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과 기독교

 

10 31, 시월의 마지막 밤, 학창시절 이 날은 대개 문학의 밤을 했다. (물론 반드시 10 31일은 아니었으나, 그 즈음, 토요일이었다.)

 

10 3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 전야제가 있는 날이다. 이 풍습은 캘트 족이 지키던 할로윈을 통해 발전된 기독교의 축제일이다. '할로윈(Halloween)'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이브'라는 의미이다. (켈트어로 Hallow는 성인(Saints)이고 여기에 'eve' 붙어 'Halloween'이 된 것이다.)

 

할로윈에는 원래부터 귀신 숭배의 개념이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산자와 죽은 자의 교통(communication)을 말하는 신학이 있는데, 그러한 신학과 캘트 족이 지키던 샴하인(samhain)의 개념이 맞아 이것이 기독교화(할로윈)된 것이다.

 

할로윈 문화가 발달된 미국에서는 할로윈 데이에 교회에서 따로 모여 '할렐루야 데이' 'Saint Night' 같은 행사를 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할로윈 파티를 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할로윈 데이에 따로 모여 교회 행사를 치르는 목적은 세상의 할로윈 파티가에 귀신 분장을 하고 귀신을 숭배하는 요소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원래 할로윈을 기독교의 축제일로 만든 취지를 잘못 알아서 일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할로윈에 '영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 문화의 배경을 숙고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할로윈이 미국 사회에서 번성한 이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번성하는 이유는 순전히 '시장' 때문이다. 미국에서 할로윈 데이로 인해 발생되는 경제 효과는 10조원에 이른다. 그야말로 대목이다. 할로윈 데이가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좋은 것은 시장이지, 귀신이 아니다.

 

현대 교회가 싸워할 대상은 할로윈 데이의 귀신이 아니라, ''이 중심이 되어버린 물신숭배이다. 세상에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이 '귀신을 숭배하는 행위'라는 입장에서 교회의 행사를 따로 마련하는 교회는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교회의 행사는 불순한 영과의 싸움보다 '(시장자본주의)'과의 싸움을 지향해야 한다.

 

할로윈에 하는 교회의 행사는 세상에서 하는 할로윈 파티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지,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시장과 자본에 뿌리까지 물든 세상, 그리고 은근슬쩍 그 풍경에 자기를 밀어 넣은 교회가 그것에 얼마큼이나 저항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럴바에야, 교회에서 따로 행사를 갖기 보다, 할로윈 축제에 기괴한 분장을 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그 날이 만성절(All Saints Day)의 전야제인만큼, 기독교인은 기독교 역사의 기념할만한 성인(Saints)으로 분장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어떨런지.

 

그러한 시도는 시월의 마지막 밤에 교회 공간에서 하던 문학의 밤을 더 넓은 공간인 '세상'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31. 04:55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Prima schola alba est)

(마태복음 11:28-30)

종교개혁500주년 기념 예배

                       

함께 경청한 클래식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 5 <Reformation>이다. 이틀 뒤, 10 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개신교 내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느라, 각 교단이 나름대로 바쁘다. 멘델스존은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곡을 만들었는데, 프랑스의 7월 혁명과 가톨릭 진영의 극심한 반대로 종교개혁기념일을 지키지 못하여 축제에 사용하지 못했다.

 

이 곡의 테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서 가져왔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585장이 그것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찬송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를 모르면, 이단아가 되기 쉽다.)

 

멘델스존의 풀 네임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Felix Mendelssohn Bartholdy, 3 February 1809 – 4 November 1847, 38살에 요절)이다. 우리는 흔히 줄여서 멘델스존이라고 부른다. 멘델스존은 유대계 독일인(Jewish Germany)이다. 그의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교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유명한 철학자로, 그 당시 이매뉴엘 칸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 당시 유명한 은행장(현재 도이치방크의 전신, 히틀러 시절 빼앗김)이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랐다.

