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8.03.31 가상칠언
  2. 2018.03.30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3. 2018.03.30 죽음은 생명이다
  4. 2018.03.28 거절당한 메시아
  5. 2018.03.27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6. 2018.03.23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7. 2018.03.20 때와 순종
  8. 2018.03.15 감춰진 악 1
  9. 2018.03.13 구원은 은혜다
  10. 2018.03.08 통증과 (중보)기도
  11. 2018.03.05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12. 2018.03.02 용서를 택하라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1. 14:27

가상칠언

(마가복음 15:34)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

둘째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셋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

넷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번역하면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46; 15:34; 22:1).

다섯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19:28).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19:30).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예수님은 제 삼시(오전 9, 성경의 시간 계산은 플러스 6을 하면 된다.)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 당하시다, 제 구시(오후 3)에 운명하셨다.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는 유대인의 시간 계산을 적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헬라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냥 사건만 기록할 뿐이다.

 

흔히 말하는 가상칠언(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셨다는 일곱 가지의 말)4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말을 모아서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떠한 순서로 그런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는지, 정확한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네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나니를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에서 따온 말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구약의 예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다.


누가복음은 가상칠언 중 세 개의 말씀이 나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그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이다. 순서로는 첫째 말씀과 둘째 말씀,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상의 말씀은 매우 따뜻하다. 원래, 누가복음은 시선이 따뜻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누가복음의 십자가 상의 말씀에는 용서와 사랑이 깊이 베어 있다. 우리가 알지못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것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시선이 너무 감사하다. 그러한 시선은 정말 닮고 싶은 시선이다.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도 너무 감동적이다. 또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신뢰도 강한 인상을 준다.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예수님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넓어질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에도 누가복음처럼 가상칠언 중 세 개의 말씀이 나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와 “내가 목마르다”(19:28), 그리고 “다 이루었다”(19:30)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상의 말씀은 매우 인간적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 그리고 목 마르다고 하시는 말씀, 모든 게 다 끝났다고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것이 매우 인간적이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과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의 개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영지주의의 도전에 맞서고 있다. 특별히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실제 죽음과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데, 요한복음은 그것에 맞서 예수님의 실제 죽음과 육신의 부활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굉장히 중요한 믿음이다.

 

가상칠언은 각자 복음서의 관심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가상칠언에 담긴 의미만 잘 파악해도, 복음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가상칠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알수 있다. 가상칠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주간, 특별히 성금요일에 가상칠언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두 가지의 계명,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욱더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사랑 내 곁에  (2) 2018.04.30
두려움, 숨, 평강  (0) 2018.04.10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0) 2018.03.30
죽음은 생명이다  (0) 2018.03.30
거절당한 메시아  (0) 2018.03.2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12:37

새언약: 에클라센과 엑케오

(마가복음 14:22-25)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이런 질문을 주고 받는다. “만약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먹고 싶은가?” 참으로 낭만적인 대화다. 실제로는 우리가 언제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될지도 모를 뿐더러, 마지막 식사는 우리의 바람처럼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게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먹고 싶은 것 많이 먹으면서 사는 게 좋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라기보다는 신학적 만찬이라고 해야 옳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율법을 토대로 한 언약을 체결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명절인데, 유대인들은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그날 어떻게 하나님의 그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월절 만찬과 출애굽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의식을 가졌다.

 

유월절 만찬에서 유대인들은 세 가지의 음식을 먹었다. 누룩 없는 빵, 양고기, 그리고 쓴 나물이 그것이다. 유월절 만찬에서 가장은 포도주 잔을 들고 4번에 걸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이 출애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교를 한다. 그렇게 그들의 신앙은 세대와 세대에 걸쳐 전수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날,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즘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많이 잃어버렸다. 유대교 회당에는 친교실이 없다고 한다. 밥은 집에 가서 가족들과 먹으며,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는 특수한 상황이 있어 교회에서 함께 식사하며 친교를 나누지만, 가정에서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신앙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새언약을 제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워질 새로운 언약에 대하여 유월절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설명하신다.

