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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9.23 나는 일한다 2
  3. 2017.09.14 잃어버린 질문
  4. 2017.09.08 성령, 혹은 성령처럼
  5. 2017.09.07 도전과 응전 1
  6. 2017.09.01 자유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8. 17:43

노동의 의미 

(데살로니가후서 3:6-15)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매우 악용되어 온 구절이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권력자가 피권력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가령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사회는 노예들에게 이러한 성경의 구절을 들이대며, 그들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만 뚝 떼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더럽히는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영국의 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20세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이력은 매우 다채롭다. 특별히 이 사람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가지 공헌한 바가 커서 1950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도교수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인류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저서가 많으나(<수학논리> 화이트헤드와 공저), 그 중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인지, 특별히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그 중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는 부분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좋은 세계는 지식, 온정, 용기가 필요하지, 과거에 대한 애석한 동경이나 아주 오래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It is partly the terror of the unknown and partly, as I have said, the wish to feel that you have a kind of elder brother who will stand by you in all your troubles and disputes.... 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it does not need a regretful hankering after the past or a fettering of the free intelligence by the words uttered long ago by ignorant men

 

한 사람이 어떠한 신념을 가지기까지는 다양한 영향이 미치지만, 그가 무신론자로 자신을 지시하기까지 그의 삶 속에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C. S. 루이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어떻게 다른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다. 그냥 책 제목만 보면, 그가 게으름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평가절하 되어 있는 게으름과 평가절상 되어 있는 노동의 가치를 뒤집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노동은 선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노동은 미덕이고, 게으름은 악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러한 관념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다. 그 책에서 러셀은 인간에게 삶을 향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대체로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4시간의 노동 이후의 남는 여가의 삶을 게으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가 세상에 기여한 부분이 노동 해방이라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노동자 해방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았다. 노동자는 여가(게으름)’를 꿈 꿀 수 없었고, ‘여가는 자본가(권력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이후에,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에 사회는 노동자들(일반 시민들)에게 여가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여가를 사장님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가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버트런드 러셀이 경험한 20세기의 세상보다(그는 1872년에태어나, 1970년에 죽는다.) 훨씬 레디컬한 세상이 되었다. 웬만한 노동은 점점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보다 로봇의 노동력이 점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사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가뜩이나 로봇에게 노동의 자리를 빼앗겨 가는 인류에게 이 구절은 로봇보다 못한 인간은 나가 죽어라!’는 말처럼 들린다.

 

성경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지침과 같은 의미로 보면 안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이것은 굳이 성경을 안 읽어도 자기계발서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스티븐 코비의 불후의 명작,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한 때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일본작가가 주장했던 것 같은데 작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라는 책 같은 것을 보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사항은 위의 말 그대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라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라는 말씀 등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발생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극단적인 신학을 견지한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곧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세상이 끝날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일하노!’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생겼고, 또 다른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선행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 말미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살았다. 이것이 악용된 것이다. 공동체 내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악용하여 악한 게으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게으름은 현대 교회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특별히 소위 대형교회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대형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게으름이 있다. 교회에 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그냥 교회 문턱만 드나들어도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온갖 영적인 상품들을 힘들이지 않고 혜택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현대판 게으름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게으름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서 온 것이든, 교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를 악용하는 것이든, 그 어떠한 것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이미 구원한 구원의 완성자인가, 아니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러 올 미래의 구원자인가?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지, 단순한 시간의 종말이 아니다. 재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이다.

 

종교개혁사 학자인 카터 린드버그는 루터의 신학을 진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이해한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쏟았던 힘과 시간을 이제는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도록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다”(유럽의 종교개혁, 203).

 

우리가 왜 수고해야 하는가? 왜 일하기 실어하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토대이다.

