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8. 09:20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17:11-19)


옛날 아버지께서 목회하실 때, 교인 중에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면 고개를 숙이고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주보에 나온 성경본문과 제목만 보면,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할지 다 안다고 생각해서이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에 의해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영광과 감사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본문을 읽으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경계를 낮췄을 지 모른다.

 

옛날 같았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인격이 없는 사람,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발달한 뇌과학에 의하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비난만 할 수 없다.

 

우리 뇌에는 신경세포라 불리는 뉴런이 있다. 뉴런은 어떠한 신호에 반응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반응을 보이는 것을 ‘fire’라고 한다. 뇌 과학에는 헵의 학습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뇌 안의 신경세포는 경험을 학습한다라는 것을 말한다.

 

뉴런(신경세포)은 경험한 것, 즉 아는 것에 반응한다.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 찬양 예배 드릴 때, 아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아니면 모르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영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아니면 한국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우리는 아는 것에 반응한다. 일단, 설교 시간이 재미 있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해도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뇌 과학에서 밝혀낸 뉴런의 메커니즘을 보면, 뇌는 일차적으로 경험한 것, 아는 것에 반응하지만, 반대로 같은 것을 계속 경험하면 지루해 한다. 뇌의 신경세포도 굉장히 게을러서, 똑 같은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반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의 돌발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에 의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에서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세계 3대 심리학자가 있다. 지그문트프로이트, 카를 융, 그리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그들이다. 이 중에서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에 대해서 주로 연구했지만, 융은 집단심리학 분야를 개척했다. 나는 융의 집단심리학 측면에서 뇌과학의 결과를 적용해 보고자 한다.

 

융은 개인의 마음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려면 개인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집단의 역사도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개인에게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발전된 학문이 신화학, 민속학, 문화인류학이다.

(심리학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아시는 분은 흥미롭지만, 잘 모르시는 분은 뭐래하면서 흥미를 잃으셨을 것이다. 그게 뇌의 메커니즘이다.)

 

나는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적으로 뇌의 메커니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자주 들어서 지루해진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뇌는 똑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면 지루해 한다.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 또는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짜증까지 낸다.

 

한국의 선교 초기나, 한창 기독교가 부흥 할 때, 거리에 나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 내 남편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또는, 나는 우리 부모님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예수라는 분이 나를 사랑한다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졌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구원 받은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요즘 나가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건네보라. 그러면, 그들은 뭐래하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짜증내거나, ‘너나 잘하세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온 마음을 다해서, 기쁨이 가득하여,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것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 모두, 예수의 이름을 식상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 성경이라는 용어,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설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상관 없이, 성경을 잘 안다고 스스로 착각할 뿐이지 실제로는 성경 지식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바나그룹에서 미국 성서공회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 의하면, 미국 가정들 88퍼센트가 성경을 적어도 하나 이상 갖고 있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 중 82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43퍼센트의 미국 사람들만이 성경의 처음 다섯 권(모세 오경)의 이름을 다 맞추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식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뉴런의 착각이다. 뇌의 메커니즘을 너무 믿지 말라. 우리의 뇌는 예수의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식상한 것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예수의 이름은 식상한 것인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열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을 지나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는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정용섭).

 

우리는 어떠한가? 살면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 앞에 나아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을 간절하게 하는가? 인터넷 뒤져보고, 관련 전문가를 만나서 조언을 받는 등, 우리는 다른 궁리부터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고침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한다. 열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던 길을 되돌아 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영광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뜻이고, 감사는 주변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는가? 그저 자기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지금 너무도 권태로운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권태로우니까, 자극적인 것을 찾아 이 설교 저 설교 듣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그러한 임기응변식 신앙으로는 이미 식상해져 버린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한다.

