아스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일화들이 소개된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얼마 떨어진 밭으로 시찰을 나온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하는 일꾼들에게 잔소리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부터 한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복을 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아도나이 임마켐)” 이에 반응하여, 일꾼들은 보아스에게 이렇게 복을 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예바레케카 아도나이).

 

13. 그리고 나서, 보아스가 밭에 도착한 후 사환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던 룻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이것은 이는 누구에게 속한 상태냐라고 묻는 것이다. 결혼했냐 안 했냐는 뜻이다. 이것은 보아스의 룻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질문을 안 한다. 결혼했든 말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결혼 여부가 먼저 궁금한 법이다.

 

14. 그런데, 보아스의 질문에 대한 사환의 대답이 굉장히 호의적이다. 우선 룻의 신상을 말한다. ‘그녀는 모압 소녀입니다.’ 그리고 룻의 성품에 대한 인상을 소개한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7). 한마디로, 룻의 성실함에 대한 서술이다.

 

15. 룻과 보아스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룻은 보아스의 따스함을 보았고, 보아스의 룻의 성실함을 보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시작된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배려한다.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녀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의 호의에 룻은 목이 메어 이렇게 화답한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든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

 

16. 요즘 사회기사면에 심심치 않게 신고려장에 대한 기사가 뜬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슬하에 2 3녀를 둔 80대 여성 김모 씨는 사회적ㆍ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막내아들을 따라 필리핀에 갔지만 곧 홀로 남겨졌다. 사업이 부진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들은 다른 형제들에게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쳐 장례비용을 받아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김씨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다. 아들은 쇠약해진 노부모를 필리핀의 한 모텔에 유기하고 도망갔다.”

 

17. 보아스가 룻을 쫓아낸다고 한들 뭐라고 할 상황이 아니다. 이방 여인이라고 무시하고, 자기 밭에서 쫓아내고, 물도 자기가 길어다 먹게 하고, 등 보아스가 룻을 학대할 수 있는 건수는 얼마든지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갑질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아스가 룻에게 갑질을 하지 않고, 호의를 베푼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18. “남편이 죽은 후 당신이 시어머니에게 한 일에 대해 모두 들었소. 당신의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민족과 함께 살려고 온 것 말이오. 여호와께서 당신의 행실에 대해 갚아 주실 것이오.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당신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11, 12).

 

19. 보아스는 무엇보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룻의 인생에 벌어진 일을 세상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즉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답과 온전한 상이 있기를 바랐다. ‘온전한 상에서 상은 품삯과 같은 의미다. ,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라는 뜻이다.(생명의 삶 플러스, 룻기, 48)

 

20. 룻이 한 행동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 받으러 온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숨기 위해, 안식처를 찾기 위해 왔다. 룻은 모압 땅에서 다른 남편을 만나 위로 받으려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다.

 

21.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사람은 위로를 받지 못하면 죽는다. 시편이 계속해서 고백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편 119:50). 위로란,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가? 나오미와 룻이 모든 것을 잃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인생의 기쁨을 되찾은 이유는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21. 험한 세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라고, 서로에게 주신 돕는 배필이다.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위로를 받지 못해서 죽는다. 남자는 여자가 웃어줄 때 위로를 받는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소소한 말(잔소리로 들리는 말)에 귀 기울여 줄 때 위로를 받는다.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웃어주는 여자를 좋아한다. 여자는 성공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고, 소소한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남자를 좋아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자. 당신의 위로가 생명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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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5. 15:18

부활의 신비

(요한복음 11:17-27)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한국교회의 교단에서는 이단대책연구소같은 것이 있지만, 미국의 기독교 교단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자유라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한데,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을 낳으면 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현재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부르는 교단은 대부분 미국에서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유명하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경우는 그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다. 이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성경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든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단이라고 불릴까?

 

기독교 전통은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begotten son)로 부른다. 그리고, 양태론을 믿는다. , 예수는 완전 하나님이시고, 완전 인간이라는 뜻이다(vere homo, vere deus).

 

이단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다르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 같으나, 그 뜻이 다르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첫 피조물로 본다. 그리고, 첫 피조물인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켜서 구원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성자)를 동일본질로 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구별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매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들은 병역도 거부하고, 헌혈도 거부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끝나지 않았다. 사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생겨나게 된 계기도 이단논쟁 때문이다. 예수에 대하여 다르게 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그룹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했다. 예수가 이 땅에 임한 것은 가짜 육신을 입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것을 가현설이라고 한다. 그것과의 논쟁의 결과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매우 육신적으로 그린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한다든지( 20:27),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함께 잡수시기도 한다( 21:12).

