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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7.17 사랑의 나눔
  3. 2017.07.17 안 되면 되게 하라 1
  4. 2017.07.01 기쁨에 놀라다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26. 16:43

미셔널 처치 (Missional Church)

(사도행전 1:8 / 벧전 2:9)

 

한인이민교회사는 크게 세 곳에서 비롯된다. 모두 구한말 일제시대와 관련된다. 첫째는 일본, 둘째는 중국, 셋째는 미국이다.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인교회가 생겼는데, 그들의 도쿄 2.8 독립선언이 한국 본토의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중국의 상하이와 북간도에 한국인 교회가 생겼고, 미국에서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교회가 생겼다.

 

어렵고 힘든 시절, 한인이민교회는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었고, 이민자들은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친교를 나누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고, 고국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으며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 흩어져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바울의 선교는 모두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향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지역 어디를 가든, 유대교 회당에 들러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후서도 디아스포라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다음 말씀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요즘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옛날만해도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일종의 사연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 정치적 환경 등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피해의식, 소외감, 좌절감 등이 존재했다. 성경에는 디아스포라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다. 대표적으로 구약에는 에스겔서가 있고, 신약에 나오는 서신서들을 대부분은 디아스포라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나그네 생활 속에 놀라운 하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라. 우선 디아스포라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선포를 들어보라.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보라.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나그네 되어 살아가는 것은 이 어려운 환경에서(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하늘의 놀라운 비밀(기이한 빛)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디아스포라 교회, 우리 이민교회가 살고 번성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복음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오늘은 7 10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나바호 인디언 선교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선교적 비전을 공유했으면 한다. (사진)

 

1) 가는 길 - Bastow에서 잤어야 하는데, 놓쳐버려 새벽 2시에 Motel 도착

2) Flagstaff에서 40분 더 들어간 곳, 주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있음

3) Gray Mountain Bible Church - 나바호인디언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

                             - 현재 미국 교회들 대부분 철수 (반감때문)

                             - 한인선교사들이 주로 선교 담당

                             - 40만명 중 1%가 기독교인 (4천명 정도)

4) 나바호 인디언들과의 만남 - 아이들 (자녀들을 많이 낳는 편)

                            - 모두 영어권 (나바호 언어는 더 이상 전수 안됨)

                            - 윈드토크라는 영화에 나오듯, 나바호 인디언의

                              언어 덕분에 2차대전 승리로 이끔(암호해독 불가)

-      장애아동 비율이 높음 (약물 복용 후유증, 근친 등)

-      나바호 인디언 대모 (97): 100에이커 기부(선교목적)

-      나바호 인디언 집 방문 사막 한 가운데 있음 / 띄엄띄엄 / 물과 전기 부족으로 고통 당함

-      물이 부족하여 말이 더위에 타 죽어 있는 장면

5) 선교센터 건축 중 - 3년 째 물과 전기 공급 안 되고 있는 중

                    - 연방정부에서 허가를 안 내줌

                    - 여러 가지 내부 사정(정치적 사정)이 있겠지만,

                      생활에 기본적인 물과 전기가 공급이 안 되어 고통 받음

 

강평회 하는 데, 함께 사역한 남자 집사님이 이러한 컴플레인을 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와서 애써서 선교를 하는 데, 이들에게는 전혀 감사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떠한 효과의 의미를 가지는 지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선교사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 “여러분들은 아주 짧게 왔다 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 지 잘 인식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나의 눈에는 선교활동를 통해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시라.”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회사를 가르치는 이덕주 교수가 쓴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데이비스라는 호주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호소하는 영국성공회 울프 선교사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그런데, 영국성공회의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빅토리아 주의 장로교회로 적을 옮겨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교인들과 주변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1889 10월 조선으로 선교를 온다.


그는 서울에서 다섯 달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한 뒤, 1890 3 14, 선교 목적지인 부산을 향한다. 그는 조선인 어학선생과 짐꾼을 대동하고, 수원과 공주를 거쳐 추풍령 고개를 넘어, 1 5백리를 걸어서, 스무 날에 걸쳐 부산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는 무리한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걸리고 폐렴까지 걸려 마지막 닷새 동안 아무 것도 못 먹는다. 그런 상태에서 데이비스는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게일 선교사의 집에 도착한다. 그때가 4 4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위독한 상황을 눈치채고 곧바로 일본인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다음 날 그만 죽고 만다.