 

뇌는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즐거움,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도 많이 들어서 예수의 이름을 지루한 것이라고 잘못 전달하고 있는 뉴런의 착각을 깨뜨리고, 예수의 이름을 새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뉴런의 신경체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뉴런에 의해서 축적된 교만을 버려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알기 위하여 이 외침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실제로 성경을 함께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활짝 열어 놓을 때,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함께 외쳐보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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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3. 10:23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눅 12: 13-21)

 

오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형과의 재산분할에 대한 분쟁 해결을 부탁한 일에서 촉발된다. 그 부탁을 예수님이 들어주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쟁을 통해, 그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

 

'탐심’으로 번역된 헬라어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α)욕심을 내는 것,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 더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 탐욕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탐심, 탐욕, 강탈, 사기, 욕심, 더 가지려는 탐욕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리고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양이 더 많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의 뜻을 가진플레이온’(πλεων)붙잡다, 소유하다, 잡다, 자각하다, 고수하다, 매달리다, 간직하다, 보관하다의 뜻을 가진에코’(χ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김준남)

 

탐심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리 고 그 부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호칭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그는 왜 어리석은 것일까? 이 이야기를 단순히 탐심’,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등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탐심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 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자꾸 근대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습관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의 개념도 12세기에나 형성된 것이고, 자본의 개념도 근대의 개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는 요즘 말하는 부자와 개념이 다르다. 요즘 부자는 자본가라고 불리지만, 성경의 부자는 굶지 않는 자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심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인간의 덕목이다. 탐심이 많으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인생을 조금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은 상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식 너머의 진리를 밝힌다.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는 말씀이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주 기가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라는 말씀을 하신다.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누가 어리석은 자일까?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같은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까마귀처럼, ‘백합화처럼, ‘들풀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부자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고, ‘까마귀나 백합화, 들풀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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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2. 05:41

어제보다 감사

(창세기 4:1-8)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의 양의 첫 새끼라는 어구를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양 세 마리

-      박상순

 

풀밭에는 분홍 나무

풀밭에는 양 세 마리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한 마리는 옆을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보고

 

풀밭에는 양 세 마리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를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나는 이 시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어 봤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소외가 발생한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발생한다.

인생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곳간을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봤지만, 요즘 사람들은 은행 어카운트를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본다. 곳간에 쌓인 것은 실물이지만, 은행 어카운트에 싸인 것은 숫자이다. 그래서, 요즘엔 인생을 돌아보며 하는 감사도, 계산적이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우리는 넓은 들에 익은 곡식 ~ 황금물결 뒤치며를 부르지만, 사실 별다른 감흥은 없다.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를 살지 않고, 산업사회를 살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을 요즘 식으로 드리자면, 농산품을 쌓아 놓는 게 아니라, 공산품을 쌓아 놓아야 한다. 돈다발, 또는 고급 승용차 등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게, 산업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어울리는 감사절의 풍경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산품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일을 행한다면, 그것을 세속적인 일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실제로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은 농산품이 아니라 공산품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비를 내려 주세요. 하나님, 곡식이 잘 익게 해 주세요. 하나님, 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구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제사정을 좋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쟁에서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은 경쟁하느라 힘들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는 대개 경쟁에서 이겼을 때 발생한다. 분노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아벨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본문에서 보듯이, 가인과 아벨은 예배 경쟁을 하는 듯 보인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자신의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치기로서 자신의 양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 이 사건은 가인에게 분노를 안겨준다. 그래서, 가인은 분노에 압도되어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물론, 가인과 아벨 이야기 뒤에는 수많은 함의가 포진되어 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경쟁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고, 상대를 소외시켜 (내 삶의 바깥 영역으로 밀어내기) 제거 대상이 되게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노가 발생하고, 폭력이 발생하고, 죽음이 발생한다.

 

마태복음(20:20-28)과 마가복음(10:35-45)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세베대의 아들(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이렇게 구한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일은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산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다른 제자들은 동일한 관점에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경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 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쟁은 이처럼, 가장 거룩한 곳에서도 서로에게 분노를 발생시키는 부정적인 기운을 만들어 낸다.