 

우리가 알다시피, 독일은 종교개혁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개신교(Protestants)가 발달된 곳이다. 그래서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아들 펠릭스의 앞날을 위하여,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다. 그래서 그는 멘델스존 위에 Bartholdy라는 성을 붙인다. 이것은 그의 가문이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고 개신교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패밀리 네임(Family Name)이었다.

 

유대인인 멘델스존이 종교개혁 300주년을 맞아 축제 때 연주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이라는 심포니를 작곡한 이면에는 그러한 스토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멘델스존의 <종교개혁> 심포니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무엇인가, 스토리를 알면 마음이 짠한 법이다.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알아야, 이해도 하는 법이다.)

 

멘델스존은 이름도 개신교 식으로 바꾸고, 개신교 종교개혁을 기념하며, 자신이 개신교인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살았다. 누구보다도 독일인이었고, 누구보다도 개신교인이었던 멘델스존,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쳤을 때 멘델스존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히틀러는 멘델스존보다 4년 늦게 태어난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를 사랑했다. 그는 바그너야 말로 독일인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바그너의 음악을 우상화시켰고,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마구마구 짓밟았다. 히틀러는 박물관에 보관된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고,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멘델스존을 기념해서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철거시켰다. 한 사람의 미치광이 때문에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바그너는 생전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도망 다녔고, 멘델스존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추앙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좋은 배경을 바탕으로 빛을 못 보고 있던 수많은 음악가들을 발굴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이 바흐와 쇼팽이다. 멘델스존의 노력이 없었다면 바흐는 우리가 현재 인정하듯음악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쇼팽은 음악계 주변을 전전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지 모른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노력 덕분에 바흐와 쇼팽은 지금 우리에게 최고의 음악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운명은 참 짓궂다. (나는 운명이라는 말보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하나님은 참으로 짓궂으시다.) 왜냐하면, 인간사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결혼식에 히틀러에 의해 명암이 갈렸던 바그너와 멘델스존을 만나게 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결혼식 때 전통적으로, 두 곡의 결혼행진곡이 연주되는데, 신부입장 할 때 연주되는 곡은 바그너의 곡이고, 신랑신부 퇴장 때 연주되는 곡은 멘델스존의 곡이다. 바그너의 곡은 그의 오페라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배합장곡이고, 멘델스존의 곡은 그가 17세에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중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곡이다.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 근거가 되었던 성경구절은 로마서 1 17절의 말씀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종교개혁 당시의 중세 유럽의 사회적 상황을 몇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그 당시는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그들을 지배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망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 나는 구원받았다. 고로 존재한다.)

 

루터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의 의였다. 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 루터(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다가서려고 엄청난 종교적 짐을 졌다. 일례로, 고해성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 했고,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난 지은 죄를 고해하기 위하여 다시 고해성사실로 향하는 등, 의로움을 인정 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고행(금식을 밥 먹듯이 했다)을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만 더 드러날 뿐이었다. 루터는 매일 좌절했다. 그러던 중,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 이 구절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게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의를 믿으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구나!’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만약, 루터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직까지도 종교적 짐을 지우느라 헛된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루터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구원의 길에 대한 또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28-30).

 

오늘 설교 제목은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이다. 이것은 라틴어인데, 우리 나라 말로 옮기면,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첫 수업부터 빡빡하게 하는 선생님이 제일 싫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며 첫 수업을 맞는데, 첫 수업부터 빡빡하게 하면 수업에 대한 부담이 엄청나다. 그런데, 긴장하고 첫 수업에 들어 갔는데, 과목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한 뒤,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순간 마음 속에 평안이 찾아 온다.

 

긴장하고 들어갔는데, ‘휴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뜻밖에 잉여의 시간이 생긴다. 우리는 잉여의 시간이 생겼을 때 무엇을 하는가? 오랜만에 친구(부모님)에게 전화도 하고, 시장에도 가 보고, 길을 가다 껌을 파는 할머니의 껌도 하나 사드리고, 풀 밭에 누워 봄날(가을날)의 기운도 느껴보고, 이렇지 않을까?