 

오늘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 스토리의 배경은 베다니의 삼남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가족사이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 베다니에 살던 삼남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 가장인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이다. 부모님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남자인 나사로가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와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치유해 주시길 원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누인지 사흘(3)이나 지났다. 이젠 아무런 소망도 없다.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라비 나사로가 없는 삶을 계획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망도 없고, 죽음과 불안, 공포만이 맴도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22절에 흥미로운 진술이 등장한다. 마르다가 한 말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이것은 나사로를 살려주세요!’라는 의미보다는 이제 나사로가 죽었으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세요!’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가 가장 바랄 만한 것을 말씀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그런데, 마르다는 그 말에 대하여 이렇게 대꾸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지금 당장 살아나지는 못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다의 (부족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단순히 마르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마르다와 같이 죽음을 맛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던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이것은 굉장히, 아니 가장 중요한 진술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어로,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사람들 중의 한 명이거나, 생명을 부여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믿는 복음이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곧 부활과 생명이 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곧 부활과 생명을 얻는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부활과 생명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활과 생명이다. 다른 말로, 부활과 생명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곧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희망인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알고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에,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부른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는 자에게는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이 풍성해진다. 생명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의 완성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의 완성과 성취는 사랑의 완성과 성취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라. 우리가 목격하는 사랑과 생명의 풍성함은 매우 적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죄악이 충만하다. 몇 일 전(6 12) 한국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경남 양산에서 줄에 매달려 아파트 청소 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사를 했다. 사건을 조사해 보니, 청소하며 틀어 놓았던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 한 명이 옥상에 올라가서 청소부의 생명줄인 밧줄을 칼로 끊는 바람에 청소부는 곧바로 추락해 죽었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청소부가 다섯 남매를 둔 가장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가정은 어떻게 살아가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해와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고, 악만 남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재물이나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해줄 명예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생명의 완성이고 성취인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그래서 그들 안에 생명과 사랑이 풍성했다면, 죽음의 죄악이 그곳에 있었겠는가.

 

지난 주 토요일에 있었던 결혼예배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팀 켈러 목사는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탕부라고 말한다. ‘Prodigal’이라는 말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내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향하여 생명을 성취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풍성함, 곧 사랑이 넘친다. 다른 것은 다 말릴 수 있어도, 사랑은 못 말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바로 지금, 우리의 몸에, 우리의 삶에 지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 그 심장은 사랑의 심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생명의 풍성함, 사랑의 풍성함을 이기지 못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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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7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룻기 2

(룻기 1:15-22)


J. Crew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속도·가격이 더 중요해졌는데 제품·디자인 고집하다 뒤처져"라고 써 있었다. 이 기사가 안타까운 것은 J. Crew를 경영난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미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밀러드 드렉슬러이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미국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손을 거친 패션 브랜드는 모두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패션 브랜드 모두가 그의 경영을 통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GAP), 올드네이비(Old Navy),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메이드웰(Made Well) 등이 그의 통해 성공을 이룬 브랜드이다.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현직 CEO는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J. Crew의 경영자 밀러드 드렉슬러가 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머물다가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뜻이다.

 

나오미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자기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하고, 두 며느리의 살 길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결단을 내린다. 자신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의 백성과 그들의 신들에게로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정에 대하여 두 며느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오르바나 룻이나 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오르바는 자기의 백성(모압)과 신들에게로 돌아가고, 룻만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룻의 결심은 16절과 17절 두 절에 걸쳐 장엄하게 표현된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잘것없는 이방여인, 과부 룻의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없었다면, 룻은 오르바처럼 어쩌면 이름만 거론될 뿐, 아니,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당당하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의 고백이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이 신앙고백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이 바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한 룻의 뛰어난(남다른)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룻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타당한 결정은 무엇이겠는가?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아무도 자기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 돌아가 나머지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려는 살 길을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위에서 함께 읽은 신앙고백과 함께. 룻의 결정은 이러한 싯구를 생각나게 한다.