 

여전히 구원이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삶의 목표가 되어 그것만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에 현재의 삶을 도외시하며 게으름을 피우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삶의 토대로 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은 구원의 완성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음의 빛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토대로 한 노동은 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노동이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열매, 또는 노동의 질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정말로 자신의 삶의 토대라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오늘도 게으르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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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3. 07:35

나는 일한다

(요한복음 5:9b~18)


데카르트의 대표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명제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리고 후일, <철학원리>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제시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ubito, ergo 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인식론 문제)

 

나는 존재하는 존재일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질문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의심을 통해, 결국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자기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은혜의 집) 연못에 날마다 기거하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고자 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고,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여 신성모독(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다)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한 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맞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17).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명제를 만들어 보면 이렇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한 근거는 바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를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버지(하나님)가 일하신 것처럼 일 한 것을 본받아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일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실행했던 성경의 인물은 단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일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진다.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믿음을 가지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사랑하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하게 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다. 믿음을 가지니까, 해야 할 일이 보였다. 38년이나 된 병자를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병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수고를 아까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될 줄 믿었기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의 길(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가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 그리스도로, 사도로, 교회로 택하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 택하심(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

 

내가 33살에 집사람과 단 둘이서 컬럼버스 조지아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이 질문의 뉘앙스는 이런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이런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와서 목회를 할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 저희는 보내심(파송) 받아서 왔습니다!” 보내심(파송) 받아 온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고 그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깊게 체험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는 부르심(파송) 받아 이곳에 왔다고 믿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교회 생각 뿐이다. 내 목표는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리고 물리적으로(Physically) 안전하고 평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더위가 좀 가시고, 기분 좋은 가을 날씨가 찾아 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목회자로서 (도의적으로) 많이 죄송하고 속상했다. 이상하게 주일마다 폭염에 시달렸다. (그래서 날씨가 마귀인가 했다. 조지아에서 102개월 동안 목회하며, 주일에 비가 온 적은 기억에 세 네 번 밖에 없었다. 그곳은 비가 자주 온다.)

 

주일에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예배드리며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날씨가 더운데다 에어컨이 없어서 예배 드리며 더위와 소음(문을 열어 놓다보니)과 싸우며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헌금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냥 내 생각에 우버를 해서 돈을 좀 벌까?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좀 해 볼까?’ 하며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젠 교회에 바칠 금도 없는데…’ 우리 애들 돌반지 받은 거 이미 컬럼버스교회 건축할 때 다 드렸다.

 

주님께서는 목사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응답해 주셨다. 그게 바로 뉴비전 청년부 수련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제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돈을 벌어 왔다! (기도 응답이 너무 기뻐서, 사진 찍어놨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뮬러는 400명의 고아와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앞에 도착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식으로 그는 평생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조지 뮬러가 따로 있나?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믿음이 없고, 사용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조지 뮬러가 될 수 있다!

 

예배는 단순히 우리가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해산하는 모임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예배로 부르심을 받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예배의 구성이 그렇다. 예배의 부르심 찬양 말씀 파송

 

파송 받은 자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의 마음 가짐은 같을 수 없다. 여러분이 하는 직장의 일, 교회의 선교사역, 그리고,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하는 확장된 사역(어머니학교, 빛과소금중창단, 히엘, 독서모임)은 모두 파송 받아 하는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해서, 우리 공동체의 Spiritual 한 부분과 physical 한 부분을 조금씩 reformation해 나가고 development 해 나가자. 급하지 않게, 조금씩,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

 

중요한 것은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고 파송 받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는 말씀처럼, 주님께 보냄을 받지 않고 하는 사역은 모두 무면허 사역이다. 그런 사역은 성령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자기의 의만 드러날 뿐, 자기의 의는 죄의 냄새만 나게 한다.

 

돈을 내지 말라. 교회는 돈 내는 곳이 아니다. 믿음을 드리는 곳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 ‘내가 돈을 드렸는데, 시간을 드렸는데, 헌신을 드렸는데, 왜 나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러면서 시험에 든다. 믿음을 드려야지, , 시간, 헌신을 드리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믿음의 일이고, 사랑의 수고이고, 소망의 인내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어떻게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믿음의 일,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을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와 세상에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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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4. 14:53

잃어버린 질문

(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기록시기가 앞서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책이라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게다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고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룬 일대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대개 기원전 50여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대략 20년 정도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관심사가 당연하다라는 말을 썼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봐서 알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8군데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1)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 계시록 1 7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3) 베드로후서 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4) 야고보서 5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 히브리서 9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6) 골로새서 3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7) 사도행전 1 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8) 마태복음 26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믿었던 성도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던져진 심각한 도전이었다. 첫째, 재림에 대한 믿음에 도전이 왔고, 둘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신앙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사도 바울에게 질문했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재림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탱해준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망 가운데 그들은 재림을 기다리며 세상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이 한 명씩 죽어갔다. 당연히 믿음이 흔들리고, 소망이 수그러들어갔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던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라는 질문은 이제 현대기독교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질문이 되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 때문에 현대기독교가 점점 소망과 긴장을 상실한 채 죽어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림을 질문하면, 사이비 집단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하기야, 워낙 사이비 집단들이 재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흐려 놓은 면이 많다.