 

도착하자 마자 죽을 선교 여행을 뭣 하러 가냐고, 말할 수도 있다. 도착하자 마자 죽은 데이비스가 무슨 선교의 결실을 맺은 게 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데이비스의 죽음의 소식이 그의 누나를 통해서 호주에 전해졌고, 그 소식은 호주장로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들은 그때부터 선교비를 모금했고, 호주장로교회는 적극적으로 조선 선교를 착수했으며, 결국 그 후로 1년 뒤, 매케이, 멘지스, 포셋, 페리 등으로 구성된 개척 선교단이 부산에 도착한다. 그렇게, 부산선교는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선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사명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네슬리 뉴비긴이라고,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 선교학자가 있다. 이분이 주창한 유명한 선교학적 용어가 있다. “Missio Dei”라는 말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하나님의 선교라고 번역한다. 이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은 네슬리 뉴비긴의 선교활동 경험에서 비롯됐다. 뉴비긴은 주로 동남아시아지역 즉,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을 선교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흔히, 선교지에 가면, 우리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선교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네슬리 뉴비긴은 말레이지아, 인도네이아 등지에서 자신들의 선교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서 선교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이 먼저 하고 계신 선교에 동참할 뿐이었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선교는 우리의 사명이지만,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이미 선교를 그곳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가장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미셔널 처치(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선교비 지출을 많이 하고, 선교지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선교를 많이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그곳에서 선교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나는 교회이다.

 

선교는 교회의 이벤트가 될 수 없다. 선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근거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 있지 못하면,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교회의 부흥은 다른 데서 오면 안 된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 그 자체이다. 우리 교회가 미셔널 처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교회가 교회되고,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서이다. 우리 모두, 미셔널 처치로 거듭나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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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7. 01:54

사랑의 나눔

(룻기 4:7-15)


몬터레이 수족관에서 가져온 사진 바닷새 위장에서 꺼낸 물건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저러한 쓰레기를 버리면서 그 누구도 나쁜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거 버리면 새가 먹겠지.. 낄낄”, 이런 생각하며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귀중한 생명을 빼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생각과 배려가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행동이 누군가(또는 무엇)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성경은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왜 성경은 그렇게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가? 왜냐하면, 사랑의 나눔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약탈이고, 자기주장이다. 그렇다 보니,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약탈하고 자기주장을 펼친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죄를 낳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약탈이나 자기주장을 넘어서는, 더불어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나눔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약탈이고 자기 주장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더불어 함께 나누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것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원에 들어가 소나무 한 그루를 뽑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깊은 절망과 고독 가운데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바로,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이든 두 가지를 거치게 되어 있다. 사랑의 나눔에는 나의 시간과 수고(노동력)가 들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정서(감정)가 들어간다. 사랑의 나눔에는 반드시 마음(Heart)’이 들어간다.

 

건강한 사람인지 아닌지, 건강한 교회인지 아닌지를 보려면, 사랑의 나눔을 어떻게 하는지 보면 안다. 건강하지 못한 존재는 무엇인가 채우려고만한다. 그러나, 반대로 건강한 존재는 무엇인가 나누려한다.

 

우리 교회에서 밀알 봉사도 하고, 홈리스 봉사도 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참으로 귀한 일들이다. 복지국가에 살다 보니, 이러한 봉사를 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도 아니다. 2년쯤 된 것 같은데, 어느 신문사에 이런 기고문을 낸 적이 있다. 복지국가에서의 사랑의 나눔이란 어떤 기관에 찾아가서 봉사하는 것도 사랑의 나눔이겠지만, 무엇보다,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것도 사랑의 나눔이라는 주장의 글이었다. 그 글을 잃고 많은 분들이 공감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한국의 복지는 아직까지 부족한 면이 많다. 일손이 부족해서 봉사자들의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곳이 많다. 미국으로 오기 전, 교회 청년들과 봉사자들을 데리고 한사랑마을이라는 곳으로 봉사를 정기적으로 갔다. 첫날 가서 있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사랑마을은 중복장애자들을 돌보는 기관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혼자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밥도 먹여줘야 하고, 목욕도 시켜줘야 하고, 대소변도 받아줘야 한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김동문.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가자마자 그 친구랑 친해졌는데, 화장실 쪽에서 헝아헝아부르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똥을 푸지게 싸 놓았다. 그 똥 다 치워주고, 씻겨주고, 밥도 먹여주었다.