 

포항의 지진 피해로 수능시험 날짜가 미뤄졌다. 한국의 아이들(대부분 선진국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경쟁부터 배운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 구조다. 우리도 그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생득적으로 성적-경쟁에 민감하다.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보는 눈이 부족하고, 자녀들이 얼마나 성적을 잘 받아 오느냐(경쟁에서 이겼느냐)로 판단한다. 부모의 지갑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연 성적을 잘 받아 오는 것(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적표 가지고 오는 날을 가장 좋아하거나, 또는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다. 특별히 큰 아들이 민감하다.)

 

학교에서의 성적 구분은 간편하게 A, B, C, D (수우미양가, 양가집 자녀 많다.)등으로 하지만, 원래 전통적인 성적 구분은 Summa cum laude, Magna cum laude, Cum laude, Bene 등의 라틴어로 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 할 때, Summa cum laude로 졸업하면 최고의 영예가 되고, 나중에 이력서를 쓸 때도 반드시 그것을 표기한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적 구분을 보면, 마지막이 Bene이다. Bene‘Good’이다. , 라틴어의 성적 구분에는 부정적인 표현이 없다. 모두 긍정의 표현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성적 평가 방법인 것이다.

 

경쟁 사회에 살다보니,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익숙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목을 멘다. 그래서 우리는 남보다 잘 하지 못할 때 열등감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갈까?

 

독일의 드레스덴 미술관에 가면, 라파엘로가 1513-1514년에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성모가 성자를 안고 있고, 교황 식스투스가 교황관을 벗고 성모자(聖母子)를 알현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근엄하다. 그런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면,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아기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이 천사를 케루빔(Cherubim)’이라고 부른다. 두 아기 천사의 엉뚱한 표정 덕분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그림의 이미지가 평온해진다. 그래서, 이 두 아기천사는 그 그림의 성모자나 교황 식스투스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 (한동일, <라틴어수업>, 76-77)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인생의 여정에 평안을 주는 생각의 전환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남보다 잘하는 것보다,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삶의 만족과 평안은, 남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이다.

 

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남보다 좋은 처지를 감사한다.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서, 다른 사람은 굶고 있는데 나는 배부르게 먹어서, 다른 친구는 수능시험을 잘 못 봐서 대학에 못 갔는데 나는 대학에 합격해서, 다른 친구들은 좋은 부모님 못 만나서 고생하는데 나는 좋은 부모님 만나 호강해서등등, 우리는 수도 없이 남과 비교하여, 비교우위에 선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도 감사한다. 다른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 멸망 당하는 데,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구원도 비교(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감사절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이러한 감사들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기 십상이다. 누군가에 비해서 비교(경쟁)우위를 빼앗기면, 우리는 반드시 분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교(경쟁)우위에서 뒤쳐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교(경쟁)우위에 기반한 감사는 또다른 감사를 낳지 못하고, 결국 분노만 낳게 될 뿐이다.

 

리스도인은 가인의 후예가 아니다. 성경의 족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가인의 자손에서 오지 않고, (아벨을 대신 한) (Seth)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쟁에서 오는 분노를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남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를 공부하면 그의 동갑내기 4촌 형 송몽규가 등장한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영화 <동주>를 참고하라.) 송몽규는 언제나 윤동주보다 앞서갔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송몽규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지만, 윤동주의 시에서 자주 보듯이, 그는 날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송몽규에 비해 뒤쳐진 윤동주였지만, 지금 우리는 송몽규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윤동주를 기억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의 길을 걸어간 자는 반드시 기억된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경쟁에서 이긴 감사가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한 것, 어제보다 나아진 것에 대한 감사의 삶이길 소망한다. 우리의 생명은 남보다 가치 있어 ‘Summa cum laude’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미 ‘Summa cum laude’이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어제 걸어온 길을,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걸어가길 바란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실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3. 23:02

더불어 함께

(느헤미야 1:1-5)

 

한국에백인제라는 분이 있었다. 의사였는데, 일제시대를 겪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외과 주임교수 및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여러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하신 분이다. 이 분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에 납북되었다. 그리고, 그의 조카 백낙환 선생은 백부인 백인제 선생의 뜻을 기려, 백병원와 인제대학교를 세운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백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다. 그리고, 백인제의 또다른 조카 백낙청은 하버드대학교 영문학 박사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문학잡지 <창작과 비평>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학잡지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다. 한국에서 문학 공부한 사람 치고, 백낙청 교수를 모르면 간첩이다.)