 

우선, 22절의 말씀 중,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에서 떼어라는 말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떼어는 헬라어 에클라센을 번역한 것이다. ‘에클라센깨다, 부수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몸을 가리킨다. 이 고난은 언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24절의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흘리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케오의 원뜻은 쏟아내다, 부어주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폴론많은 사람 위에로 번역 가능하다. 이 원뜻을 살려 위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이것은 많은 사람 위에 쏟아 부어 주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은 법()적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된 것은 언약(covenant)’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법이다. 그 법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되어, 구원 받게 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법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을 영어로 ‘undocumented immigrants (서류가 미비된 이민자)’라고 한다. 여기서 서류는 법적인 서류를 말한다. 구원은 매우 법적인 용어이다.

 

신약의 대표적인 복음인 사도 바울의 로마서 또한 법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구원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가장 중요한 용어는 칭의(Justification)’이다. 이것은 법적인 용어이다. ‘칭의란 의롭지 못한데, 의롭다고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불법체류자로 예를 들면, 그들이 서류를 제대로 구비하지 못했는데, 구비가 됐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새언약을 체결하신다. 그의 살과 그의 피가 새언약의 법전이다. ‘새언약즉 예수 그리스도의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옛언약인 율법과 새언약인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증한다. 바울의 요점은 이것이다. 율법은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낸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만든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을 죄인 만들지 않고, 의인을 만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칭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8:1-4).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칭의로 구원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2:8)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살과 피로 맺은 새언약은 옛언약과 비교해 하나님의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자비, 사랑)(Radical Grace and Mercy(Love))을 보여준다. ‘은혜는 햇볕과 같은 것이다. 죄인이나 의인이나 동시에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공공재를 말한다. 은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때로는 의인처럼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죄인의 자리에 설 때가 많다. 만약,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 누리던 하나님의 돌보심을 죄인이 되었을 때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은혜는 그런 것이다.

 

긍휼(자비,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말한다. 일반적인 관심이 친절함과 애정은 다르다. 우리는 살면서 애정을 갖게 되는 상대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된다. 거의 100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가 어느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이 평생 젊을 때 서로에게 갖던 애정을 가지고 살지 못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에게 애정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 동포애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우리를 영원히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긍휼(Mercy)라고 한다. 처음에 애정을 가질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거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애정이 사라진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정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정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책임지신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법적인 용어로 옮기면, ‘칭의라고 하는 것이다. ‘의인이 아니지만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 이것이 애정이다. (내 자식이 죄를 지었는데, 남들은 다 손가락질해도, 부모는 내 자식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새언약을 제정하시고, 그 새언약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이루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겼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아 부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고,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효력이 발생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공동체로서 나누는 성만찬은 새언약의 갱신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세우신 새언약을 생각한다. 그 언약은 에클라센(살이 찢기고)과 엑케오(피를 쏟아 부으신)’의 행위를 통해서 세워진 값비싼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유월절 식사를 하며,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목요일(유월절 만찬 나누던 때)에 성목요일 만찬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위에서 찢기신 살과 쏟으신 피의 의미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지면 좋겠다. 더 나아가, 매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려움, 숨, 평강  (0) 2018.04.10
가상칠언  (0) 2018.03.31
죽음은 생명이다  (0) 2018.03.30
거절당한 메시아  (0) 2018.03.28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0) 2018.03.2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05:25