 

사랑의 나눔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나눔을 멈추지 않고, 힘써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랑의 나눔이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가, ‘기업 무를 자였다. 남편이나 아들이 모두 죽은 여인네들은 그 당시 살아갈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라는 율법을 통해서 그들은 생명을 유지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기업 무를 자를 시행해야 할 당사자가 그것을 시행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시행하는 것을 본다. 절차를 지키며 신속하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인 기업 무를 자의 사랑의 나눔을 시행한다.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으로 인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은 자들은 룻과 나오미이다. 그러나,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룻기는 족보로 끝난다. 그 족보의 마지막을 보면 이렇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기 4:21-22).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가운데 결국 다윗 왕이 태어난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본다.


(예화) 

1880 년 여름 미국 메릴랜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고학생 젊은이가 있었다. 그렇게 온종일 방문판매를 다녔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는 온몸이 지칠대로 지쳤고 배도 고팠다. 하지만 주머니에는 다임(10센트) 동전 하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는 뭘 사먹을 수도 없었다. '다음 집에 가서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해야지.' 젊은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계십니까?"

현관 문을 두드리자 어여쁜 소녀가 나왔다.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이는 차마 배고프다는 말은 못 하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녀는 젊은이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았고, 큰 잔 가득 우유를 담아 왔다. 젊은이는 그 우유를 단숨에 마셨다. 그러자 온몸에서 새로운 힘이 나는듯 했다. "우유값으로 얼마를 주면 될까요?" 소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엄마는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 말에 큰 깨우침을 얻은 젊은이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학비 마련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젊은이는 그날 우유 한 잔의 배려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성인이 된 소녀는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도시의 병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서 큰 도시에서 전문의를 모셔와야만 했다. 그 의사의 이름은 하워드 켈리, 소녀에게 우유 한 잔을 얻어 마신 바로 그 젊은이였다. 켈리 박사는 환자를 보고 단번에 그 소녀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모든 정성과 의술을 동원해 그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성이 통했던 것인지 중병임에도 마침내 치료에 성공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여인은 퇴원을 앞두고 치료비 청구서를 받았다. 비용이 엄청나게 나올것이라 걱정하며 청구서 봉투를 뜯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우유 한 잔으로 모두 지불되었음." 이 하워드 켈리는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설립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실제로,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덕분에 룻을 통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께서 계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 교회에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의 나눔이 있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의 나눔을 풍성하게 해나가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그리스도(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고, 우리 교회에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의 나눔이 있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 이 찬양을 함께 부르자.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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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7. 01:47

안 되면 되게 하라

(룻기 3: 1-13)


나는 초등학교 때 보이스카웃트(Boy Scout)와 아람단(한국 청소년 연맹, Korea Youth Association) 단원이었다. 보이스카웃트는 미국에서 건너온 청소년 단체이지만, 아람단은 한국 자생 청소년 단체이다(초등학생은 아람단, 중학생은 누리단, 고등학생은 한별단으로 부른다). 4학년때는 보이스카웃트 단원이었지만, 5,6학년 때는 아람단 단원이었다.

 