 

의사 백인제 선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의사 장기려 박사이다. 이분은 한국의 슈바이처 박사라고 불린다. 현재 부산에 가면, 장기려 박사 기념관 더 나눔이 있다. 이분은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개설하였는데, 이는 그의 서원에 대한 실행이었다. 기독교인(평양출신, 장로교)이었던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시험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한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 한대로 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말과 행동의 일치는 인간의 평생 과제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1). 이것은 느헤미야의 행동들이라고 번역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말 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기독교는 로고스(말씀)의 종교인 만큼,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행동이 있는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 수련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삶이다”(레노바레 성경, 주석). ,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듣고 행동을 통해 어떠한 형체로 보이게 끔 열매 맺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그래서 믿음만큼 창조적인 일도 없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하고, 결국 보이게 끔 만드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어느 날 왕궁(수산궁)에 있었는데, 때마침 유다에서 온 하나니와 그의 동료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는 그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는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탔습니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주저 앉아서 운다. 느헤미야 자신은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표현하고 말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말을 듣고 난 뒤,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1 5절에서 시작하여, 11절에 끝나는데, 그의 기도는 단순히 그 소식에 대한 애통의 기도가 아니고, 회개의 기도이며,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하는 믿음의 기도이다.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하여, 그의 기도와 소망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말의 사람이 아닌, 행동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즘,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테크놀러지가 발달하여 서로의 안부를 이메일, 메신저, 전화, 또는 화상통화 등을 통해 전하지만, 옛날에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는 편지였다. 편지, 하면 떠오르는 옛노래가 있다. 어니언스(양파)가 부른 <편지>이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젖은 편지

 

하이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 버렸네

 

멍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를 보낸다

 

편지는 고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통신수단이다. 로마시대 때, 로마인들은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첫 문장으로 이러한 문구를 썼다고 한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이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로마인들은 타인의 안부를 먼저 물으면서, 이러한 문구를 썼는데, 이것은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라틴어 수업, 144)

 

우리는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잘 살아야지, 남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하면서 산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안부를 걱정했고,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생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생각은 흐려지고, ‘각자도생이라는 표어가 삶에 자리 잡은 듯하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 가장 잘 되는 사업이 각자도생사업이다. ‘혼술, 혼밥을 위한 사업이 잘 된다.

 

나는 이곳 실리콘밸리로 이사 와서,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보도블럭 위에 사시사철 한 곳에만 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노숙자(홈리스)를 볼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사진) 그 노숙자는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날씨가 좋으나, 꼼짝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 이정표처럼 앉아 있다. 아니, 그곳이 자신의 집이고 땅 인양 앉아 있다.

 

그 노숙자를 보면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매일같이 그 노숙자를 지나치지만, 나는 그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본 적도 없고, 무엇인가 그에게 선행을 베풀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술이 발명된들, 거리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그 노숙자의 인생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없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낀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나의 바깥의 풍경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곳을 지날 때, 자동차를 타고 자동차와 신호등의 흐름에 따라 ~’ 지나가고 마니, 그 노숙자에게 말을 걸 시간과 기회가 전혀 없다. 그 노숙자는 그야말로, 내가 머물고 있는 자동차 바깥의 풍경에 불과하다. 내 바깥의 풍경을 향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누군가에게 잘 지내십니까?’라고 진심어린 안부를 묻는 것도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말씀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수산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족(형제, 자매)이 예루살렘에서 고생하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평안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몸소 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한다.

 

의사 장기려 박사도 의사로서 돈을 벌어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환자의 평안이 곧 자신의 평안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서원했듯이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다.