죽음은 생명이다

(마가복음 14: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죽음은 인류 최후의 원수이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실존과 함께 살아 왔고, 살아가야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대항 또는 저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나,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종교는 죽음에 질문을 통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어느 고등 종교이든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답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고, 신은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과는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증거하다시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발생한 종파도 있다. 대표적인 종파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도전과 난점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발전된 교리가 삼위일체교리이다. 삼위일체교리는 신의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다. 삼위일체교리로 인해, 기독교는 신이 죽었다는 것신이 살아 있다는 두 가지의 주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는 온통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예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음모를 꾸몄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름 모를 여인의 행동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고,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도 죽음의 음모에 동참하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이 말에 빗대서 죽음을 설명해 본다면, ‘죽는다는 본질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저 마다 다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크게 네 사람이 등장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향유를 부은 여인, 가룟 유다, 그리고 예수님이다. 우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이 그러한 음모를 꾸민 이유는 예수가 자신들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자기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이런 자들에게 죽음은 폭력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들에 의하면, 죽음은 폭력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저급한 이해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여인은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이다. 매우 값비싼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를 부은 이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매우 신성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들이 죽음에 대하여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성함이 들어 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22권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나온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내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는 동안 전쟁을 멈추기로 협의한다. 그들이 전쟁을 멈춘 이유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신성함이 죽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담하여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 가룟 유다가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아서가 아니다. 가룟 유다는 젤롯당원이었다. 젤롯당은 무력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민족을 구원하길 바랐다. 가룟 유다가 희망한 메시아 상은 예수가 스스로 드러낸 메시아 상과 달랐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죽음에 몰아 넣음으로 예수가 자신들의 원하는 메시아 상의 모습을 보이기 바랐다. ,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일을 추진하기 위한 동기(Motive)로 작용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도 사람들이 보통 갖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또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동기를 불어 넣어 준다. 대개 인류 역사에서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섰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 죽음과 같은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생활고에 시달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악보를 썼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음악을 낭만적으로 듣고 있지만, 그들이 지어낸 음악은 낭만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건네 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아니 그야말로 새창조의 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했고, 그들은 죽음을 이용했고, 그들은 죽음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쳤고, 그들은 배반했고, 그들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분리된 부정의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과 죽음은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자리를 피해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한 가운데서 그 죽음을 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말은 죽음 또한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여느 사람이 비방하듯 자살행위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부정적인 것(죽음)을 가장 긍정적인 것(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죽기 때문에 부정으로 떨어지지 않고 긍정으로 승화되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지 않았다. 죽음을 불의하게 이용하지도 않았고, 죽음 때문에 배반하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멀리서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도행전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은 광장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2:14). 제 삼시는 오전 9시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계를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일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는 죽음도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더럽게 이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새창조에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죽음으로 불리지 않고 생명으로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참 자유인인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상칠언  (0) 2018.03.31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0) 2018.03.30
거절당한 메시아  (0) 2018.03.28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0) 2018.03.27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2018.03.2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8. 13:28

거절당한 메시아

(마가복음 12:1-12)

 

우리는 살면서 거절을 하거나, 거절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산다. 거절할 때도, 거절당할 때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러나, 거절하거나 거절 당한 것 때문에 삶이 평안하기도 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거절은 긍정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두번째 날은 온통 거절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성전관리자들(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거절한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들은 권위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러한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간단한 질문 같지만, 권위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정치학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구 역사에서 권위 문제를 일으킨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 레타 세 모아)’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그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왕권신수설때문이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마땅히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5살 때 왕이 되어,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리다,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아들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루이 14세가 죽자, 국민들 중에 슬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국민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권위는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삶이 달라진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권위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전에 대한 권위는 자신들의 것이며, 예수에게는 성전에 대한 권위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권위 대한 부정이요, 권위를 그들이 얼마나 부정하게 썼는지에 대한 고발이었다.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다음으로 세금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그룹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은 것이니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세금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햐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중차대한 질문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라라고 대답하면 유대인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라고 대답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나 저렇게 대답하나 예수님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될 형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2:17). 이 문제는 지금도 핫이슈이다. 특별히 종교인 과세를 시행한 대한민국에서는 세금 문제로 인해 교계에 한바탕 논란이 불었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세금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국가에서 국민복지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기 때문에 종교인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방법으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은 오히려 종교계가 나서서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거절한 부류가 등장하는데, 사두개인들로 그들은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과 대결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두개인들은 다른 정치권력 세력들보다도 훨씬 부유층으로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대개 이 땅에서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땅에서 특별한 고통이 없으니, 굳이 사후의 평안을 바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믿는 바, 부활의 세계는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대결혼(고엘법)은 일종의 사회복지법이다. 남편(가족)의 도움 없이 생계를 꾸려갈 수 없었던 고대 여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그래서 율법에는 자식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낸 여인은 그 남편의 동생(친족)이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러한 고엘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한 집 안의 남자 일곱이 모두 한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나중에 부활하여서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래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질문들이 가진 의미를 아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예수님께 그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 문제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다.

