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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 06:57

세화교회로 오세요!

(요한복음 1:43~49)

 

오늘 말씀은 이전 단락의 말씀과 쌍을 이루는 말씀이다. 이전 단락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심판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희생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양 앞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보면, 이 어린 양은 희생양, 속죄양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을 보면, 속죄로 쓰이는 어린 양은 아무 것이나 가져다 쓸 수 없다. ‘흠 없고 티가 없어야한다. 우리가 흔히 을 생각하면 순진하고 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양이 힘이 없어서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힘 없는 사람을 희생양삼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 양은 힘 없는 양이 아니라 온전하고 순전한 양, 즉 죄가 없는양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게 접근한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를 보고 예수님은 묻는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랬더니, 이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생뚱맞은 대화이다. 제자들이 질문한 어디 계시오니이까?”는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나누는 대화의 일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디 사세요?” “, ~ 프리몬트 살아요!” “한 번 와 보실래요?” 이것은 우리가 고대 유대인들의 대화방식을 알지 못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케익 사고 초 41개 달라고 했는데, 41개 초를 받은 이야기 문화가 달라서 벌어진 해프닝)

 

여기서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은 어디 사세요?’의 뜻이 아니라, ‘어떤 인격체인지를 묻는 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까? 그러면 와서 나와 함께 사귐을 가져보시오!”

 

안드레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인격체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대한 고백은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드러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렇다. 예수님의 존재는 구원자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이야기이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향 사람이다. 그들은 벳새다에 살았다. (여기서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베드로는 벳새다에 살다 가버나움으로 이사했던 것 같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랬더니,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우리는 이 말을 보고, 나다나엘이 굉장히 시니컬하고 재수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오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나다나엘은 굉장히 신실한 사람이다. 빌립이 애초부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운운하며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소개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이유가 있다. 나다나엘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토라를 공부하고 묵상한 사람이었다. 그 증거가 뒤에, 즉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드러난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도서관이 있어서 시원한 데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 토라(율법책, 창출레민신 또는 히브리바이블)도 매우 비싸서 아무나 구해서 볼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라를 공부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무화과 나무 아래가 소개되고 있다. (옛날에 연애하기 좋은 장소로 어디 있었는가? ‘물래방앗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도 실제로 물레방앗간에서 연애를 하셨단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평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 토라에 맞추어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던 것이고, 나다나엘은 평소에 자신이 공부한 것에 비추어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 즉 메시아와 나사렛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랬더니,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빌립의 제안에 나다나엘은 응하여, 그는 나사렛 예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나다나엘을 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이렇게 평가한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보고, 나다나엘은 묻는다. “나를 아시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예수님이 빌립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평가한 이유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다나엘은 비로소 이렇게 고백한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전도지와 전도용품이 도착했다. 전도지의 첫 문구는 세화교회로 오세요!”이다. 예수님이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위에서 요한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이런 뜻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하고 교회를 소개할 때, 그들은 똑같이 물을 것이다. “세화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럴 때 여러분은 세화교회(우리교회)’를 어떻게 소개하실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프리몬트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말할까? “프리몬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얼마 전 출간된 한국교회실태조사보고에 의하면, 노방전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00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노방전도에 의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 누가 전도를 할 때 전도가 가장 잘 될까?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이다. 오늘 말씀도 그렇지 않은가. 스승이, 친구가 예수님을 전할 때 관심을 가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사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소개하려면, 그 무엇에 대하여 내가 먼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교회를 소개하려면,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똑 같은 물건을 팔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파는 물건을 살까? 당연히, 확신을 가지고 물건을 파는 사람의 물건을 살 것이다. 자동차를 사러 갔는데, 자동차 딜러가, 자신이 파는 차의 특징과 기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다른 자동차 브랜드와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동차 파는 것에 대해서 확신도 없으면, 그 차를 사고 싶겠는가?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는 교회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전하기에 참 좋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두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화해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이름입니다. 세화에는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하셨다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가진 비전들은 물론 여느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교회는 하늘에서 뚝떨어진 괴상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비전을 갖느냐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오직 사랑(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리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교회의 존재이유이고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배우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배우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세대 간에 소통합니다.”

 

우리는 친교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상실한 문화 속에서, 인간성을 왜곡하는 장벽들과 맞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우리는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거스틴의 명언이다. 이 어거스틴의 명언은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것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산다. 나는 사실, 목회하면서 어떠한 일을 하기보다, ‘사랑하려고한다. 어떤 일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은 오히려 어렵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일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실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어야 한다. 교회 와서 어떤 일을 하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 전념해 보라. 함께 예배 드리는 동료 교우를 사랑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그러면, 우리교회는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분명히 될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교회가 틀림없이 될 것이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요, 이것이 우리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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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