 

극빈 3

ㅡ 저 들판에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귀 떨어진 밥그릇 하나 들고

빛을 걸식하였네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매미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배 속의 아가처럼 귀도 눈도 새로이 열렸네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

 

구원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중세에는 지나가는 걸인에게 반드시 동정을 베풀었는데, 지나가는 걸인에게 동정을 베푼 것이 그들에게 의가 되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가산점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전문 거지(homless)’ 그룹도 등장했다. 그 전문 거지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들이 부자의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들은 걸인들의 존재를 고마워했다. 걸인들이 있어 자신들의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되 안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잉여의 시간이 생기면, 우리는 마음을 풀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첫 수업은 휴강이라는 데 바보처럼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첫 수업을 휴강했다고 선생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바보거나 인생을 잘못 사는 거다. 잉여의 시간이 생기면, 그것에 감사하며 그 시간을 보람차게 보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복음을 외쳤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혁명적인 일이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이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구원을 우리에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첫 수업은 휴강이다. 은혜다. 그러니, 나가서 공중에 나는 새도 좀 보고, 들판에 핀 꽃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건네 보고, 오랜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도 걸어보고, 하늘도 좀 바라보고, 밤하늘의 별도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나의 주변 사람들, 또는 나의 주변의 자연(동물, 식물, , 하늘, 바다)이 겪고 있는 고통도 들여다보라. 잉여의 시간이 사랑으로 꽃피우게 하라.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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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26. 09:47

풍성한 하나님, 풍성한 인생

(시편 23편)


23편은 성경 중 가장 인기 있는 구절이다.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 치고 시편 23편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빼어난 시적 표현을 담고 있고, 짧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용 면에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구원의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3Ps로 표현하고 싶다. Provision(공급), Protection(보호), 그리고 Presence(함께함, 동행)이 그것이다. 시편 23편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험(죄와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고, 언제든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다윗은 이것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이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메타포(비유)이다. 메타포는 어떠한 중요한 요소를 말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빌려올 뿐이지, 그 비유의 대상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령, 실제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시편 23편에서 비유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벗어난 현실이 있다. 실제로 목자가 양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다니는 것은 양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다. 목자를 양을 잘 키워서, 양의 젖이라든지 털, 또는 고기를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에게 비유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케 하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다. 사랑에는 어떤 목적이 없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로 그 풍성함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신다. 이것은 생명의 나눔이다. 그야말로, 잔이 넘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인색함이라는 것이 없다. 그분에게는 억지로라는 것이 없다.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그분에게는 흘러 넘치는 풍성함이 있을 따름이다.

 

풍성하지 못하면 나 자신도 목마를 뿐더러, 다른 이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은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정의와 사랑의 삶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아는 일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3Ps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길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3Ps를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존재)를 풍성하게 해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서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서로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인륜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이 악한 이유, 세상을 살면서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인생(존재, 생명)을 위해서 서로 공급하고 보호하고 함께 하지 못하고,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의 생존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헤치며 남을 소외시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는 생존이 도덕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게 잔인한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구약의 열왕기하(왕하 6:28)나 예레미야애가(애가 4:10)에서 보듯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식을 삶아 먹는 일까지 벌인다. 아니, 이보다 더한 짓도 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악마의 노예로 산다.

12.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아는 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기 위함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고,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기 자신의 안위만 위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언약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의 성군이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뒤, 그도 하나님처럼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적의 위험(특별히 블레셋)으로부터 보호하고, 백성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기 때문이다.

 

풍성한 하나님을 경험하면, 나의 인생이 풍성해질 뿐만 아니라, 나의 풍성함을 나누는 인생을 반드시 살게 된다. 풍성함을 축적만 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풍성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Prosperous Gospel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1천만불(120)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자신처럼 살기 원한다고 말하는 복음은 도대체 어떠한 복음인가!)

 

악한 세대를 돌아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가까운 주변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인생, 생명)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가 함께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족끼리, 우리 교회 공동체가 3Ps를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야 한다.