 

그들의 거절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여 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대신 농사짓게 하고 타국에 가 있는 중이다. 때가 이르러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소출을 내어놓기는 커녕 종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한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이 적어도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농부들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농부들 자신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1-2)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한 이야기로 읽어야 이해가 더 확실해 진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느닷없이 '머릿돌' 이야기를 하신다. 머릿돌 이야기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 근거이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버림 받은, 거절 당한 포도원 농부의 아들로부터 건축자의 버린 돌 이야기로 초점을 옮긴 이유는 문학적 비유이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돌은 에벤이다. ‘에벤사이에 있는 언어적 유사점을 이용하여, 거절당한 아들이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고,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거절당한 아들이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생각,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말세에 메시아가 와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을 신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발생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리고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거절하여, 버림받고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시편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거절당한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믿지 못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메시아를 거절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쯧쯧 혀를 차며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층이었고 지식층이었다. 그러한 자들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메시아의 거절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구분한 뒤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 같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7).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오른편의 의인들은 의아해 하며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는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대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자들, 헐벗고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 또는 그 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섬기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메시아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이지, 환영 받은 개선장군을 통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곧 메시아는 아니다. 하지만,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0) 2018.03.30
죽음은 생명이다  (0) 2018.03.30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0) 2018.03.27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2018.03.23
때와 순종  (0) 2018.03.2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7. 16:40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마가복음 11:12-19)


며칠 전 토이즈러스의 설립자 찰스 라자러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8, 25세의 나이로 전후 세대의 장난감 수요를 예측하고 세운 토이즈러스는 그가 떠나기 일주일 전 경영 악화에 따른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다.

 

참 마음 아픈 소식이다. 자식 같은 사업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 같아, 그의 부고 기사를 읽고 마음이 짠했다. 토이즈러스(Toysrus)라는 이름은 Toys(장난감)과 그의 성(Last name)인 라자러스에서 ‘rus’을 합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R자가 거꾸로 표기한 이유는 아이들이 알파벳을 배우면서 흔히 하는 실수인 ‘R’을 거꾸로 쓰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토이즈러스는 동심을 반영한 사업인 것이다.

 

토이즈러스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월마트와 아마존의 등장을 꼽는다. 월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토이즈러스는 장난감을 가장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월마트가 등장하면서 그 명성이 무너졌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 영입된 토이즈러스의 CEO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토이즈러스 매장을 장난감 체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것을 통해서 토이즈러스는 아이들을 매장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토이즈러스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갑을 여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였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에 비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원한다. 물론 아이들이 토이즈러스에서 본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만, 아이들의 조름에 넘어가는 부모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결국, 부모들은 장난감 구입을 토이즈러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물품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월마트나 아마존에서 구입한다. 장난감 체험이 구매로 이어지지 않자, 결국 토이즈러스는 적자를 못 이기고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에게는 토이즈러스 매장이 문을 닫는다는 것, 그곳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 장난감 체험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일례로, 우리 아이들에게 토이즈러스 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큰 아이는 그것이 아마존 때문이냐고 반문했고, 그러면서 왜 정부(government)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치고 꽤 똑똑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아이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주고, 네가 그 해결 방안을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숙제를 던져주었다.) 작은 아이는 내 핸드폰을 잠시 달라고 하더니, 갑자기 아마존 앱을 지워버렸다. 동심에서 우러난 진지한 행동이었다. 아마존 때문에 토이즈러스가 망했으니, 아마존 앱을 지워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 것이다. 이처럼, 토이즈러스가 망한 사건은 아이들에게 여러모로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본문에 등장한 사건도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심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간극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고, 그 당시 성전시스템에 혜택을 보던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일단 날이 저물자, 예루살렘 근처 도시인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즉 고난주간 첫째날인 월요일에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못하셨는지, 예수님을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배가 고프셨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서 먹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서 열매가 없나 살폈지만 나뭇잎만 무성한 것을 발견하신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필요 없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와 더불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 사건 이야기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신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revelation)이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신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던 것이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5:4).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어떠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기대하시는 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은 심판자이시다.