 

초대교회 전통에 부활절 전야제(Easter Vigil)라는 것이 있다. 개신교는 예전과 의식이 많이 약해서 교회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부분은 반성하면서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교파에서는 아직도 부활절 전야제를 지킨다.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있는 캐논채플에서 열렸던 천주교의 부활절 전야제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배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특별히 화려한 포퍼먼스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읽고, 독창 또는 중창의 찬양이 이어졌다. 때로는 함께 부르기도 했다. 3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진지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3시간 동안의 예배를 마친 뒤, 세례(세례성사)자들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세례반에 모여 세례 받은 이를 축하하고 환영하고 축복했다. 참으로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림이 밤에 있을 것이고, 특히 부활절 전야에 주님이 오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절 전야에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온 것인데, 기록은 보면 이렇다. “메시아는 애굽에서 유월절을 축하할 때 멸망시키는 자가 그들 위에 지나간 것처럼, 한밤중에 오실 것이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철야제의 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정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Jerome on Matt. 25:6: 생명의 삶 Plus에서 인용).

 

이러한 전통은 살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절대로 지키기 어려운 전통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거룩한 전통을 회복해 가는데 힘 쓰면 좋겠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이렇다. “알 수 없다.” 이 대답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대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주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은유를 들어 말한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이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날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구약에서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의 날을 의미한다(1:15, 2:12, 30:7, 13:5, 5:18). ‘주의 날이 임하면 믿는 자(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자(불의한 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춘향전에 많이 비유한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몽룡, 그의 사랑하는 여인 춘향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날이지만, 포악을 일삼은 변사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인 것과 같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에서 평안과 안전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로마의 정치적 슬로건은 얼마 가지 못했다. 5세기경 서고트인들(게르만족)에 의해서 로마는 점령당하여 불타고 만다. 그때, 로마가 이 땅의 천년왕국(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꿈꾸고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도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집필한 책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다.

 

재림은 이렇게, ‘도적같이’, 그리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방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갑작스럽게 온다. 이것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의 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메타포는 빛과 어둠이다.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고, 도둑은 밤에 온다. 6절에 나오는 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의 카쓰유데인이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를 가리킨다. 단순히 도덕적 해이라기보다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세 가지 덕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 세 가지 덕은 믿음의 일’, ‘사랑의 역사’, ‘소망의 인내이다(13).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정신차리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산다. 여기서 정신 차리다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밤에 깨어 보초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군대용어를 빌어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경심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호심경투구는 로마 군대의 전투 장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여기에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흐물흐물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며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벗어 놓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위하여,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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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8. 07:17

성령, 혹은 성령처럼

(갈라디아서 5:16-26)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제기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인가?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보자.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는가?” 받았으면 왜 받았고, 못 받았으면, 왜 못 받았는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신앙고백)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못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율법을 착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가시적이고, 매력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계 수준이 높은 이들은 남들보다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교만해진다. 일례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 기도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 있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잉여의 재산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금식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먹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반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생활이 궁핍했고, 금식 하나 안 하나, 평소에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금식의 의미가 없을 뿐더러, 금식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죄를 짓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 내 던져져 있었다.

 

믿음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상황에서 바르게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을 뛰어 넘는 순종이고 영과의 일치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믿음을 가지면 성령을 받는다. 이 말은 이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영의 인도대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36~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이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은 어디에 매이지 않는다. 영은 자유롭다. 영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영은 생명력이고, 영은 그 어느 것도 잡아 둘 수 없으며, 영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아브라함이 딱 그렇다. 그는 믿음을 가졌다. 믿음을 가졌더니, 그에게 성령이 왔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그는 활발했고(100세에 아이를 가질 정도로), 강인했고,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할 줄 알았고, 그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일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한 사건이다.