 

어떻게 보면, Provision Protection은 잘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Presence가 아닌가 싶다.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평생에 선하심(Goodness)’인자하심(Lovingkindness)’이 반드시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다. 이것은 선하심인자하심이 의인화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Presence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좋다, 행복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Presence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공급하고 보호하는 일은 내가 직접하거나, 다른 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이지만, Presence하는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

 

사랑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공급하고,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이랑 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내 눈 앞에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눈 앞에 있으려고, 상대방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쏟고 집중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게 복이고,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시고 기뻐하신다.

 

풍성한 인생은 풍성한 하나님을 닮을 때 이루어진다. 그게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3Ps를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가족, 교회,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3Ps를 행하며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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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16. 14:18

꿈보다 해몽

(창세기 41:1-8)


오늘 말씀은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보다 무의식이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 책을 썼다. 그는 신경증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무의식의 세계, 즉 꿈에 집중했던 것이다.

 

성경이 쓰인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계시의 통로로 보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꿈을 꾸고 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관심이 많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서적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잠을 자면서 꿈 꾸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방향으로 오래 순종하는 것(Long obedient toward one direction),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성실성을 갖춘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요셉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만약 팔자타령 하면서 망가졌다면 기회가 왔어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의 인생은 꿈 때문에 겪은 일이 결정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샀다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요셉이 묶은 곡식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 결국, 이렇게 애굽의 노예가 된 것은 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요셉을 힘들게 한 것도 꿈이지만, 요셉을 세워 준 것도 꿈이다.

 

어느 날,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꾼다.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에게 잡아 먹히는 꿈과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킴을 당하는 꿈이었다. 바로는 이 꿈을 꾸고 이 꿈이 흉몽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번민하여 잠을 잘 못 잤다. 날이 밝자, 바로는 애굽에서 내로라 하는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말해주고 그 꿈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사실, 해석을 못한 게 아니라, 바로를 만족시키는 해몽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바로의 측근에서 바로를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자신의 석방을 예견했던 요셉을 떠올린다. 그는 그때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요셉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2)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바로의 꿈이 그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나게 했다. 꿈 때문에 요셉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앞에 불려간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꿈은 애굽에 불어 닥치게 될 흉년에 대한 것이다. 7년의 흉년 전에 7년의 풍년이 있을 것인데, 7년의 풍년의 때에 흉년을 잘 대비하면 흉년이 오더라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의 꿈 해석이었다. 요셉의 꿈 해석은 바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그 결과 바로는 요셉을 총리대신에 세워 풍년 동안 흉년을 대비하는 일을 관장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의 꿈 해몽의 핵심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선포한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꿈은 사람이 꾸지만 그 꿈의 실현은 하나님께 있다!” (잠언 16:9).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꿈이란 무엇인가? 꿈이란 단순히 우리가 잘 때 꾸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꿈이란 자기 욕망의 실현도 아니다. 꿈이란 운명론도 아니다. 성경에서 꿈이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말한다. 꿈이란 생명, 즉 사는 일과 사는 길에 대한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30:15). 이 말씀에 나와 있는 도식을 보면, 생명은 복이고, 사망은 화이다. 우리는 돈과 건강과 명예가 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인사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새해에는 돈 많이 버시고, 건강하시고, 명예로운 일이 많길기원한다.

 

본문 가운데는 애굽의 점술가들이나 현인들이 바로의 꿈을 듣고 어떠한 해석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미루어 보아, 그들은 모두 바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 꿈을 돈, 건강, 또는 바로의 명예와 관련하여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의 일상에서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인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인가, 얼마나 명예가 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의 꿈을 그러한 것들에 맞추어 해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의 꿈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집중, 그것이 요셉이 꿈의 해몽을 통해서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꿈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분만을 바라는 이유는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 생명의 완성을 본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완성해 가시는 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본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돈이나 건강, 명예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꿈을 꾸는가? 꿈을 꾸었을 때 꿈 해몽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셉에게서 배우는 꿈 해몽의 핵심은 생명의 완성,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한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문태준의 시 봄볕이다.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 문태준의 시집 <그늘의 발달> 중에서

 