 

우리가 모두, 느헤미야나 장기려 박사처럼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이마음만은 추스르면 좋겠다.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 내가 평안하면 그만이 아니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한 것이라는 이 마음, 이것은 우리가 놓치고 사는 더불어 함께라는 삶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이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부를 묻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평안하지 않으면, 내가 안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된 공동체이다. 이것을 유기적 공동체라고 한다. 이것은 요즘 한창 이슈인 생태신학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생명체계가 망가지면 모든 유기적 공동체가 위험에 처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라. 책임감을 갖고 물으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물으라. 나에게 있어 올해가 가기 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망 하나는 걸어서 내가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을 나의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으로 삼고, 그 풍경과 더불어 함께 어떻게 살아갈 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숙자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고,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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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0. 16:17

인의 형통과 신앙

(시편 37:1-8)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사촌하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하물며, 원수가 땅을 사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시편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 시편은 현실적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유진 피터슨)는 다윗의 영성을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같이 목도하는 문제이다. ‘악인의 형통이 그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도 이해 안 되는데,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더 이해 안 되는 현실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과,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원망하며, 어떤 이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악한 일을 저지르는 데 동참하려 한다.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고 행동이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의 문제를 놓아두고, 다음 단어를 처음으로 써서 우리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게 한다. “악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1).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는 불평하다시기하다이다. , 악인의 형통을 목도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평하거나 시기하게 된다.

 

불평하다는 히브리어의 하라라는 말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fret’으로 번역하고 있다. ‘fret’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be constantly or visibly worried or anxious.” ‘불평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해서 악인의 형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불평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만 할 뿐이다.

 

그리고, ‘시기하다는 히브리어의 카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be enviou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부러움의 마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어떠한 물건을 보고 그 물건을 사게 되는 심리는 부러움이다. 이처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 나도 모르게,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불평하는 일이나 부러워하는 일은 결코 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악인의 형통을 바꾸지도 못한다. 결국, 악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못 끼칠 뿐더러, 나만 죄를 짓게 되어, 나도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악인의 형통은 잠시 푸르다 마는 풀과 채소 같아서, 곧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악인의 형통은 정당화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불평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부러워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그 대신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까? 시인은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2) 여호와를 기뻐하라, 3)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4)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3절에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권고와 더불어,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가 그것이다. 이 말은 간추려서 표현하면, ‘성실을 먹으라는 말이다.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것처럼, 성실을 먹으라는 뜻이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식사, 운동, .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이다. 건강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잠을 잘 자도, 결국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병은 먹는 것 때문에 생긴다. 먹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살려고 먹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가장 먼저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은 식이요법이다. , 먹거리를 바꾸는 일이다. (이게 제일 어렵다!)

 

성실을 먹으라는 말에서 성실은 우리의 성실이 아니라, 푸른 초장에 펼쳐진 하나님의 성실이다. ‘하나님의 성실을 먹는 행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음이라고 말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초장에서 무엇을 먹는가? 믿음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이다. 기쁨은 에너지와 같다. 에너지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기쁨이 없으면 선을 행할 수 없다. 기쁨 없이 하는 모든 일은 고통이고 폭력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찬양, 설교, 교제, 모두 기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쁨이 있다면,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선한 일, 만족을 주는 일, 행복을 주는 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쁨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렇게라도 기쁨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바깥에서 찾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성냥불과 같아서, 바람에 의해 꺼지거나, 바람처럼 사라진다.

 

기쁨은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되고, 자신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의 뜻이다. ‘(데레크)’은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에 맡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이것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굴리다라는 뜻이다.

 

축구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축구를 하면서 우리는 공을 상대방에게 패스한다. ‘맡기라는 말은 패스와 같은 이미지이다. 공을 패스하듯이, 우리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하나님께 패스, 굴리라, 맡기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패스를 제대로 하면, 골을 넣는다. 그런 기쁨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놓아두고, 권면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인내이다. 인내란 억지로 참는다는 뜻보다는 평정심을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 그러면서 희망하라는 뜻이다. 인내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만, 인내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쉽게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고 부러워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영혼에 베어 있는 습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 힘들다. 누군가 말해줘야 한다. 시인은 지금 우리의 기울어진 습관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우리의 습관을 한 번 돌아보자. 악인의 형통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불평하고 부러워했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을 악인의 길에 살짝 밀어 넣었는가.