 

율법은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서만 움직이지만, 믿음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도 감행한다. , 모험을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난 일이고, 모험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한계 상황에만 갇혀 율법적으로 행했다면, 그는 결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잘 행한다.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을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게 된 성령에 따라 사는 법은 잘 모른다. 우리는 대개, 갈리디아 교회 공동체에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데선수다.

 

믿음이란, 욕구의 충족 기대가 아니라(~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 좁은 문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 그 문을 통과하려 들 것이다. (이제 곧 폐기되는 사법시험에 그 동안 수많은 젊은 이들이 매달렸다. 사법시험은 그야말로 좁은 길’, ‘좁은 문이었다. 그런데, 왜 젊은 이들이 거기에 젊음을 바치는 것일까? 그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면, 영광스러운 삶이 열릴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좁은 길, 좁은 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라는 노역의 시궁창에 빠지고, 육체의 일이라는 탐닉의 늪빠진다. 노역과 탐닉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상하게 할 뿐이다.

 

14. 오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체의 일을 통해 탐닉의 늪에 빠지고 있는지 우리는 조금만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탐닉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육체의 일은 모두 그들을 홀리는 어떠한 영(spirit)과 관련이 있다. , 그들(이방인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이 음행을 하는 이유, 원수 맺는 이유,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이유, 술 취하는 이유 등,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의 뒤에는 그들을 움직이는 어떠한 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탐닉의 늪에 빠지게 하는, 그래서 위와 같은 육체의 일을 하게 하는 영과를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산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처럼, 모든 한계를 뛰어 넘는 생명력과 강인함과 모험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즉 성령처럼 사는 인생만큼 멋진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소망을 담아 를 하나 지었다. ‘선재(仙在)’ – 신선 선, 있을 재. 신선처럼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호가 세 개 있다. 희락당, 사현, 그리고 선재. 그 중 선재는 성령을 가슴에 품은 종말론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나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이 담긴 호이다.

 

성령, 혹은 성령처럼’,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성령과 일치하여, 그게 힘들면 성령을 흉내라도 내는 삶, 그런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받은 성령,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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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7. 07:49

도전과 응전

(본문: 1:6-14, 2:1-4)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난리가 났다.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본다. 1994년 클린턴 정부 때, 북한 선제공격 시나리오가 북한에 급히 날아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멈춰졌지만, 그때만해도 북한의 핵 무기는 초기 실험단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제는 최악의 위기까지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이 만난, 최고의 도전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도전과 응전이다.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다. 토인비 - 그는 문명을 발생·성장·쇠퇴·해체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로 파악하고, 이러한 문명이도전에 대한응전으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이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다수의 문명들을 비교·분석하는 데 환경보다는 주체적 대응을 중시했다(김호기, 세상을 흔든 사상 70년, 경향신문). 문명의 발생에서 환경이 중요하냐, 주체적 대응이 중요하냐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있다. “맹모삼천지교” – 맹자의 엄마가 맹자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성어다. (묘지 시장 서당) 환경도 중요하고, 주체적 대응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도전이 다가왔을 때 그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response)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도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 그러는 사이에 도전에 응전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난다. 우리 교회에 다가왔던 도전들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롭게 잘 응전하면서 새로워진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다.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에 다가온 도전을 그들이 어떻게 응전하여 극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의 큰 도전, 주님이 승천하셨다. 승천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하늘로 들려 올려지셨다는 뜻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주님이 자신들 곁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큰 도전이다. 하나님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자식들에게 다가온 도전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큰 도전이었다.

 

이들은 이 큰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의 간구를 통해서 극복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면, 눈에 보이는 주님은 안 계시지만, 성령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에게 다가온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간다.

1) 가룟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 선출 - 뭔가 잘못했을 때, 죄라는 도전이 왔을 때, 회개라는 응전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러질 못했다. 12명의 사도 중 한 명이 빠진 도전을 초대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한다.

2) 경제적 어려움이 왔을 때, 나눔이라는 응전을 통해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물건을 통용했다.)

 

초대교회가 도전이 올 때 마다 어떻게 응전했는지 아는 일은 우리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굉장한 영감을 준다. 그들은 도전이 왔을 때마다, 이렇게 했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갔을 때, 초대교회에는 또다른 엄청난 도전이 왔다. 그때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신앙의 사유화이다.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전락한 데는 경제사회적 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때문에 생긴 일이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큰 요점은 사유재산의 강화이다. 개개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시장에서 구입하여 자기의 사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 있는 우리들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앙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도 사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굉장히 크다.