6학년 때 아람단 행사 중 특전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포 쪽에 있는 제 3공수여단이었든데, 그곳에 도착해서 인상 깊었던 구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였다. 그 문구를 보고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되게 할 수 있을까? 요즘엔 한국에서 대학교를 가려면, 다음의 네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이 떠돈다. 첫째, 할아버지의 경제력, 둘째, 엄마의 정보력, 셋째, 동생의 희생, 넷째, 아빠의 무관심.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 한국에서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아빠의 무관심이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요건 중 하나라고 하니, 아내분들은 잘 명심하시라.)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지금,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 도전하는 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허하게 받아 들이라.’ 우리는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든지 도전해 보는 강인한 정신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즐비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나오미와 룻이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도록 도전하는 이야기이다. 나오미가 엄마라면, 룻은 딸(며느리이긴 하지만)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성공하려면 엄마의 정보력은 필수다. 그리고 자녀의 노력 또한 필수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룻은 이방 여인이라 베들레헴에서의 삶이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운 반면, ()엄마 나오미의 정보력은 장난이 아니다. 나오미는 그곳의 경제 돌아가는 일과 문화, 인간 관계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 그리고 룻은 () 엄마가 말씀하는 대로 순종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제 그들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일을 꾸민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1). 무슨 말인가? 룻에게 필요한 안식할 곳은 결혼을 말한다. 그 당시, 여인이 안식할 곳은 결혼하는 일 외에는 딱히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 여인이고 과부인 룻이 결혼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의 표현대로, 그들에게 결혼은 안 되는 일이었다.

 

대단한 정보력을 지닌 나오미는 룻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상세하게 알려준다. 무엇보다 작전 개시일은 타작마당이 끝나고 먹고 마시기를 다 한 날이다. , 추수하고 기분 좋은 날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지혜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해져 있을 때 어떠한 부탁이든지 들어주는 법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헤로디아도 헤롯의 기분을 좋게 만든 다음에 세례 요한의 목을 구했을 때, 그 목적을 이룬 것을 본다.

 

요즘은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인데, 소통의 능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자녀들은 잘 들으라. 엄마 아빠에게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조르지 말고, 엄마 아빠의 기분을 좋게 만든 후에 원하는 것을 제시하라. 그러면, 반드시 부모님은 여러분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나오미의 계획은 엄청 치밀하다. 보라.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3,4).

 

밀당이라는 말이 있다. 연애할 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밀고 당겨서 연애를 성공적으로 이끌 때 쓰는 전략을 말한다. 밀당이 여기에 정확하게 적용된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르기를 타작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보아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보아스는 당연히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룻이 안보이네. 어디에 있지? 이렇게 좋은 날, 안 보이네.’하면서 궁금증을 유발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확실하게 대시하는 것이다.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이게 보통 대담한 작전이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결혼은 커녕 그마저 어렵게 돌아온 베들레헴에서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다. 보아스가 어떻게 반응할 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도전에는 위험(Risk)이 따르는 법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면 안된다. 해가 쬐일 때 풀을 말려야 한다(Make hay while the sunshine).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밀어 붙여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한 러브 스토리를 본다. 8절에 보면, 보아스와 룻이라는 말 대신에, ‘한 남자()’한 여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한 남자와 한 여인의 거룩한 사랑 이야기는 한 밤 중에 누움누움사이에서 발생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누웠던 한 남자는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누구냐?’라는 한 남자의 질문에, 한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한국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은 표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국말 교재에 단골로 등장할 뿐 아니라,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이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나는 룻의 대답이 이효석 소설에 나오는 표현만큼이나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옷자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프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새끼를 보호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묘사할 때( 32:11), 하나님의 보호의 행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시편 17:8, 36:7, 57:1, 61:4, 63:7, 91:4) (생명의 삶 Plus, 룻기, 67).

 

그리고 룻기서 2 12절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의 말을 인용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룻의 말은 이제 보아스 당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라는 선언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본다. 나오미와 룻에게 불가능해 보이던 결혼이라는 문제가 이들의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도전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우리는 가슴 떨리면서 보게 된다.

 

이제, 나오미와 룻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의 시간이 왔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우리의 삶에는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그 문제들 앞에서 넋 놓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나오미와 룻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앞에 놓아두고,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이니 그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라며 넋 놓고 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은 그들의 도전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임재할 것을 믿었다.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한 룻에게 보아스가 한 첫 번째 말은 이것이다.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우리가 우리 삶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우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슨 최선을 다해서 어떠한 일을 감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을 들려 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 되는 일이 되는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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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 08:27

기쁨에 놀라다 (Surprised by Joy)

(요한복음 15:1-11)


성경의 어느 구절을 보면, 주일학교 때 불렀던 어린이 찬송가의 한 구절이 생각날 때가 많다. 오늘 말씀은 이 찬송가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의 생명의>라는 곡이다.