 

이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그렇게 반응할 필요 없다. 말씀을 통해서, 악인의 형통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얼마나 이슬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얼마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성실을 뜯어 먹고, 나의 삶을 주님께 패스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기쁨 가운데 선을 부지런히 행하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악인의 형통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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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6. 14:43

두려움을 떨쳐내고 죽는 밀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2:20-36)

 

주님은 계속하여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두려움 가운데 사는지요?

주님, 우리의 생명(인생)을 조여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주님께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두려움 때문에 죽는 밀알이 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두려움의 딱딱한 껍질을 깨고 나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걸어가는

죽는 밀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제자도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영광스럽게 하실 줄 믿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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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7. 11. 2. 16:48

배꼽

 

우리는 서로의 배꼽을 어루만진다

연결되고 싶어서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식상하기도 하고

철 지난 과일같이 텁텁하다

어제는 시장에 갔었다

배부른 물고기를 보고

그만 창자를 만질 뻔했다

아가미가 덜컹거리지 않았다면

나의 손가락은

물고기의 배꼽을 관통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어서

우리들의 사이는 절벽처럼 깊다

눈빛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한 존재의 정보는

배꼽에 손이 닿을 때만 전송되는

위험한 세상이다

우리는 서로의 배꼽을 어루만진다

연결되고 싶어서

그 간절함에 비하면

위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배꼽을 어루만지며

태초의 태반으로 돌아가

분리되지 않은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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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 15:27

고통의 언어

(예레미야 애가 5:1-22)


예레미야 애가는 에카로 시작한다. ‘에카슬프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피부)에는 보통 통증을 전달하는 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이 있다. 이 체계가 망가지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은 사람에게 아픔또는 고통을 전달한다. 아픔, 또는 고통을 받으면 사람은 거기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신발이 변변치 않았다. 밑창이 얇은 운동화이거나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 같은 게 많았다. 그리고 문제는 비포장 도로가 많다 보니 길 위에 놓여 있는 못 같은 거를 밟으면 그것이 운동화를 뚫고 들어와 발바닥에 박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파상풍 주사같은 것도 발달되어 있던 시대도 아니라서 발바닥에 못이 박히면 상처를 불로 지지며 망치로 때리거나, 거기에 된장을 바르곤 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다. 만약, 못이 발바닥에 박혔는 데도 그것에 대한 고통을 못 느낀다면, 그 사람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명의 화타가 관우의 팔을 수술할 때 눈 하나 깜짝 안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관우의 용맹함에 대한 표현이지 관우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을 못 느끼니까 못이 박힌 발을 그냥 내버려둘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파상풍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물론, 고통의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파상풍 때문에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대부분 육신에서 오는 고통에 대하여 대처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다. 육신의 고통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면, 의사를 만나게 되고, 의사를 만나면 자신이 겪고 있는 육체의 통증에 대해서 진술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것을 토대로 이런저런 검사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해서 그것을 치료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자신의 통증을 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지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뉴스에 보니, 중국의 한 시골에 살던 한 할머니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가 나온 사건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를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배가 나온 채로 그렇게 살았다. (고통에 대한 대처법도 학습되는 것이다. 우리 큰 아들도 어릴 때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였는데, 눈이 잘 안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는 그것이 자기가 대면하는 세상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인줄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가 눈이 나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경을 씌워줬는데, 참 안쓰러웠다.)

 

그리고, 통증을 인지했더라도, 그 통증을 치료할 곳이 없다면, 그것은 또다른 비극을 낫는다. 통증을 치료해줄 의사나 병원시설이 없는 것도 문제이고, 의사나 병원시설이 있더라도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시스템도 문제다. 일례로,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판이 가해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의사와 병원시설이 있으면 뭐하는가?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이 없으면 그림의 떡인데. (실제로 이민자들이 겪는 고통 중의 하나이다. 웬만큼 좋은 보험이 아니면, Deductible이 너무 많아서, 섣부르게 병원에 갈 수 없다. 특별히 응급실 가는 행위는 재앙이다. 나도 갑자기 요로결석이 와서 응급실에 갔었는데, 모르핀 주사 한 방 맞고, 의사 한 번 보고, 2시간 정도 있다 통증이 가라앉아서 나왔는데, 병원에서 날아온 청구서에는 8천불이 찍혀 있었다. 그거 해결하느라 엄청 애 먹었다. 그래서, 이민자들에게 다른 게 죄가 아니라 아픈 게 죄다. 이민자 뿐만 아니라, 치과보험에 들지 못한 미국 사람들이 치아 치료를 제 때 하지 못해서 죽는 사망자 수가 어마어마하다.)