 

그리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업적인 행위를 허락한 성전권력자들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권력자들 위에 세우셨으며, 희생 제사 시스템이 더 이상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선포하신다”(생명의 삶 플러스, 마가복음). 구원을 주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지 종교 권력자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과거나 현재에 머물러 산다. 과거에 매여 있거나, 현재에 파묻혀 산다. 그렇다 보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하고 산다. 사실, 그게 인간이 가진 한계이자 연약함이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나무라기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할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각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 것이 열매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전이 타락한 것을 개혁해야 한다며 제도 개혁이나 도덕의 함양 같은 것을 강조하게 된다.


열매나 도덕은 매우 외적인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측면을 강조할 때 쓰이는 단어들이다. 물론, 열매나 도덕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이 다른 이들보다 열매가 풍성하지 않거나 도덕적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요즘엔 기독교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전도를 해도 잘 먹히지 않는다. 교회의 안티세력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외적인 이유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대충은 다 안다. 그러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으로 기독교의 명성이 회복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까?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덕이 타락하는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해서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생득적으로 생명체는 자기 생명의 구원을 갈망한다. 그래서 생명을 지닌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쏟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반 사람들과 성전 관리들이 하나가 되어 희생 제사 시스템을 편리하게 구축하여 성전 제사를 활성화 한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업이 자신들의 생명을 번성해줄 것이라고 판단하면 그곳에 투자자가 몰리게 되어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덜 해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가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하여 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새것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것은 좋은 것이고 헌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이폰이 나오면 그거 사느라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새 줄을 선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먼저 구입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회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그래서 멀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이전 기술은 폐기되고,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이것은 버림을 받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살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명하느라 피곤해졌다. 요즘 기업들의 성공은 누가 먼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견했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그래서 기업들은 사람들을 닦달하고, 사람들은 기업의 등쌀에 못살겠다며 힘들어 한다. 기업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면서 그들에게서 노동력을 뽑아 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여념이 없다. 경영학과 심리학은 그러한 기업의 프로젝트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요즘에는 종교도 그러한 프로젝트에 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이나 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새로움의 종착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의 궁극성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보다 더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옛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나누는 교회를 구 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교회의 잘못이 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새로움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것을 세상에 제대로 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전의 희생 제사를 부정하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종결하신다. 단순한 정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의 삶의 질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현대인들이 무엇을 갈망해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상품이나 신기술만을 갈망한다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하다면,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직 쓸 만하지만 새로운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살 돈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쓸 것이다. 그렇게 의미 있는 일에 물질과 시간을 투자할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간직한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전달하는 새시대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은 생명이다  (0) 2018.03.30
거절당한 메시아  (0) 2018.03.28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2018.03.23
때와 순종  (0) 2018.03.20
감춰진 악  (1) 2018.03.1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3. 04:05

우리 인생의 부림절

(에스더 7:1-10)

 