 

그렇다 보니, 삶의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도전이 올 때, 그 문제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크다. ,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역량으로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려고 한다. 그러한 요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허무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교회 와서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도전에 응전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문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필요에 의해서 찾은 종교시설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삶에 도전이 발생했을 때, 성령의 간구하심을 통해서 응전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결코 개인이 사유재산 갖듯, 백화점에서 물건 사듯 그렇게 받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할 때, 기도할 때’, 교회 공동체 위에 내리는 것이다. 시장 경제 체제에 길들여진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놓치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떨어뜨리는 것, 이것이 현대 기독교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에 올바르게 응전해야 한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의 삶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여러분의 개인의 신앙의 역량으로만 해결하려 들지 말라. 도전이 다가올 때, 교회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라. 도대체 여러분에게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교우들은 어떤 의미인가? 같은 종교시설을 쓰는 타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지체인가?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베스킨라빈스 31’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배는 골라서 먹는 상품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는 공동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보내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우리의 삶에 다가온 도전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응전하며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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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 11:27

자유

(갈라디아서 5:1-12)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고대 중국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그 절에 용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그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점정'은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화룡점정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는 순간,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자유는 생명의 최고 가치이다. 자유가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반대로, 생명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은 최고의 죄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를 스스로 박차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성경은 생명과 자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불과 두 장 뒤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과 자유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죽음을 택하는 인간의 의지가 교차되어 나오는 이야기이다”(유진 피터슨, <자유>, 2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6). 우리는 오늘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 거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네가반드시 죽으리라”( 2:17). 죽음은 어떠한 실체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현실에 대한 충만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너무 죄와 죽음에 절어 있다 보니까, 생명과 자유를 얻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 이 상황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 후에 출소한 모건 프리먼이 한 독백과 같다. “이제 허락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또한 이 상황은 오랜 세월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했지만, 상황이 불편해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노예 근성을 못 벗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자유를 얻었음에도 자유를 누리며 살 줄 몰라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하시고, 복을 주셨다. 이제 그들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을 누리면서, 믿음으로 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덧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잃어버리고, 애굽이 부과한 일을 통해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과 국을 받아 먹으며 산다.

 

이제 그들은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살지 않고, 애굽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믿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고기국과 밥을 얻어 먹으려고 그들이 기획하고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산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서신이라 불린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만 봐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구원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엇인가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선물은 자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꾸 죽음을 택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구원) 때문이지, 우리의 의지나 마음가짐이나 정치적 행동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다”(유진 피터슨, <자유>, 29).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건지다(exaireo)’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디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의미한다”(유진 피터슨, 33). 건지심근본적인 건지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세계와 예정된 구원으로부터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구속이다”(유진 피터슨 33).

 

하나님의 이 건지시는 은혜 (구원)’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생명이나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 이전에는 먼저 하나님의 건지시는 은혜가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일 할 때도, 차를 타고 어디 갈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잠을 잘 때도그래서 우리는 매순 간 그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는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자꾸 보장된 안전과 바꾸려 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그랬다. 그들에게 위협이 된 이단사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의 요구였다. 쉽게 얘기해서, 구원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단사설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복음을 버리고 할례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굳건하게 서라라고 한다. 우리는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다. ‘보상이라는 제도에 절어 있는 인간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 즉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또는 기쁘게 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자유이다. 그렇지 않은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체가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구원에 볼모 잡힌 노예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단사설에 대하여 강력하게 규탄을 한다. 우리가 순화된 언어와 순화된 감정으로 읽어서 그렇지 사도바울의 원래 표현은 매우 거칠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이것은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갈라디아는 이교도들의 지역이다. 그곳에는 퀘벨레-아티스라는 종교의식과 거세를 한 사제들이 활동을 왕성한 했다. 위의 구절은 이런 뜻이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성기)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키는 일에 이렇게 단호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굳건하게 지키며살고 있는가? 우리가 얻는 자유는 공짜 즉 은혜로 받은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피 값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재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광채를 발산하고,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사유재산을 굳건하게 지키는 데는 천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사도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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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