 

모른 척 돌아서 가면

가시밭 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른 척 돌아가지 않고자신의 현실을 맞닥뜨리는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바로 나오미이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가 나오미냐!”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나오미를 거론하며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 21).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의 이름처럼 기쁨이 없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라가 되었다. ‘마라,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약간 희극적인 표현을 섞자면,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면서도 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를 남다른 인생으로 만들어준 위대한 고백이다. 나오미는 모른 척,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남의 말 삼일 가는 법이니까, 못들은 척, 그런 일 없었던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또는 화를 내며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켄 블렌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올랜도 씨월드에 가서 본 샤무쇼(Killer Whale Show)’이다. 그는 그 포악하고 육중한 범고래가 수준 높은 재주를 부리는 이유는 사육사의 칭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며, 칭찬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며 통찰력이었지만, 지금은 칭찬이 한 사람이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샤무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단체들의 노력 덕분에 범고래는 다시 자신들의 고향인 바다로 되돌아 갔다. 칭찬이라는 빌미로 범고래의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의 EBS에서 '학교란 무엇인가-칭찬의 역효과'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칭찬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의 기억력을 평가하는 실험에서 '잘한다,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감독자가 밖으로 나가자 부정행위를 했지만, '노력했구나,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구나'와 같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커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소개한 현명한 칭찬 방법은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결과에 대한 칭찬은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지고 아이들 자신을 스스로 평가의 잣대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예쁘다'라는 칭찬은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으로 느껴져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캐럴 드웩 교수는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고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다음 사람들로부터 '쟤는 정말 천재인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열심히 하면 잘할 거야'라는 평가를 받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칭찬의 역효과'에 대해 연구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 박사 역시 '칭찬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칭찬 스티커' 따위의 외재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하여서도 한 번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쟤는 원래 신앙이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이게 말이 되는가?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데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원래 신앙이 좋은 데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에서 지적하듯이, 외적인 동기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오미에게서 배운다. 나오미는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직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른 척 돌아서지 않았다.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현실부정이 아니라, 현실직시이다. 현실직시 없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인 내적 동기는 절대 생기기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신앙이란 누군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다. 진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요즘은 다른 능력보다 인간력을 중요시 한다. ‘인간력이란 사람과 사귈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이 힘든가? 아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 교회생활에서 무엇이 힘든가? 내가 목회를 하면서 듣는 가장 많은 토로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사람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사람과 사귀는 능력을 인간력이라 한다면, 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은 영력이라고 한다. ‘인간력영력, 어떤 게 더 어려운가?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귀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더 어렵다. 훨씬.

 

나오미를 보라. 비통한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쳤다고 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쓴 맛을 다른 누구 때문에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쉬운가? 어떠한 사람이 자신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했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그 사람과 원수가 된다. 그런데,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안겨준 하나님을 원수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가 왜 베들레헴에 돌아왔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가장 사귀기 어려운 존재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해내는 사람은 그보다 쉬운 것을 문제 없이 잘 해내는 법이다. 하나님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갇혀 있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를 여시는 분이다.

 

가장 어려운 사귐의 대상인 하나님을 붙든 나오미와 룻, 별다른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어떠한 능력보다 영력(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에서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오미와 룻에게 열리는 미래를 보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들의 미래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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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5

잔치는 시작되었다(The feast has just begun)

(아가서(Song of Songs) 2:10-13)


한국(동양문화권)에서 결혼은 인륜지대사(major life event)’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개인이 감당하지 않고 집안이 감당한다. 그런데, 서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개인)이 감당한다.

In Korea (Asian culture), marriage is called 'major life event'. It mean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In the Asian culture, the marriage is not covered by the individual but the family. However, in the American cultures, the marriage is held by the married couple (individuals).

 

이것은 각 문화권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공동체가 감당하는 것이고, 서양문화권에서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다.

This reflects the ideas of each culture. In the Asian culture, the community carries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community than the individual. In the American culture, the individual cares for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individual than the community.

 

여기서 무엇이 더 낫다, 옳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일을 감당하느냐 보다, 그 일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It is pointless to ask 'what is better, right' her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t i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성경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 중간 어디쯤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온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한다고 판단하시고, 아담(사람)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다.

The Bible teaches the marriage like this. The Bible's teaching about marriage does not appear anywhere in the middle of the Bible. It is in Genesis, the beginning of the Bible. Genesis 2 tells us that after God created Adam(human), it is not good for him to live alone, and he made a helper for Adam(human).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다른 무엇에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드신다. 이것은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와(여자)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담(사람)에게서 왔다.