에스더 이야기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린다. 사건을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혜와 신앙을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바사)의 크세르크세스 1세를 히브리어 일컫는 것이다. 다리오 왕의 아들로서 자신감 없고, 충동적이며, 벌컥 화를 내는 성격을 지닌 자였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을 보면 왕과 신하들의 얼마나 비열하고 우둔한지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술 취한 뒤, 자기의 소유물처럼 왕후 와스디를 사람들 앞에 보이려 했고, 왕후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어쭙잖게 남성의 권위를 지키려는 신하들의 간사한 조언에 넘어가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킨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 때문에 에스더 (하닷사)가 역사에 등장한다. 에스더의 히브리 이름은 핫사다인데, ‘도금양(Myrtel, 꽃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에스더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에스더는 와스디 왕후를 대신하여 왕후가 되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사촌지간이다(삼촌의 딸). “부모가 없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2:7). 그러나,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대개 모르드개를 에스더의 삼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둘 사이의 촌 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구한다. 왕궁 문지기였던 모르드개는 어느날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는데, 그 일을 왕에게 알려 왕이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일이, 궁중 일기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나중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드개와 유다인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악연은 하만의 교만과 모르드개의 신앙의 기개 사이의 충돌 때문에 시작된다. 하만은 왕 다음의 권력자였고, 모든 이들은 그가 지나갈 때 꿇어 엎드려 절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만 앞에서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인 것을 대외적으로 밝혔다. 그가 자시 자신의 민족을 알린 것은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신앙의 절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절개가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얼마나 많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가. 특별히 우리는 맘몬 신에 무릎 꿇고 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모르드개에게 적의를 품고 그와 그의 동족 유다인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살해 위협을 많이 당했고, 실제로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적도 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유다인 말살 계획이 실제로 옮겨진 사건은 20세기 2차대전 중에 일어났던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홀로코스트 학살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 Wiesel)이 만든 연극 <하나님의 시험>에서 에스더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부림절 전날 밤,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그 연극 속에서, 부림절 전날밤, 그 마음의 모든 유다인들은 학살을 당한다. 연극에서 시인 아브레멜은 이렇게 말한다. “부림절의 기적 없는 부림절을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에스더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지키며, 에스더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희망일까, 아니면, 허튼소리일까. 홀로코스트는 하나님의 부재를 나타낸다. 우리도, 인생의 한 가운데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가?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와 생명을 살릴 지혜를 강구한다. 이것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아하스에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보이는 비열함과 우둔함에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 쪽은 생명을 죽이려 하고, 한 쪽은 생명을 살리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누구 편일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는 편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낙심을 경험한다.

 

모르드개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그가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의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무릎꿇고 절하지 아니한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이유도 비슷하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을 것이다는 왕의 조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로 폐위된 와스디 왕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에스더의 왕후 즉위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묘사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4).

 

그들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믿음과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 앞에 나아가서 왕을 잔치에 초청하여,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과정에서도, 에스더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 안에서 그 일을 진행한다. 그리고,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집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에 자기 자신이 매달려 죽는다.

 

이 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하만이 살던 궁궐 같은 집은 에스더에게 주어지고, 모르드개는 하만이 차지하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원수들을 물리친다.

 

이 사건이 유다인들에게는 명절이 된다. 죽임 당하는 날이 명절로 바뀐,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아달월(지금의 2-3) 십사일, 유다인들은 그날을 부림(Purim)절이라고 부른다. ‘부르는 제비를 뽑아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기 좋은 날 택한 것을 말한다.

 

에스더 이야기에서 일어난 반전보다 더 큰 반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래서 궁극적 반전이라 부를 수 있다. 에스더 이야기는 죽음을 모면하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이야기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여전히 에스더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 삼는 이유는 그들이 비록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더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부림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놓여 있는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수 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에스더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최후 승리를 믿는가? 그렇다면, 내 삶에 있는 부림절,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되는 승리의 순간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더욱더 신앙안에서 살아가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절당한 메시아  (0) 2018.03.28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0) 2018.03.27
때와 순종  (0) 2018.03.20
감춰진 악  (1) 2018.03.15
구원은 은혜다  (0) 2018.03.1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0. 08:09

때와 순종

(요한복음 12:20-33)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행인 셋을 잘 대접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을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때를 잡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는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전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사 3:1-8)

 

복음서에 보면 이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7). 춤춰야 할 때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야 할 때 슬피 울지 않는 사람들, 참 쉽지 않다.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도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한 소통의 문제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풍성한 생명을 나눌 수 있는가의 중요한 문제이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할 때를 언제 알았는가? 기도할 때하늘에서 무슨 음성을 들었을 때? 아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 뵙기를 청한 것을 통해서 알았다.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인들의 요청을 예수님께 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인자가 영광을 얻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갖는다. 어떻게 수난과 죽음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해체요 죽음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썩는 것은 생명의 사라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변화이다. (ppt) 밀알 안에 저러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때 비로서 저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생명의 변화는 나 자신의 해체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내 생명을 드릴 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체하거나 죽음의 상태에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깨달은 때는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은 이런 뜻이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데, 그의 죽음은 심판의 죽음이요, 구원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있고, 그 소통을 통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때를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는 데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알아,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할 때, “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현재완료시제인 엘렐뤼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가 이미 지금 여기에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뒤로 물러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게 오히려 사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죽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는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그 뜻을 감당하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 없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쳤다. 그런데, 오히려 그 순종이 이삭을 살리고 아브라함을 살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에스더서를 보면, 모든 유다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가 나온다. 그런데, 그때 온 유다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에스더 때문이다.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에스더는 삼일 밤낮을 금식한 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려고 작정한다. 그러면서, 에스더는 이렇게 말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죽음을 불사하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로 겸심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드르개의 이말 때문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3:15-16).