봄볕 아래서, 이러한 감수성을 발하다니, 대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감수성이다. 꿈을 꾸면서 그 꿈이 나에게 어떠한 부와 건강과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헛된 꿈이 아닌, 꿈을 꾸면서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일,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 자리에 드는 행위 자체가 꿈을 꾸는 행위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로 삶을 살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명의 완성,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흔히, 내가 하는 일, 또는 나의 처지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러다 보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가 행하는 일, 우리 교회의 현재 상황보다는(주보에 나오는 출석, 헌금 통계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그냥 통계일 뿐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교회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는 잠 자리에 들기 전, 기도한다. 오늘 나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리고 내일 나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주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한다. “주님,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입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날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감사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벅차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우리의 삶, 우리의 교회공동체) 하실 일을 기대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저, 싸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꿈꾸자.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거기에 집중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요, 식물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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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7. 10. 14. 06:25

욕망

 

동생의 이름을 불러본다

허공은 너무 좁아

벽장 속에서 불러본다

어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어디론가 급히 가신다

장독대 한 켠에 숨겨 있던 한숨이

어머니가 머물던 자리를 메꾼다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보지만

쓰다듬어지는 건 오히려 내 손등이다

오늘은 별이 바닥에 떴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돌부리에 걸린 별 하나가

나뒹굴어 다닌다

집어 하늘로 던져보지만

허공에 박히지 못한 별은

슬프게 하강한다

동생은 지금 어느 하늘 어느 땅을 지나고 있을까

그것을 궁금해 하고 있는 찰나,

나는 깨닫는다

나에겐 동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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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7. 10. 14. 06:24

녹차

 

뜨거운 물이 우려낸

찻잎의 푸른 눈물,

나는 뜨거운 목으로

그것을 받아, 마시며

헝클어진 감각을 추스른다

촘촘해진 눈은

공기에 스민 추악을 걸러내고

상쾌해진 코는

바람에 밴 광기를 밀어낸다

내가 만지고 싶은 것은

구름처럼 허물한 살갗이 아니라

파도같이 억척한 슬픔이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연기는

승화되는 찻잎의 푸른 눈물이다

거기에 얼굴을 갖다 대면

비로소 세상의 눈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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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12. 08:40

지성소로 나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7:1-17 / 히브리서 9:1-12)

 

주여, 지성소로 나아가나이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실함에 힘입어

주께서 계신 지성소로 나아가나이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주와 거룩한 계약을 맺어

주를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인정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한 계약을 맺어

주를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나이다.

이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그의 피로 단 번에 영원한 속죄를 행하시고

주께로 가는 길을 여신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의 신앙의 최종 목적지요 지성소인 천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거기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기 원하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12. 08:33

지성소로 나아가라

(시편 7:1-17 / 히브리서 9:1-12)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탈출한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출애굽기는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있는데, 출애굽 하는 이야기(여기에는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핵심)와 시내산 언약 이야기(여기에는 십계명이 핵심), 그리고 성막에 관한 이야기(성막과 제사장이 핵심)이다.

 

상징적인 관점에서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기는 신앙인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 출애굽하는 일은 묶여 있는 어떠한 것(, 또는 악, 즉 생명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매트릭스>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애굽에서의 삶은 기계가 인간을 가상현실에 가둔 것과 같다.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은 기계가 설정해 놓은 가상 현실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실제로 살아 있다고 행복하다고 거짓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은 기계에게 에너지를 강제로 빼앗기며 갇혀 사는 것에 불과하다.

 

애굽은 인간의 거짓된 삶을 고발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을 먹지만, 그들은 그들의 노예로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며 산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 자체가 죄이다.

 

모세는 그러한 거짓 현실을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고발하고 그들을 깨우쳐 그곳에서 그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할을 맡는다. 매트릭스 영화에서는 모피어스가 그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갇혀 사는 니오에게 진실을 알리고 그를 가상 현실에서 빼 내온다.