By the way, when God makes the helper suitable for Adam, he does not make it from anything else, but makes a helper for him by taking one of Adam's ribs. This is not a verse that says that a woman (Eve) is a subordinate to man (Adam). This tells us that Adam and Eve are essentially the same. Eve (woman) came not from another, but from Adam (human).

 

(사람)의 돕는 배필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를 아담 앞으로 이끌고, 아담이 그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아담은 그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라는 의미는 남자, 여자라고 부르는 성적인 구별 이전에 사람이라는 의미가 먼저 앞선다. 그 말은, 남자와 여자는 사람으로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God, who made the helper of Adam (man), leads him to Adam, and Adam makes the name of the helper. Adam calls it "a woman" in the sense of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 meaning of 'woman' means 'human'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men and women. That means man and woman are equal as human.

 

그 후에,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다( 3:20). 이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아담은 자신의 돕는 배필인 여자를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5).

After that, Adam names the woman Eve (Genesis 3:20). It means 'life'. What is this? Adam meant that he thought of the helper 'woman' as his own life. The Bible tells this story and says about marriage as follows.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y will become one flesh.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and they felt no shame”( 2:24-25).

 

 

그렇다. 남편와 아내는 부모를 떠나 결합한 한 가정이고 인격체이다. 이제 그들은 한 공간에서 벌거벗고 있어도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법이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Yes. A husband and wife are a family and a personality that leave their parents. Now they are naked in one space, but they are not ashamed of one another. Isn’t it? It is a shame if a person is naked. By the way, a husband is not ashamed of his nakedness in front of his wife and the same with the wife in front of her husband. It is very strange if husband and wife are ashamed of being naked.

 

우리 시대는 결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말씀)이다.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이다. 그러나, 이것을 공동체가 감당하느냐, 개인이 감당하느냐가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의 문제는 우리 인류에게 달려 있다.

Our time tends to think of marriage as an option. However, the Bible does not. Marriage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an order of God. It is indeed a major life event. Of course,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o obey God's command depends on our humanity.

 

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따라, 결혼하기로 결단한 줄로 믿는다.

Today, I believe that both of you are determined to marry to each other according to God's command (Word).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들은 모두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을 헤치는 법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 중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나는 이 법의 최고의 결과물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All the laws God has ordained enrich life. There is no law in God's law to harm life. In the Bible, the best law that God has ordained is the law of love. "Love one another!" I think that the best result of this law is "marriage." Marriage is the greatest fullness among the fullness of life. So marriage is called a feast.

생명의 충만함 중에서도 최고의 충만함이다. 그래서 결혼은 잔치라고 부른다.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치 때 아끼는 사람은 잔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결혼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랑을 왜 아끼나? 아낌 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끼리 사랑만큼은 탕진해도 된다.

What is the greatest feature of the feast? It does save nothing. The person who save things in the feast is blaspheming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married people should not save love more than anything else. It is strange that married couples save love one another. Why do you save love? You have to pour out love for one another. You can squander love for one another as you are married.

 

요즘 미국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 중 한 명인 팀 켈러 목사가 쓴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팀 켈러 목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prodigal’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There is a book <The Prodigal God> by the Rev. Tim Keller, one of the most famous pastors in the American church, There, Rev. Tim Keller analyzes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of Luke 15 and applies the word "prodigal" to God, calling God "The Prodigal God".

 

‘prodigal’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다.

'Prodigal' do not mean 'recklessly extravagant', but rather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It means 'having spent everything'. (The Prodigal God, p. 20). As you see in the so-called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n Luke 15, the father loves his little son and his great son like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and he 'has spent everything' in order to save them. So, God is 'the prodigal God'

 

결혼은 잔치다. 찬치에서는 무엇이든지 아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아껴서는 안 된다. 탕신랑이 되고, 탕신부가 되라.두 사람은 이제 한 몸이 된다. 두 사람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되는 사랑의 잔치에서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한대로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Marriage is a feast. You should not save in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you should not save love while married. Be a prodigal husband and be a prodigal wife. Both of you are now one body. Both of you have just begun the feast in the fence of family. At the beginning of the love feast, I bless that the lives of you two will be enriched as infinitely as God wants.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의 말씀처럼, 두 사람의 결혼, 이제 시작된 사랑의 잔치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가운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며, 비가 그치며, 그 삶 가운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열매가 익고 향기를 발하며, 그 입술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는 아낌없는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Through the marriage of you two, the feast of love that has just begun, as in the Song of Songs we read today, I bless that the winter is past, the rains are over and gone, flowers appear on your married life, the season of singing has come, the cooing of doves is heard in your land, the fig tree forms its earl fruit, and the blossoming vines spread their fragrance in your love.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보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의 은총을 빈다.

