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7. 06:13

내 삶을 깨뜨립니다 (I break my life)

(마가복음 13:37-14:9 (Mark 13:37-14:9))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 유대인 당국자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계략을 꾸몄고,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피해서 그 계략을 시행할 것을 결의한다.

Today's story tells us what happened when Jesus ate at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who lived in Bethany. Before this story is told, the Jewish authorities was making a plot of "how to kill Jesus," and decided to enforce the plan by avoiding the Passover and Unleavened Bread in which a riot of the people could take place.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값비싼 nard(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 그 행위를 보고, 어떠한 사람들은 그 여인을 꾸짖었다. 그것을 팔면 3백 데나리온 정도의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 좋을텐데,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When Jesus ate at Simon the leper's house, a lady brought an expensive nard and poured it on Jesus' head. Seeing the act, some people rebuked the woman. If she sells it, she will be able to get a price of about three hundred denarii, and it would be nice to help the poor with it, but she is wasting it on Jesus' head.

 

이 사람들의 비난대로 그 여인은 정말 잘못된 일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 여인은 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여인이 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그 여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 그 여인이 한 일은 왜 좋은 일일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위를 이렇게 규정한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

Did the woman really do the wrong thing as these people accused her? And why did she do that? Through Jesus' words, we can see what the woman is doing. Jesus says that unlike people's evaluation, the woman's behavior is not wrong. "She has done good deed to Me" (v.6). Why is she doing so good? Jesus defines the act of the woman as follows. "She has done what she could; she has anointed MY body beforehand for the burial" (v. 8).

 

이것은 그 여인이 한 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여인은 정말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일까?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여인은 예수님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이렇게 향유를 부은 것일까? 아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알았을 리 없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는 계속해서 제자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마다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This is Jesus' interpretation of what the woman did. But we can ask one question here. Did she really prepare for Jesus' burial? In other words, did the woman know that Jesus would die and poured perfume? No. The woman should not have known Jesus' death. For Mark continues to point out the ignorance of the disciples, and when Jesus preached his death, the disciples did not know what it meant.

 

그렇다면, 그 여인의 행동은 무엇일까? 왜 그 여인은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그 여인은 분명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맛 본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그가 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일컬어, 예배라 부른다. 예배는 감사의 표현이고, 기쁨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이다. 예배는 최고의 감사이고, 최고의 기쁨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If so, what is the act of the woman? Why did she act like that? The woman must have been a woman who enjoyed the joy of salvation through Jesus. So the woman came to Jesus and gave thanks to the most valuable thing she could offer. We call this practice a worship. Worship is an expression of gratitude, an expression of joy, and an expression of love. Worship is the ultimate gratitude, the ultimate joy, and the ultimate love.

 

레위기에 보면 제사의 규정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는 기름을 태워서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이다.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서 고기를 먹을 때 되도록이면 고기의 지방 부분을 다 때어내고 먹지만, 옛날에는 고기의 지방 부분이 엄청 중요했다. 고기의 지방을 섭취하지 않으면 지방을 섭취할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기를 먹을 때 지방이 좀 베어있는 (마블링이라고 한다) 고기가 맛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마블링이 잘 되어 있는 고기를 최상급으로 친다.

In Leviticus, the regulations of the sacrifice are detailed, and the best service to God is a fragrant offering of oil. Nowadays, when we eat meat because we think about health, we take out the fat part of the meat, but in the old days, the fat part of the meat was very important. If they did not eat fat from the meat, there was no way to consume fat. And, when we actually eat meat, meat with a little fat (called marbling) is delicious. So, in Korea, marbled meat is best served.

 

우리는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제사를 기억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에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뒤, 기브온 산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다. 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때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일천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와 기쁨과 사랑이다.