 

죄악의 삶에서 나오기로 결단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부어진다.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경험한다. 우리가 살면서 죄악의 삶으로부터 떠나겠다는 결단을 못해서 그렇지, 일단 결단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나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주저 앉고 말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음 단계로 가게 된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시내산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내산에서 벌어진 일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사건이다. 계약은 당사자 간에 서로 인식 또는 인정(recognition)’하는 의식(ritual)이다. 이는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 아빠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한 것은 다른 우상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누가 나의 구원자인가, 누가 나의 창조자인가를 인식, 인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데 가서 예배 드리게 된다.

 

그리고 계약은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내 백성, 내 자식인 줄 알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탄의 자식이면 어떡하나.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성막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막은 가나안 땅 또는 하늘나라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형상(visible sign)’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나안 땅(나중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원래 모습대로 선하고 아름답게 사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는 시이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의로우신 하나님은 의인은 구원해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신다. 그러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을 구원의 근거로 제시한다.

 

다윗은 이렇게 호소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아벨, 불의, 불공평, 폭력)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시편 7:3-4).

 

그러면서 다윗은 이렇게 간구한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시편 7:8). 성막(나중에 성전)은 이러한 의의 간구가 실현되는 곳이다. 성막은 의로움을 가리는 죄를 씻어내고 의를 회복하는 곳이요, 의로움을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적 제사와 제사장 제도에 익숙한 히브리인(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성경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구약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어떻게 극적으로 바뀌었는지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죄를 씻고 의로운 상태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던 장소인 성막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는 바깥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9장은 출애굽기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첫째 장막 안에 있는 곳을 성소(the holy place)라 하고, 둘째 장막(휘장) 뒤에 있는 곳을 지성소(the most holy place)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둘째 휘장 뒤의 지성소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그 지성소에는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히브리서 저자가 장막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장막(성전)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토라 또는 부모님의 구전을 통해서 장막(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사는 시대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성소와 지성소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시대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복음을 전하며 강조하는 것은 둘째 장막, 즉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곳은 말그대로 가장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밖에 못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 번에 이루시고,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곳은 바로 성막에서 지성소로 표현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순례의 최종 목적지는 지성소이다.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는 가장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도달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인식되어,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향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때로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우리도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수 있지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성소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그 길을 그의 피로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소리내어 읽기 원한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지성소로 나아가라. 주께서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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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10. 20:51

벧아웬에서 돌이켜 벧엘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아모스 5:4-6)

 

주님, 불의한 길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을 찾지 못하고, 벧아웬의 길로 갔던 우리들 용서하옵소서.

이 시간, 허무한 것, 무가치한 것을 따라갔던 우리들이

벧엘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자 마음을 돌이켜 왔사오니,

우리를 만나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순간이고,

우리의 인생에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 하옵소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로 돌아가면

반드시 살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졸혼풍조와 교회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졸혼'이 유행인 듯 하다.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기에 차선책으로 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도 줄일 수 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법적 이익도 계속 누릴 수 있으며, 법이 정해준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 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의 가장 큰 장점은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당해온 '개인'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주는 유용한 통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모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풍조처럼 느껴진다. 이것의 가치평가를 따지는 일은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로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가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신앙공동체적 요소 때문에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얼토당토 안 하게 침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현상에 반발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공동체 생활에 대한 '졸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체감하는 현실은 매우 난감하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가나안교인'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공동체 내에는 대개 두 부류의 교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인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신앙생활 하고 싶어하는 신앙인 부류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 보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부류도 저변에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공동체를 강조하는 부류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공동체에 희생하는 만큼 희생을 보이지 않는 부류들에 대한 불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선다 싶으면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신앙)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못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더하거나, 목회현장을 떠나야 한다.)

 

요즘 목회현장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졸혼'의 저변에 깔린 것과 같은 '별거' '사생활'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유행 때문이다. 요즘 신앙인들은 교회에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사생활의 일부분 일뿐이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개방하는 것만 수동적으로 교회가 받아들이길 바랄 뿐, 교회(또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생활의 대표적인 공간인 가정집 심방은 극도로 드물고, 대신 전화심방이나 다른 형태의 심방이 선호된다.

