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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2. 09:23

하나님이 피난처

(시편 461-11절)

 

시편 46편은 세 연으로 나뉜다. 연을 나누는 일을 셀라가 한다. 셀라는 잠시 멈추어 듣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쉼없이, 질주하듯이 들으면 안 되고, 들으면서 잠시 멈추어 마음에 새기며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고, 정보(commercial, information)’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셀라는 단순히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충분히 멈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 얼마 전, 유럽에서 번지 점프를 하려던 여자 청년이 도우미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추락사 한 일이 있었다. “No”“Now”로 알아 들어서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긴장하니까, 의사소통이 서로 잘 안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 닥치면 긴장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셀라의 정신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시편 46편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이다.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이외의 시편의 말씀들도 마찬가지) 큰 힘이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이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하려고 마음 먹고 95개조 반박문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적 분위기가 종교개혁을 갈망했고, 그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당시 유럽은 교황, 그리고 기독교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상황이라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다른 사상을 이야기하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면 교회권력에 의해 처형되던 시대였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당겨지고 난 뒤, 마르틴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종교개혁의 뜻에 동참한 힘 있는 제후들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위클리프 같은 그의 선배들처럼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시편 46편이 유명한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이 시편을 바탕으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시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성서학자로서 시편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아마도 그는 학문적으로 주석을 쓸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시편 46편에 근거한 찬송가를 지었을 것이다. (큰 환란 가운데 있으면, 말씀이 주는 위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씀에는 참으로 능력이 있다!)

 

시편을 지어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혹독했다. 시편 46편에 나타난 그들의 혹독한 상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자연재해와 전쟁이 그것이다. 지금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속수무책이다.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운석과의 충돌 등은 지구의 생명체를 엄청나게 위협한다. 과학의 발달은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의 위협은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불감증 때문에 그렇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전쟁의 위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어제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해서 전 세계가 발각 뒤집혔다. 특별히 미국이 북한의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전쟁은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거나,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겪는 재앙 중 최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것은 엄청난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견인해 주는 견인차와 같은 신앙고백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신앙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두 가지의 일을 볼 수 있다. 첫째는 5절 말씀에 나온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마르틴 루터도 자신이 지은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돌로 쌓은 성이 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다. 우리는 흔히 돌로 든든한 성을 쌓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자체가 성(, fortress)이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적용하여,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논리다. 물론, 그렇게 적용해도 은혜되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새벽에도우신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신비를 나타내는 말이다. 새벽은 생명이 고요하게 잠자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오기 바로 직전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언제 키가 크는가? 절대로 낮에 활동할 때 눈에 보이게 크지 않는다. 키는 잠 잘 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때 큰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기의 아이들이 내 키가 클까를 걱정하지 않고 잠 자리에 드는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올까’, 걱정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난 아이의 키가 부지불식 간에 큰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새벽에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장 잘 하지 못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신다. 성경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것도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말이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 있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남유다는 끊임없이 앗수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끝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그의 부하 장수 랍사게를 보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그 일 때문에 히스기야는 어려움을 당하고,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른다. 전쟁의 위협 앞에 히스기야와 남유다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히스기야 시대 때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와 남유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19:6-7).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 랍사게의 군대는 물러가고,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 시해당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이르렀지만 홍해에 막혔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 앞으로 가면 물에 빠져 죽고, 뒤로 가면 애굽 군대의 칼에 죽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그리고 벌어진 일은 이렇다.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은 그곳을 건넜고, 애굽 군대는 홍해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스라엘이 한 일은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말도, 무기력을 드러내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 자체가 성이신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성을 쌓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붙는다. 그러한 일은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 목격하는 일이다. 각 나라와 각 개인이 (power)’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가. 대표적인 강대국, 미국, 중국, 러시아는 서로 군비경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은 북한이 그 경쟁에 뛰어들어 핵탄투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세상은, 국가나 개인이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군사(, power)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조차도 자신들이 힘을 키우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 자체가 성이시고 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들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셀라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46편이 엄중하게 선포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도다”(7,8). , , 수레, 이것은 고대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을 무력화시키신다는 것이다. , 그러한 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각 나라는, 각 개인은 자신들을 지켜줄, , , 수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전투기, 항공모함, 핵미사일,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꺾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꺾으실 것을 왜 만들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다 쓸데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시다. 이 신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실천했던 성경의 인물 중 하나는 에스라이다. 에스라서 821-23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하나님)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8:21-23).

 

에스라는 페르시아(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의 인물인데, 2차 예루살렘 귀환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바벨론(페르시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니 귀환할 때에 혹시 모를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줄 보병과 마병이 필요 없다고.

 

보통 사람 같으면 왕에게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하며 보병과 마병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이 신앙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므로, 보병과 마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스라는 귀환하는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고 하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난처를 구비하면서 사는가. ‘비 오지 말게 해 주세요’, 기도하러 오면서 우리는 반드시 우산을 챙긴다. 우리 신앙의 웃픈현실이다.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다. 이것이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셀라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토대여야 한다. ‘새벽에도우시는 하나님, 구원을 주지 못하는 엉뚱한 데 삶을 허비하지 말고가만히 있어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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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