 

1) 예수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 /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시니 / 가지들아 열매를 맺지 않으면 / 아낌 없이 찍어서 던지시리라

2) 포도나무 가지는 우리들이니 / 살아 있는 원줄기 주님께 붙어 / 잎도 피고 꽃 피워 열매를 맺자 / 주렁주렁 소담한 포도 송이를

3) 사랑하는 가지야 내 안에 있어 / 무엇이나 원하면 이뤄 주리니 / 씩씩하게 자라고 높이 뻗어서 / 하늘 나라 열매를 많이 맺어라

 

C. S. 루이스라는 분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분이다. 이 분이 지은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은 얼마 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나니아 연대기>이다. 원래 소설 작가는 아니지만,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의 영향으로 기독교 변증을 위한 판타지 소설을 짓기도 했다. (톨킨에게 혹평을 받기도 했다.)

 

요즘 미국의 팀 켈러 목사를 21세기 미국의 C. S. 루이스라고 부르는 매체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별로 어울리는 별명은 아닌 것 같다. C. S. 루이스가 인정할지 잘 모르겠다. 팀 켈러 목사도 훌륭한 목회자인 것은 분명하나, C. S. 루이스에 견줄 만 한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선다.

 

C. S. 루이스가 쓴 <Surprised by Joy, 예기치 못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은 자신이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회심했는지에 대한 것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그가 기독교를 떠나 헤맨 이유를 기쁨의 상실 때문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결국 기쁨을 찾아서 기독교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쁨을 상실한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기쁨의 갈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그리고, 기쁨을 얻을 때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도 결국에는 기쁨을 얻기 위한 것 아니겠는가! 예배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는 것이다. 예배가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이에게 예배는 곤욕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루이스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비관적인 삶 때문이었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우울증세가 가족을 괴롭혔고, 기형적 관절병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기쁨을 잃었고, 신앙을 저버리게 되었다.

 

기쁨이 없다고,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이들은 더 간절하게 기쁨을 갈구한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기쁨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올바른 기쁨의 길을 가지 않고, 결국 쾌락의 길로 들어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쾌락은 뭔가 반짝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같으나, 결국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을 망가뜨린다. 일종의 늪과 같다. 빠지면 헤어 나오기 정말 힘들다. 쾌락은 그것 자체에 몰두하게 하고,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되게 한다. 돈의 쾌락에 빠진 이들은 돈이 우상이 된다.

 

그러나, 기쁨은 무엇인가 숭고한 것을 바라 보게 한다. 거기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미를 깨닫고 기쁨의 원천을 바라 보게 한다. 무엇인가에서 참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 기쁨은 이렇게 속삭인다. “난 네가 찾는 그것이 아니야. 난 그것을 상기시키는 존재일 뿐이야. , 보라고! 내가 무엇을 상기시키지?”

 

<예기치 못한 기쁨>에 대한 북리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루이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쁨을 추적했을 때, 기쁨은 그에게서 벗어나고 허무한 느낌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가 기쁨을 향한 집착을 놓으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품에서 루이스가 내려놓았던 삶의 기쁨과 소망과 평안까지도 선물로 주셨다.”(장경철 _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C. S. 루이스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나눠 주시는 상품 같은 게 아니다. 실재의 중심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능력과 아름다움의 거대한 분수이다. 그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물보라에 젖을 것이고,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메마른 상태에 머물 것이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어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C. S. 루이스의 경험과 설명은 오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이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인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기쁨을 찾아 헤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기쁨이 있으려면,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말이다.

 

혹시, 삶의 기쁨이 없어 사는 게 재미 없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곰곰이 돌아보시라. 지금 내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 있는가, 아니면 살짝 붙어 있는가, 아니면 거기서 떨어져 나와 있는가. 기쁨은 우리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리고 C. S. 루이스의 고백처럼 기쁨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기쁨 자체에 집착하거나, 기쁨을 찾아 헤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기쁨은 신기루이고, 기쁨은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쁨을 향한 욕심을 내려 놓고, 기쁨의 원천이시고, 기쁨의 수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포도나무이신 그분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거하면, 그분의 기쁨이 우리에게 수여 되어, 어느덧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쁨 충만한 삶 사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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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