We remember the offering of Solomon in 1 Kings 3. After Solomon became king of Israel after his father David, he went to the high place of Gibeon and worshiped God. Worshipping there and he give a thousand burnt offerings to God. A sacrifice to bring a thousand cows together is not something that anyone can give, nor is it offered at any time. Considering the meaning of the number "one thousand," one thousand burnt offerings by Solomon are the greatest gratitude, joy, and love that Solomon can express to God.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뒤, 12장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로마서는 온통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논증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논증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The apostle Paul goes to chapter 12 after he preaches the gospel of Jesus Christ in Romans.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b]spiritual service of worship." (Romans 12: 1). In Romans, Paul argues all over who is Jesus, why Jesus is the Christ, and what it means. Then, he emphasizes that Jesus Christ, whom he has argued, is worthy of our worship.

 

한 여인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고, 그가 바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래서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지 최고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예배했다. 물론 그 여인은 자기 자신이 한 행동인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A woman has suffered a lot of hardships while living. However, the woman met Jesus one day and realized that he was the Messiah (Christ). The woman was able to start a new life through Jesus Christ, and she worshiped Jesus with the best of things. Of course, she did not know that she was preparing for the burial of Jesus, but she eventually did with God’s grace. God is doing great things through our devotion in ways we do not know. We do not know all the will of God, but we do our best to love God.

 

내 삶을 깨뜨립니다라는 고백은 한 여인이 값비싼 나드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처럼,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드려 예수님을 예배하겠다는 최고의 감사이고, 최고의 기쁨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본문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최고의 것을 드려 예수님을 예배한다.

A confession that "I break my life" is that of faith that will give our lives to Jesus just as a woman broke and poured over the expensive nard to the head of Jesus. This is the ultimate gratitude to give our lives to worship Jesus, the ultimate joy, and the ultimate love. As seen in the text, those who do not know who Jesus is are trying to kill Jesus, but those who know who Jesus is worship Jesus by offering the best.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예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한 여인이 가장 값진 것을 깨뜨려 예수님을 예배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깨뜨려 예수님을 예배한다.

Today, we gather together to worship Jesus, because we are the people who know who Jesus is. Jesus is the Messiah (Christ) who saved us. So we break our lives and worship Jesus Christ just as the woman worships Jesus Christ with the most valuable thing in the Bible.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쓰여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의 감사, 최고의 기쁨, 최고의 사랑을 담아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예배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배 드리는 이 순간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자. 주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We do not know how today's worship will be used for the glory of God. However, if we worship with the highest appreciation, the highest joy, and the highest love, God will receive our worship and will use our worship for His glory in a mysterious way. Therefore, let us rejoice and enjoy this moment of worship. The Lord works through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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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8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왕상 3:1-15)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먹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것은 뱀의 속임수였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능력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뱀은 인간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욕망을 이용하여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도한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의 고유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하는데,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불합리해 보이지만, 우리의 눈에 보기에 선한 것도 하나님이 악하다고 판단하면 악한 것이고, 우리의 눈에 보기에 악한 것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판단하면 선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개념인데, 자칫 잘못하면 오용되기 십상이기도 하다. 일례를 들어서, 사무엘하 11~12장은 다윗의 죄와 나단의 지적, 그리고 다윗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요즘 실정법에 의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를 범한다. 그런데 다윗은 구속되거나 실형에 처해지지 않는다. 다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우화를 통해 그의 잘못을 지적할 뿐이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다윗이 회개했다는 진술이 나오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다윗의 회개가 그의 법적 책임을 피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me too 운동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미투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나도 당했다는 고발은 피해자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기까지,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가해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거나 피해자에게 제 2차 피해(합의 하에 진행된 일이라는)를 가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보다 더 헷갈리고 당황스러운 상황은 가해자가 스스로 용서 받았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아이를 죽인 가해자는 감옥을 찾은 아이의 엄마에게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선언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 안태근 검사 간증 사건을 통해 보듯이, 그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간증집회를 통해서 선언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예이다.