Whisper to each other like this. “Arise, come, my darling; my beautiful one, come with me.”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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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2

빛은 어둠을 이긴다 

(요한복음 8 12-20)


이스라엘에는 7대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가 있다. 유대인의 절기는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난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 있고, 오순절(칠칠절)은 곡식의 첫 수확과 관련 있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한 것을 기념하며 곡식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절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축제이다. 눈을 떠서 제대로 보면, 이 세상은 감사할 일 천지다. 불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늘 말씀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다.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셨고, 그곳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결을 펼치며 가르침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에고 에이미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오늘은 특별히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자기를 빛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초막절 축제 때 행하던 빛의 의식에 빗대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막절 축제 때 젊은 제사장은 사다리에 올라 여인의 뜰에 있던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 빛은 온 예루살렘을 비춘다는 것을 상징했다. 시편 27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대적자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현현하실 때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특별히, 이사야서 60 19-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성경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빛이라는 상징은 매우 강력한 상징이다. 요한복음 1장은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1 5절 말씀은 이렇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빛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을 통한 성경의 메시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 오기 전 겨울의 끝자락, 그러니까, 2003 2월 어느 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설악산 등산을 했다. 우리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마음 먹는 날은 대설주의보로 인해 흰 눈이 온 산을 덮었던 때였다. 산행금지가 풀린 시간은 오전 11시였고, 사촌형과 나는 계획대로 설악산을 올랐다. 오색 약수터 쪽 등산로를 이용하여, 죽을 고생을 하며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는데, 그때는 이미 시간이 오후 5 30분 경이었다. 너무 추워서, 정상에 5분도 못 머물러 있고, 곧바로 하산 했는데, 산을 내려오면서 그만 해가 지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은 그날 반달이 하늘에 떴다. 설악산 꼭대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비추는 반달의 빛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의 위력은 대단하다. 생명을 살린다.

 

위에서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도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에서 는 애굽을 의미하고, ‘은 바벨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질곡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이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힘 센 애굽에 붙었다, 더 힘 센 바벨론에 붙었다 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애굽바벨론을 빛으로 여기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고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빛이 되어 줄줄 알았던 애굽과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빛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켰다. , 그것은 참빛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빛이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슬픔의 날을 끝내실 수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요한복음 1 5절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람바노이다. 이 말은 붙잡다, 깨닫다, 이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 구절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어울릴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세상을 비추는 등불에 빗대어,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갈망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빛으로 오시는데, 빛으로 오신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언제나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 슬픔의 날이 물러가고, 기쁨의 날이 온다. 그 기쁨이 지금 이곳에 임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빛은 누구(무엇)인가? 애굽인가? 바벨론인가? 우리에게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인 것이 깨달아지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마음에 붙들고, 어둠을 이기며 살 것이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인 것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구원의 빛을 날마다 비추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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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4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마가복음 15:33-41


십자가 상에서의 칠언 (가상칠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들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27:46,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 마르다 ( 19:28)

6) 다 이루었다 (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23:46)

 

마가복음에는 십자가 상의 칠언 중, 4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만 나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외치고 죽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서 왔다.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만큼 말씀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얼마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내면화 과정에 들어서 있는가?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신음과 욕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시편 22편의 1, 2절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옛날에 짚신 장사를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자기가 만든 짚신이 왜 잘 팔리지 않는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됐다.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울며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내 짚신은 왜 잘 안 팔려요? 아버지 짚신과 내 짚신의 차이는 뭐에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이라고 한 마디만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를 고이 묻어 드린 뒤, 아버지가 남기신 한 마디 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아버지 짚신과 자기 짚신의 차이점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린 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짚신은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이었고, 아들의 짚신은 털이 삐쭉빼쭉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이후, 아들을 아버지가 만든 짚신처럼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을 만들어 내다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의 첫 번째 구절만 외치신 것은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하나님 앞에 아뢴 것과 똑같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한 구절, 또는 한 단어만 외쳐도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담기는 법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어가면서 짚신 잘 만드는 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시편 22편은 원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여호여와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19-21).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버리신 듯한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믿음과 찬송의 외침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구원의 죽음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를 본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간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사라고 한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놓여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한마디로,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구원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신 그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인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단순히 구원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의 깊은 차원을 만난다. 구원이라는 말이 세속적으로 바뀌면 번영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번영하기 위하여 아우성 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자체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한다. 구원은 순종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신적인 은혜이다.