 

세상도 매력적인 남자/여자를 이렇게 부른다. 차도남 / 차도녀. 차든지, 뜨겁던지,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에 반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도 모르고, 그것에 순종도 안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나? 이방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방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왔으니까! 오늘 말씀에도 명절에 예배하러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예배하다라는 말은 '프로스퀴네인'인데, 이것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에게 무릎은 ''을 상징한다. 그러니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만물의 주인인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 독일제국을 세운 프로이센의 불세출의 정치가 오토 비스마르크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이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아브라함의 천사 대접 이야기를 정치가 입장에서 풀어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바꾸어서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는 집단적으로 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살면서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수많은 여자를 만난다. 그런데, 왜 저 사람하고 결혼하는가? 때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결혼 한 것! 하나님의 뜻이 임했고, 때가 찼고, 그래서 순종해서 결혼했으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결혼했는데, 아직까지 긴가민가하면, 행복하지 않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런데, 믿음으로 밀고 나가면, 행복해진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 ‘죽으나 사나 나는 당신 밖에 없어!’ ‘당신은 내 삶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결과야!’


선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누군가에게는 선교가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야하는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 같은데그러면, 순종해야 한다. 그냥 밀고 나가라. 주변여건환경 따지도 묻지도 말고, 밀고 나가라. 그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거다. 그래야, 나를 통해 선교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어진다.

 

교회에 어떠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헌신해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나의 경우, 에어컨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 바쁘지만, 주님 주신 집회를 통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비용을 마련케 하시고, 헌금해서, 올해는 반드시 에어컨 설치해서 예배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어떤 프로젝트에 헌신하라는 마음 주시는데, 순종하지 못하면, 재물이든 시간이든 이상하게 그 만큼 다른 곳에 허무하게 쓰게 된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고 친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자적으로,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를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내 삶의 역사를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영성이다. 이는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이룰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모멘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우리에게 복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잠재력은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임할 때 순종하면, 마치 뻥튀기 튀기듯이 엄청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이 얼마나 보람차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인가. 때를 분별하라. 그리고, 그 때가 임했을 때, 순종하라.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이미 여기에 와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순종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때를 분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순종하여) 모든 생명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때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다시 말해, 역사 속(우리의 삶 속)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면, 주께서 우리를 통해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 주시며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0) 2018.03.27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2018.03.23
감춰진 악  (1) 2018.03.15
구원은 은혜다  (0) 2018.03.13
통증과 (중보)기도  (0) 2018.03.0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15. 14:11

감춰진 악

(느헤미야 13:1-31)

 

언젠가 EBS 다큐프라임에서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제목의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화를 왜 내는 것일까? 그 방송에서 말하기를, ''라는 감정 안에는 분노, 모멸감, 자기 비하, 그리고 좌절감까지 다양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화는 대개 부정적 감정이 어느 일정 부분 쌓이면 폭발하는 현상이다.

 

화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의 근원을 추적하여 그 근원을 보듬어주어야 한다. 방송에서 말하기를, 대부분 화를 습관적으로 심하게 내는 사람들의 경우, 그런 감정 분출의 근원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이어진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신체적인 성장을 이루더라도 내면의 트라우마는 그 사람의 내면을 상처 받은 그 시간과 그 상태에 머무르게 하여, 어떠한 상황이 되면 감정이나 행동의 퇴행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생긴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화가 없어지는가? 그리고, 어린 시절 왜 그러한 트라우마가 생겼을까? 대개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불우한 환경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어떠한 가정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은 그 가정만의 책임인가? , 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기제만은 아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악으로부터 온다.