 

위의 상황이 바로 회개와 용서가 오용된 경우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해자 중심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회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고, 용서도 가해자가 받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경에 나와 있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복음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피해자가 무시된다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는 심판을 받아야지,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회개를 통해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가 피해자에게 입힌 상처를 심판 받는 것이다. ,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졌을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인간에게는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문학계에서는 고은 시인의 불의한 행동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다. 수원 시와 맺은 협정이 파기되었을 뿐 아니라, 수원 시에서 제공한 집에서 고은 시인은 방을 빼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교과서 제작 업체들은 교과서에 실린 고은 시인의 시를 걷어내는 작업을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 왕의 불의한 행동을 보면서도 여전히 다윗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편을 성경에서 걷어내거나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애독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성경은 왜 다윗 왕의 치부를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최고의 신앙인으로 추앙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그것이 다윗에게 드러나고 있다. 다윗은 비록 불의한 행동을 했지만, 회개를 통하여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상식선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로 처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적 주권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여전히 의인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이야기에서 솔로몬이 간구하는 것은 보통 엄청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기브온 산당 제사 사건은 여러 가지를 말해 준다. 우선,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 다윗의 신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새로운 왕이 된 솔로몬에게는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제스쳐이다.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되고 있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왕위는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기까지 전개된 살얼음판 같은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수많은 왕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앉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 입증이었다. 기브온 산당 제사는 그러한 갈망에 대한 성취이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사람들은 그 제사를 받은 하나님의 반응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응답을 하신다. 성경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 날 밤에 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Ask what you wish me to give you?)” (5)

 

하나님 앞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어 자기를 작은 아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또한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선악을 분별하는 것재판을 연결시킨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그래야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보통 사람은 장수와 부, 그리고 복수를 간구한다. 지극한 인간의 마음이다. 오래 살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자기에게 못되게 군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인간의 평범한 마음이다. 사실, 우리의 간구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솔로몬이 구하는 듣는 마음선악 분별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겠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은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솔로몬의 욕망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솔로몬이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얻고 싶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의 성취라기보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간구한 것이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일천 번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얻는 지혜를 가지고 통쾌한 재판을 하고 있지만, 결국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 또한 솔로몬의 죄악 때문인 것을 확인한다. , 우리가 아무리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려고 한다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판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선악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해야 하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제단을 끊임없이 쌓는 것이다. , 끊임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여 평화를 누릴 것이고, 이것을 불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평안치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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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5

광야로 가자

(마가복음 1:12-15)


우리가 하도 성경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지 성경의 세계는 참 낯선 세계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중동의 세계를 잘 모른다. 중동은 한국 사람이 가장 낯설어 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다른 문명은 잘 받아 들이는데, 이슬람 문명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동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광야 문명이다. 낙타가 대표적인 예인데, 낙타만큼 광야(사막)에 적합한 동물이 없다. 오늘 말씀 제목이, ‘광야로 가자이지만, 우리는 이게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광야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광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약간 이해라도 하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광야라는 개념을 갖기 힘들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정말로 아름다운 시이지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광야에서의 목축업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경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려주신 후, 어떻게 그를 광야로 몰고 가시는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아들인데, 다른 좋은 곳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광야인가?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idbar)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다바르dabar’의 합성어이다.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말씀이라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단어를 더 보자. 히브리어로 성전은 미크다쉬(Mikdash)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거룩을 뜻하는 카도쉬(kadosh)’의 합성어이다. , 히브리어에서 어떠한 단어 앞에 mi’자가 붙으면, 그 단어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뜻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거룩함(카도쉬)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성전(미크다쉬)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임하는 곳이 광야(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광야의 개념과 고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광야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이다.

 

출애굽기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인생을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예의 신세를 벗어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은 그들이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이다.

 

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다. 모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왕궁에서 성장한다. 모세는 자라나면서 자기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왕궁 밖에서 불의한 장면을 목격한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과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인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칭찬 받을 거라 생각했어.”