 

육신의 병 때문에 오는 통증에 빠르게 대처해서 그 통증을 치료하여 몸을 보호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의 영혼(soul)에 오는 통증에 대해서 대처하고 치료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우리는 비교적 육신에 통증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반해, 영혼에 고통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저래?” (physically)은 건강해 보이는데,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어디 아픈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실제로, 사고는 몸 아픈 사람이 치는 게 아니라 영혼 아픈 사람이 친다. 흉악범들의 신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멀쩡하게 생겼다. 그런데, 왜 그렇게 흉악범이 되었는가. 자신의 아픈 영혼을 어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영혼에 고통이 다가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이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가?

 

감사해 시험이 닥쳐 올 때에 주께서 인도 하시니 두려움 없네

또 감사해 고통이 찾아 올 때에 주께서 지켜 주시니 승리하리라

나의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시험이 나를 찾아올 때 주님이 지켜 주시리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배운다. 이것이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감사의 언어부터 배운다. 그야말로, 치료는 안 하고, 아편을 맞는 꼴이다. 시험이 닥쳐오고, 고통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온 시험과 고통을 놓아두고 감사하기 이전에, 탄식해야 한다.

 

나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 중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리에게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 이외에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고통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들은 성공의 언어이지 고통의 언어가 아니다. 가는 곳곳마다 모두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각 시대마다 하이틴 스타가 있지만, 우리 시대 하이틴 스타는 단연 이미연이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미연은 그 당시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불후의 명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찍는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 여학생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그 여학생을 짝사랑하여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학생 역할을 한 배우가 최근 의리로 유명해진 김보성(허석)이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으로서 성공의 언어는 배웠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에 불어 닥친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영혼의 아픔이 아니다. 입시 때문에 고달픈 청소년들의 아픔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자기의 고통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여 치료 받지도 못한다.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냥 고통 가운데 죽는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남의 고통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을 알아봐주고 적절하게 대응해 주지도 못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내 인생의 비극만 아니라 관계의 비극도 경험하게 된다.

 

(인지부조화이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생물 문제: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1) 한포 2) 두포 3) 세포 4) 네포 5) 대포 (문제를 바꾸어서, 김정은의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 대포) 세포이다. 의학적 발견에 의하면, 우리가 암에 걸리는 이유는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이란다.

 

세포 내에는 Glycolytic system(해당계)와 미토콘트리아계, 두 개의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 해당계는 당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토콘트리아계에서는 에너지를 만들 때 산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해당계는 세포분열을 촉친하고, 미토콘트리아계는 세포분열을 억제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일 때, 그리고 욱하고 화가 날 때, 저산소와 저체온의 상태가 되는데, 이는 해당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때 젖산(유산)이라는 것이 분비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화가나면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해당계가 발달하고, 미토콘트리아계가 비활성화되어 우리의 몸은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바로 그때 암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저산소와 저체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암을 예방하고, 암을 치료하려면 유산소운동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의학계에서는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암에 걸리는 이유도 똑같다. 저산소, 저체온 때문이다. 영혼이 아프면, 숨쉬기 곤란해지고, 알 수 없는 추위를 느낀다. 영혼의 저산소와 저체온증을 극복하는 방법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고통)을 못 느껴, 돌연사하는 것이다. 한센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을 못 느껴 반응하지 못해 죽는 것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어느 순간 영혼이 돌연사한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기에 외부 세계의 어떠한 고통도 동감(sympathy)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죽고, 외부의 세계도 죽인다.