 

교회공동체성의 회복은 단순히 공동체를 강조하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을 통해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기 원하는 요즘 신앙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말한 스텐리 하우워즈의 말처럼, 공동체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이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지력을 통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공동체의 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신앙인들)을 위한 현대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그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과제일 뿐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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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5. 10:30

묵상을 간구하는 기도

(시편 1편)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악인들의 꾀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게 하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멸망 받을 자들이니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말씀으로 삶을 빚어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삶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통, 허무, 불안, 두려움을 물리치고

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명력과 풍성함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5. 10:29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1:4-9)


주님, 트라우마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두려움 속에 가두었나이다.

우리는 고개를 들지못하고 트라우마 불뱀에 물려 죽고 있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장대에 높이 달리 놋뱀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고개를 들어 주께서 준비하신 또다른 부활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메타노이아의 용기를 내게 하옵소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각종 트라우마를 물리치고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오니,

주께서 준비하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그 삶으로 메타노이아 하겠나이다.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4

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꺼야!’ 언제 이러한 메시지를 집사람한테 보냈더니, ‘유구무언이라는 답장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뭘 어쩌라구?’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쇼팽의 음악은 음악계의 시편과 같다.

 

성경이 마르지 않은 샘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 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Psalm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현악기인 프살테리온(psalterion)에서 왔으며, ‘현 반주를 곁들인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찬양)는 기본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와 같이 시편은 노래(찬양)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문학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편의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이고 마지막 단어는 토베드이다. ‘아쉬레복 있는 자이고, ‘토베드망하리로다이다. 그런데,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하고, ‘토베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로 시작한다. 이는 멸망하게 될 악인을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먼 것처럼멀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을 구성하는 시편으로서, 원래 한 쌍을 같이 봐야 한다. 시편 1편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시편 2편은 아쉬레로 끝난다. 이러한 것을 수미쌍관(인클루지오)기법이라고 한다.

 

아쉬레복되다!’라는 뜻이다. 일단 아쉬레를 들으면,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무엇이 복되다는 것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는 복되다!

 

구약성경에는 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바라크( בּלק)’이고, 다른 하나는 '아쉐르'(אשר)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바라크는 일종의 선행은총이고, ‘아쉐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고, ‘아쉐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응답적으로 반응했을 때 얻게 되는 복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사), 죄인들(하타임), 오만한 자들(레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유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죄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갈수록 그 상태가 더욱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의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 곁을 우는 사자와 같이맴돌며 의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 구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이다. 하가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읊조리다, 으르렁대다, 그리고 꾸민다(plot, device)’이다.

 

우선, ‘읊조리다는 비둘기가 구구대면서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시편은 눈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다.) 시편(성경)은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원래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어 읽어서 마음에 새겨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 시편을 인용한 것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시편(구약성경)을 암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소리내서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의 과정이다.)

 

둘째, ‘으르렁거리다는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좋아서 그렇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와 같다. 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주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다가서는 동물은 없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사라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주변의 하이에나가 와서 먹이를 덥석 채 간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곁을 지나다 그 곁에 서게 되고 그들과 함께 앉게 된다. 이는 첫 말씀 복 있는 사람은 악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 ‘꾸민다(Plot, Devise)’라는 말은 시편 21절에 표현된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Plot, Devise)?” 내가 보기에는 ‘devise’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Devise’‘plan or invent by careful though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사숙고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묵상이란 단순히 읊조리며 외우고, 기뻐하며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자세가 있다. 하나는 informational reading이고, 다른 하나는 formational reading이다.  Informational reading은 성경을 읽으며 그저 거기서 어떠한 정보를 얻으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고, formational reading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어가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 삶의 당면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능력(power)이다. 시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다. 영어로는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라고 되어 있다. 시인은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죽어 있는 것 같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게 복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떠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인들의 자리, 죄인들의 자리,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으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빗나간 화살처럼 내 마음대로 길을 가고, 추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어느덧 나의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벼워진다. 고통이 밀려오고, 허무가 밀려오고, 불안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꼭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가야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력과 풍성함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어떠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드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또는 강퍅하게 살고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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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2

메타노이아 트라우마 넘어서기

(민수기 21:4-9)