 

그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는 것을 목격한다. 그래서 모세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런 나도 죽이려느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는 결국 두려움에 사려 잡혀, 왕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도망친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왕궁에서 왕의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언 광야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양을 치고 있을 때, 광야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이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같은 것을 목격한다. 블레셋의 위협 때문에 세워진 왕 사울은 여느 때와 같이 블레셋과 대치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버티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울은 백방으로 적장과 싸워 이길 이스라엘의 장수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인 골리앗과 상대하겠다는 장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심부름을 갔던 목동 소년 다윗이 사울 왕에게 나아가 적장 골리앗과 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내어주지만, 다윗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평소에 즐겨 쓰던 물매와 돌 다섯개를 주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선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 47).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것을 무슨 군사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다윗은 평소 광야에서 양을 치며, 곰과 사자가 덤빌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매로 그들을 물리쳤고, 광야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배웠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광야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지켜내기 위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 뒤에, 이세벨의 살해 위협 소식을 듣고 도망치던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던 사명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도망치던 중간에 탈진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한다. “자기 자신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그렇게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루만져 살리신 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여, 결국 엘리야는 광야 깊은 한 곳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고 세상으로 나시 나온다.

 

모세가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왕궁 교육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윗이 아무도 이기지 못했던 골리앗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져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힘든 상황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여 모든 인류의 구원의 소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광야는 물리적 장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 신앙의 선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광야로 나가거나, 광야로 불러내어졌다.

 

우리는 자녀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마땅하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온갖 좋은 곳을 다 구경 시켜주고, 좋은 곳을 다 데리고 간다. 할 수 있거든, 더 많이 하시라. 그러나, 우리가 광야의 영성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이들을 광야로 보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중요한 삶의 문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는 도서관에서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서 조언을 구한다 해도 풀지 못한다. 광야로 나가, 적막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현대인들의 삶이 불안하고 힘든 이유는 삶 속에서 광야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광야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려한 불빛의 도시만이 자리 잡고 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바벨에 세워진 성읍과 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지혜로 살아가겠다고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들의 교만을 고발한다.

 

실제로 도시의 삶 자체는 먹고 사는 데만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광야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도시의 문화가 그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 수요일은 214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의 수요일로 지키며 사순절에 들어갔음을 인식하고 공포해야 하지만,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기 때문에 교회보다는 레스토랑이 붐볐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를 생각하기 보다는 초콜릿을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절기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의 이 선포가 진지하게 들린다면, 성령께 간구하라. “나를 광야로 데려가 주세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새창조의 역사가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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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13. 14:19

갑절과 겉옷

(왕하 2:7-14)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다. 복음서(마태 17:1~9, 마가 9:2~8, 누가 9:28~36)에서 전하고 있는 산상변모 사건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제자도에 대한 제시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파악된 예수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몸으로서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우리는 과연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평생에 걸쳐서 묵상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몇 가지 나눌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척도는 유일신 신앙에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의 척도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삶 속에서 얼마나 인정하면서 사는냐에 달려 있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3).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은 왕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제 1계명을 무시하며 살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인이었다.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아합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엣바알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데, 역모를 일으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 한 자이다.

 

바알신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였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왕실의 신앙을 허물기 시작했다. 바알의 사당을 전국 곳곳에 세우고, 바알의 짝 신이라고 숭배되었던 아세라상을 만들어 바알 신당에 두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의 욕심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 비난 받은 이유는 그가 단순히 나봇이라는 사람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서가 아니다. 그것 자체로도 말할 수 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이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제 1계명을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았다.