 

스펄전 목사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 파운드를 모금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 “!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다. 뮬러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다.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다. “주여,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순종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것에서 구원의 은혜가 나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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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1

예배 - 주께 돌아옴

룻기 1

(룻기 1:1-14) 


5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세화하늘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나경화 선교사 초청 집회, ‘지금은 세화시대를 외치며 출전했던 북가주 지역 교회간 친선 탁구대회 (응원상), 브라이언 킴 초청 집회, 그리고 장윤식 목사 초청 부흥성회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았고, 세화의 미래를 보았다.

 

특별히 부흥성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부흥회 시작하는 날,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보 목사였으면,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부흥회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부흥회에만 집중했다.

 

이 세상에는 빛도 있지만, 어둠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자꾸 까먹는다. 도시의 불빛은 이 세상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도시의 불빛에 너무 취해 있으면 안 된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멀쩡히 주님 앞에 나와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연어와 같다. 세상과 같은 망망대해로 나갔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강 상류이지만,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돌아온다.

 

연어가 강 상류로 돌아가 그곳에서 알을 낳고 죽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다. 돌아가는 일은 모험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어가 위험을 떠안고 모험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깨달은 상태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향유하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쉴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즐비하다. 이런 노래가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이 하리 죄송해요 한 어느 마을에 멋진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 청했네 그가 널리 이웃더러 오라 했더니 그때 모든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14)

 

우리는 오늘 나오미의 삶의 여정을 본다. 룻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사시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인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무질서하고 혼탁한 시대, 삶의 터전이 매우 빈약한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국가로서의 어떠한 문화와 정치적 체계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에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

 

베들레헴은 집을 의미하는 베트와 떡을 의미하는 레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떡집이라는 뜻이다. 떡을 굽는 마을로서 베들레헴은 양식의 집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양식의 집을 떠나 모압 땅으로 거류하러 갔다. 거류한다는 히브리어의 구르라는 말인데, 이는 이방인, , 난민으로서 눌러 앉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2절에는 한 사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었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고,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엘리멜렉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삶에 시련이 닥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엄마의 이름과는 달리, 두 아들이 이름 말론과 기룐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자이고, 기룐은 폐결핵, 또는 멸망이라는 뜻이다.

 

이 두 아들의 이름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이 모압 땅에서 현실화 된다. 푸른 꿈을 안고 어렵게 결심한 이주인데,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다. 그리고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첫째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인데, 그 뜻은 목덜미라는 뜻이고, 둘째 며느리의 이름은 인데, ‘원기회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0년 후에 두 아들도 마저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모압 거류민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오늘 말씀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다. 돌봄과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양식의 집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거류민이 되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하러 간 곳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그들이 얻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오미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려고 하고 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라구르(거류하기 위해)7절의 라슈브(돌아오려고)가 대비되고 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나오미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민생활(거류민)을 하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아주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거류민으로 이곳에 살면서, 양식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류민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래서 한인이민자들은 교회를 다니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쉼과 우정과 회복의 장소이다. (이민자들의 교회는 종교집회 장소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물리적인(physical) 마음의 고향이다. 고향의 언어와 문화와 사람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민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주께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예배하지 않으면 움츠러들게 될거야. 그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여러분은 어떤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돌아와 있는가? 나오미가 들었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도 날마다 들리시길 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예배는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경험하는 것이고,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를 쓰고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더라도, 이겨내고 기를 쓰고 돌아오라.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굴복하지 말라.

 

왜냐하면, 양식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생명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예배는 그러한 신앙고백이 담긴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돌아옵니다.”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실한 신앙인이 된 데에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 록펠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

 

나는 지금 록펠러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 잘 드리면 록펠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자, , 주님께 돌아올 줄 아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에게 양식(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여러분의 귀에 들렸으면 좋겠다. 우리 서로 귀에 들리게 이렇게 말해보자. “예배 잘 드립시다! 주님께로 돌아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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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