메타노이아(metanoia)는 헬라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회개(repentence)’이다.  내가 굳이 우리나라 말인 회개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쓰는 이유는 회개라는 말이 오염됐기 때문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언어는 역사와 컨텍스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죄를 뉘우치는 것정도가 떠오른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를 그 정도로만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의 뉘우침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메타노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심적외상을 말한다. 사람은 외적인 손상이나 어려움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외적인 손상을 복구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마음의 손상을 복구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명 불뱀사건이다. 그들이 불뱀사건을 겪게 되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가면서 계속해서 일련의 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뱀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들이 겪은 네 가지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미리암의 죽음 신광야 가데스에서 일어난 일

2) 므리바 물 사건 물이 없어서 원망: 모세와 아론이 엎드려 기도해서 반석에서 물을 얻는 은혜를 얻지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치는 행위를 통해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

  3) 홍해로부터 다메섹에 이르는 왕의 길로 통과하지 못하게 됨: 에돔에게 정중히 부탁했으나 거절당해서,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 게된다. 그들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에서의 자손)로 생각하고 당연히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으나 거절당한다.

  4) 아론의 죽음: 호르산에 이르러 초대 대제사장이요 모세의 평생의 동역자이자 친형인 아론이 죽는다.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30일 동안 애곡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트라우마를 안고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고자 했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것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극심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상하고, 지쳐 있었다. 계속적인 실패와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고개가 숙여진 상황이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라는 책을 보면,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1) 우월감 트라우마: 사람대접 못받을까봐 외향에 치중하는 사회

2) 분단 트라우마: 빨갱이 전략, 어떤 모략에 걸릴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회

3) 변방 트라우마: 권력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되어 차별 받을까봐 몸사리는 사회

 

여기에, 세대별 트라우마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 1940,50년대 생: 좌절 트라우마 (너는 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 국제시장)

2) 1960년대생: 미완성 트라우마 (내 욕심만 좇느라 민주와 정의를 후퇴시겼구나)

3) 1970년대생: 혼돈 트라우마 세계화시대 – (신자유주의 체제내에서는 나의 개인적 꿈(소망)이 실현될 수 없다)

4) 1980년대생: 공포 트라우마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 낭만을 잃은 세대)

 

이스라엘은 에돔의 비협조로 인해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맞닥뜨렸다.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상하니라 (the people grew impatient on the way).”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성난 함성을 질렀다. “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이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표출이다. 그들은 절망했고, 불안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불뱀의 등장이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이 있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소설이 있다. 음악은 작곡가 라벨이 지은 곡인데, 그는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작은 왕녀가 춤을 췄을것 같은 파반느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박민규가 지은 것인데, 제목은 라벨의 음악에서 따왔고, 그의 소설 책 표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란 그림에서 추녀 시녀에게 조명을 비추고 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고발한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는 한 마디로, ‘인정욕구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속에서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한 자는 사회의 낙오자로 여겨져 도태되고 목숨을 잃는다. 20대 사망 원인의 제 1 순위는 자살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일년에 14,000명 정도가 자살한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메타노이아였다. 메타노이아는 죄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를 갈구하는 마음이 아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만 갈구하면 뭐하는가? 다음에 또 똑 같은 죄를 짓게 될텐데. 메타노이아는 현재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길은 반드시 있다. 다른 인생, 너머의 인생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른다. 메타노이아란 현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약을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본다. 탕자는 어느 순간 돼지같이 비천한 삶에서 괴로워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현재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탕자는 메타노이아를 통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삶이 있다! 불평과 원망, 트라우마 속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나가는 삶이 아닌, 생명을 얻는 삶이 그들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장대에 높이 걸려 있는 놋뱀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일이다. 장대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8, 9).

 

여러분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절망, 불안, 인정욕구 등,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 어려움이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놋뱀’, 즉 주님이 준비하신 또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두려움에 꼼짝 못하게 가두지만, 메타노이아는 그 두려움을 깨뜨린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눈을 들어 놋뱀(십자가)을 바라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고개 들고, 어깨 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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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