 

엘리야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한 정치권력에 맞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과 맞서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다.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이긴 뒤, 정치권력의 위협 때문에 망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서, 로뎀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지 않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토대이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 자체를 내어놓아야 한다. 그만큼, 신앙은 진지한 삶의 성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생명)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바빠서 그런 게 아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신앙의 속성 자체가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중에 열심히 일한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 일은 그 자체가 고된 노동이다. 신앙은 그러한 생명 유지에 대한 심화이다. 신앙은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발견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열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우리의 노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다. 노동은 소중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노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잇닿아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노동의 노예로만 살게 될 뿐이다. 생명의 해방은 노동을 열심히 하는 데서 오지 않고, 노동과 하나님을 연결지어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데서 온다. 그럴 때,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이 복 주신 즐거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노동은 지겨워진다.)

 

엘리야가 한 일은 단순히 타락한 정치권력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노동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잘 마치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엘리사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선지자 생도 문하생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동네 아이들이 그를 놀리던 것을 보면,아마도 그렇게 인기 있는 문하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인기 있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엘리야를 끝까지 따랐던 엘리사였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두루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 마지막 여정에 끝까지 함께 했던 엘리야의 문하생은 엘리사였다. 그 여정을 전하고 있는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사는 룻기서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붙좇은 룻과 같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6).

 

요단강에 이르러 이제 하늘로 들림을 받기 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는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 그에 대해 엘리사는 이런 간구를 한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 엘리사의 간구를 엘리사의 욕심으로 보면 안된다. 엘라사의 간구에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

 

여기서 어려운 일이란 엘리야가 엘리사의 간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정녕 네가 내가 지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엘리야가 했던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엘리사는 지금 스승이 하던 그 일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이 짠한 상황이다.

 

갑절이라는 뜻은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욕심의 표현이 아니고 계승의 표현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는다. 그래서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배(갑절)를 받는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한 것은, 그가 스승 엘리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장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곳저곳을 다닌 이유는 그의 문하생 중에 누가 자신의 유업을 물려 받는 장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엘리야에게는 50명이 넘는 문하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멀리 서서 엘리야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사만이 엘리야 곁에서 엘리야의 부르심을 지켜보았다.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장자가 되어 엘리야가 행한 일을 이어서 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엘리야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물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 엘리야의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표현이다. 엘리야의 인생은 에너지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서 보야 하는 말씀은 엘리야의 죽음 뒤에 벌어지고 있는 엘리사의 행동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죽자 이렇게 소리지른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 이것은 이제 자신이 아버지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서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에 선포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은 이것이다. “이에 엘리사가 자시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12). 이것은 괴로운 마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버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제 엘리사는 더 이상 이전의 엘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엘리야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행동이다. 겉옷을 영어로 ‘mantle’이라고 한다. ‘mantle’에는 겉옷이라는 뜻의 심화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임지다의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 이유는 이제 그가 엘리야가 하던 일을 이어서 책임지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지고 가던 십자가를 집어 든 후,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포를 다시 확인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책임지고 사는가?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노동하는가? 우리의 노동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맞닿아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나와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게 살고 있는가?

 

흑인해방신학자 제임스 콘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흑인해방신학(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이런 말을 했다. No one can be free until all are set free. (James Cone,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 “모두가 자유롭게 될때 비로소 나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상대방에게 자유가 없는데, 어찌 나만 자유를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가난한데, 어찌 내가 부자로 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안식이 없는데, 어찌 나만 안식을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나만 구원에 이를 수 있나.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안식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번 수요일에 드리는 재의 수요일예배를 통하여 사순절에 들어간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이유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신에 채우는 절기이다.

 