 

우리가 이처럼 예레미야애가나 시편 같은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 영혼에 닥쳐온 고통을 올바로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워 내 안에 닥쳐온 고통을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탄식할 때, 그리고 반드시 탄식의 과정을 거쳐야, 그 지난한 과정의 열매로 오는 은혜가 감사인 것이다. 감사는 고통의 언어가 맺는 열매, 또는 지향하는 목적이지, 고통의 언어로 가득 찬 탄식의 과정 없이 우리에게 오는 매직(마술)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먹고 살려고 성공의 언어는 반드시 배우면서, 왜 나의 존재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살려내는 고통의 언어는 배우지 않는가. 성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고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린다. (나는 주로 고통의 언어를 새벽시간에 설교하고 가르친다. 오직 성경에서만 가르쳐 주는 고통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새벽예배를 나오라.) 고통의 언어를 잘 배워,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 15:21

열심히 하면 죽는다

(요한복음 2:13-22)

 

본문은 소위 성전청결사건이라 불린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성질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성질을 부렸다며, 자신의 성질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우스운 일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은 헤롯성전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심장이었는데,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이다.

 

헤롯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이유는 신앙 때문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복잡한 이력(이두매 사람)을 지닌 통치자였기 때문에 유대 땅의 통치자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인정 받으려 했던 것이다.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이나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 비하면 그 규모가 엄청났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 주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의회 회원들의 집권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의 불교가 굳건히 서 있는 이유,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이권 다툼이 잦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거두는 문화제통행료 수입 때문이다.)

 

헤롯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직분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유대인, 이방인)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매매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상업적인 매매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성전을 운영하는 유대당국의 이익에도 맞았고, 먼 곳에서 성전으로 순례를 왔던 순례자들의 편의에도 맞았다.

 

먼 곳에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제사에 바칠 동물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이국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서 환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외국에 갔을 때, 공항에서 빠져 나가기 전 그 나라의 돈으로 환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한 마디로, 이방인의 뜰에서의 매매는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일이었다.

 

유월절 때에 성전을 방문한 예수님은 그곳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없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추정하는 이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스가랴서의 이 말씀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니라”( 14:21).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상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 성전청결사건이 가진 의미이다. 그 의미와 관련된 구절이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구절인데,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제자들이 시편 69 9절의 이 말씀을 되돌아 봤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구절인데, 제자들은 이 뜻의 의미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성전청결사건을 감행한 예수님의 행동은 옳다. 시편 69 9절의 말씀이 그를 뒷받침해준다. 시편의 이 말씀은 다윗의 탄식이다. 하나님의 향한 자신의 열심 때문에 자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탄식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던 성경의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 외에도 비느하스와 엘리야가 있다.

 

비느하스 이야기는 민수기 25장에 등장하는데, 그는 아론의 손자이고,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바알브올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남자들의 우상숭배 사건을 해결하는 신실한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모압 땅에 이르러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이에 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죽게 된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창을 들고 모압 여인과 음행하는 남자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로 인해 염병은 멈추게 되는데, 이미 2 4천명이 죽은 후였다. 비느하스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모두 죽었을 지 모른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19장에 나온다. 특별히 19 10절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이것은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한 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여 낙심해서 호렙산에 머물 때에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록한 구절이다. 엘리야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열심이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엘리야는 그 열심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하나님의성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키게 될 것이다’. ‘삼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듯이,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예수님이 행한 성전청결사건을 본 뒤, 예수님에게 와서 그렇게 행하는 표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이방인 뜰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매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를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에 대한 권위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인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46년째 지어지고 있는 성전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짓겠다는 게 무엇인가? 무슨 기적을 행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다. “내 육체를 죽이라, 그러나 나는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육체가 죽어도,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일에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이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주의 일을 행하는 우리의 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믿음을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열심히 하면 죽는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정말 주를 위해 열심히 한 것 때문에, 무엇인가 손해본 것(죽은 것, 가령, 재산손실, 명예훼손, 가족관계 또는 부부관계 소원)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 없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열심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