우리는 그 절기를 평화 기도회로 시작하려고 한다. 평창올림픽을 통해서 남북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세워 나가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 기도회를 하려고 한다. 외신들의 보도에 의하면, 현재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남북관계 개선되면 트럼프 정부와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고, 트럼프 정부와 뜻을 같이 하면 남북 평화가 깨지거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남북 단일팀이 입장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환영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미국의 펜스 부통령의 행동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조국,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한국인으로서, 통일을 위한 기도와 노력,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 우리의 조국,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보다 더 간절하고 바쁜 일이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갑절의 영감과 겉옷을 두른, 십자가의 군병들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을 위해 변화산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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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라인홀드 니버에서 시작되는 나의 정치신학적 관심과 과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매일 같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이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은 다르다. 집단은 개인이 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타적이지 못하다. 집단은 매우 이기적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다. 그런데, 연일 뉴스를 통해서 들려오는 교회 집단의 소식은 참담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라인홀드 니버는 그러한 괴리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다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의 원리를 통해 움직일 수 있지만, 집단은 그 도덕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리 집단(교회)에 양심적인 호소를 해도 집단(교회)은 그 도덕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집단에는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를 대할 때 이러한 것을 간과한다. 일례를 들어, 요즘 교회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목회 세습의 경우에서도 보면, 세습을 감행하는 개인 목사나 그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인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습을 감행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집단에 흐르는 정치적인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그들은 그들의 도덕적 양심에 흔들려 세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목회 세습을 끊어내고 방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면 안 되고, 목회 세습에 얽힌 집단의 정치적 영역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가진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이 이성(또는 양심적 호소)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버의 분석과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거기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힘을 소유한 정치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인간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이 아무리 비도덕적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도덕이 집단의 도덕보다 뛰어날 수는 있지만, 개인의 도덕 자체의 질적인 향상은 그 자체로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리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로 양성하기 위한 자기들만의 도덕을 주입한다. 이미 주입된 도덕적 페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항세력이 정치적 힘을 가지고 도덕적인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이해 또는 가치가 상충되는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자칫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니버는 그에 대하여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non-violent coercion)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운동이 사회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 보여준 촛불혁명은 니버가 제시한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의 한 예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운동을 통해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는 했지만, 과연 세상이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의 관심은 니버가 말하고 있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도덕을 지닌 개인들 간의 연대(solidarity)를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연대(solidarity)에 자기 자신을 투신(내어줌)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아무튼, 교회는 집단으로서,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윤리의 양심적 호소로만 정의로워질 수 없다. 집단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접근법보다는 정치적 접근법이 훨씬 중요하다. 교회라고 하는 집단은 개인의 도덕과는 상관없이 그 집단 자체의 속성에 따라 집단이기주의적인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부정의한 정치적 욕망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하나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자체를 집단의 속성을 담지하지 못하도록 해체하는 것이다. 첫째의 방법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고, 둘째의 방법은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제자들, 특히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둘 중에서, 21세기 교회와 사회에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연구를 해봐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질 들뢰즈의 철학(리좀, 노마디즘, 멀티플러서티)과 요한 밥티스트 메츠(Dangerous memory)의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의 문제를 정치신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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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1. 09:46

에벤에셀과 한반도 평화

(사무엘상 7:1-14)

- 북핵문제와 미국의 대응을 걱정하며 - 

 

오랜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시간적으로는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나온다. 20년 동안의 사무엘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건강하게 성장한 것 같다. ‘미스바로 모이라는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미스바로 모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부르심대로 성장하는 것은 공동체의 축복이다. 특히나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끝자락을 산 사람인데, 사시기의 이야기와 엘리 제사장 가문의 이야기, 그리고 법궤를 빼앗긴 이야기를 보면 사무엘이 살던 시대가 얼마나 혼탁한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시대 가운데서도 그 시대를 보듬으며 이겨나갈 복 있는 자를 세워 가신다.

 

그러한 사람은 룻기서와 사무엘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일반 사람들 중에서는 보아스와 룻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 있는 자이고, 지도자들 중에서는 사무엘이 돋보인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때문에 사회가 혼탁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당신의 일꾼을 세워 가신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일꾼으로 택함을 받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것만큼 인생에서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무엘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은 매우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기가 어떠한 시기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법궤사건이다. 법궤는 원래 성막에 있어야 하는 거룩한 물건이다. 그러나 법궤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데 가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이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다른 것이 들어가 있으니,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2절 말씀에 등장하는 사모하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사모하니라로 번역했지만, 이 말은 히브리어의 나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lamented’로 번역하고 있다. , ‘나하울부짖다’, ‘신음하다’, ‘애도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하나님, 못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탄식(lament)’는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다. 탄식은 성령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다. 우리가 탄식할 때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한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지면 탄식하지 않는다. 그저 불평할 뿐이다. 불평과 탄식은 질적으로 다르다. 불평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만 바라보며 그 너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고, 탄식은 그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손을 뻗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뻗는 손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탄식하자, 하나님은 오랜 세월 준비된 사람, 사무엘을 보내신다. 사무엘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보냄 받은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탄식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3).

 

이게 굉장히 쉬운 말이고, 쉬운 행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지 모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아플 때 왜 아픈지 모른다. ‘아파,아파하면서도 왜 아픈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생명을 잃는다. 그런 현상이 이스라엘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한 말씀은 쉬운 말 같으나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이 왜 아픈지, 그 아픔 가운데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적인처방전이다.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대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탄식은 거짓 탄식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탄식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한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그들의 결단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미스바에 모여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한 행동은 기도와 회개였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은 세 가지의 행위를 한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 ‘종일 금식하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세례를 연상시킨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나온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2:19). 이것을 미루어 보건데,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종일 금식했다. 금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시라는 신앙고백이다. 밥이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우리는 금식하면서 이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금식은 단순히 극기 훈련이 아니다. 금식은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지에 대한 자각이다.

 

미스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자복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순간에 그 거룩한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블레셋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7).

 

사탄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했던 일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끄집어 낸 뒤, 그곳을 잡동사니로 채우는 데 집중한다. 보통 사람은 그러한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마음의 중심을 잡동사니로 채우고 산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이 어지러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믿음이 없는 자와 믿음이 있는 자의 행동이 갈린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블레셋의 공격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쳤을 것이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미스바를 탈출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겠다고 결단한 미스바의 이스라엘은 다르게 행동한다. 그들은 두려웠지만,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무엘은 그들의 부탁대로 온전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다. 여기서 온전한 번제란 그들의 간절함을 표현한 예배라는 뜻이다. 보통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가죽과 내장은 태우지 않고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기서온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뜻은 제사장(사무엘)에게 돌아갈 가죽과 내장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똑똑히 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여기서 신비로운 방식이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큰 우레로 표현하고 있다. 우레는 천둥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잘못된 표기는 우뢰이다. 마가복음 317절에 보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님은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데, 많은 곳에서 우레의 아들우뢰의 아들로 잘못 표기하는 것을 본다.)

 

하늘에서 우레가 발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로 인식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는 블레셋을 벧갈 아래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물리친다. 블레셋을 물리친 뒤, 사무엘은 돌을 하나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그 돌을 세워놓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 칭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가려져서 그렇지, 대한민국의 상황이 풍전등화와 같다. 프럼프 정부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태세이다. 이는 올림픽을 통하여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도모하는 세계와 반대되는, 블레셋과 같은 행동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완성하고, 그 핵무기를 미국 본토까지 실어나를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개발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대한민국을 제껴놓고 독자적으로 북한을 폭격할 태세이다.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가 양 진영에 갖춰진 시대에 전쟁은 공멸하는 지름길이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국지전과 핵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은 그 피해가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걱정스러울 뿐더러, 대한민국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좁게는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두려움간절함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의 모든 국민이 하나님 앞에서 물을 붓고 온종일 금식하며, 온전한 번제와 기도를 할 때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미국도 북한도 서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창이 미스바와 같은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올림픽이 에벤에셀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 이스라엘에는 회복과 평화가 깃들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렛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4).

 

조국 대한민국, 한반도의 평화는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평화를 다른 사람 손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한국 교회는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29~ 25)을 미스바 성회로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한 예배와 온종일 금식하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한 돌(또는 십자가)을 가져다가 평창에 세우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여, 한반도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한반도에 평화를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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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