 

예를 들어,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을 꺼려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렸을 때 결혼과 출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감정이 메말라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청춘은 언제나 뜨겁다. 뜨거움이 청춘의 상징 아닌가? 그런데, 왜 요즘 청춘들은 결혼과 출산을 꺼려하는가? 결혼과 출산이 그들에게 짐이 되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이 저조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인구절벽문제와 고령화문제를 낳고 있다. 인구절벽은 인구가 감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고, 고령화문제는 한 명의 노인을 봉양할 수 있는 젊은이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사회)가 붕괴된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춘 남녀 각 개인에게 감정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청춘 남녀가 결혼과 출산을 해도 짐이 되지 않도록 사회제도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청춘 남녀가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요소를 이라고 한다면, 그 악은 개인에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 안에 숨어 있는 악을 찾아내는 것보다 사회 안에 숨어 있는 악을 찾아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의 책(두루마리)이다. 같은 시대적 배경을 하고 있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1차 포로귀환은 스룹바벨이 주도했고, 2차 포로귀환은 에스라가 주도했고, 3차 포로귀환은 느헤미야가 주도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 1차 포로귀환은 왕족을 중심으로 이뤄진 귀환이었다. 매우 정치적인 상징을 가진 귀환인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는 율법 학자 겸 제사장이었다. , 2차 포로귀환은 매우 종교적인 상징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평신도이면서 행정가였다. , 3차 포로귀환은 매우 사회적인 상징을 갖는다.

 

오늘 본문은 제 3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느헤미야가 포로귀환 공동체를 개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하는 개혁의 특징이 있다. 그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 그는 사회 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는 악을 찾아내어 그 악을 물리친다. 느헤미야가 훌륭한 개혁가인 이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관행처럼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진 악을 발견해 내는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총회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은근 슬쩍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배경은 신명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니리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느니라”( 23:4-5).

 

암몬과 모압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은근 슬쩍 모른 채 하고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 와서 목소리를 내려고 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까먹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해서 암몬과 모압 사람을 은근 슬쩍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게 했다. 이렇게 은근 슬쩍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이 아직도 역사청산을 하지 못하고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일본 정부는 2차대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은근 슬쩍 모른 채 하고 군사력과 정치력을 키워 주변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매국행위를 은근 슬쩍 덮으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계속하여 주류사회에 편승하려 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만행을 까먹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모른 척 해서 그들에게 곁을 주려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할 때, 그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결국 그것 때문에 사회는 붕괴되고 만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개혁했듯이, 반드시 역사 청산은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제사장 엘리아십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내통하여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다. 그들의 죄는 여호와의 성전을 사사로이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최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찾아내기 쉽지 않은 악이다. 누구보다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제사장이 여호와의 총회에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암몬 사람과 내통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그들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느헤미야는 성전에 있던 도비야의 방에 있는 물건을 모두 끄집어 낸 뒤, 그 방에 원래 있어야 할 성전의 물건들을 채워 넣는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성전을 위해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에 관한 것이다.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느헤미야가 보니까, 모두 자기들의 밭으로 가서 먹고 사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까,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레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조사해 보니까, 성전의 곳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하면서 수 없이 많은 설교를 했지만 헌금 설교를 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 재정은 행정에 관한 것이지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헌금은 신앙고백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헌금에 대한 설교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요즘 읽은 어느 책을 보니까, 교회에서 교회 재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라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는 행정이 없을 수 없다. 그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재정이다. 교회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재정에 관한 문제는 적극적으로 지혜를 모아 대처 해야지,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안 된다. 다만, 이것은 설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느헤미야는 행정가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정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한 느헤미야에게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네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안식일 문제이다. 안식일 문제는 단순히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율법을 형식으로만 지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안식일 문제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이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것은 안식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예루살렘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그들의 일상이 먹고 사는 문제로만 전락한 것이다.

 

인간은 쉬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쉰다는 것은 사색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요즘 현대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쉬지 못하고 일에만, 먹고 사는 문제에만 몰두해 있다 보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 소외가 자꾸 발생하여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으나 실제 느끼는 행복감(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에게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행복의 근원이고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통혼의 문제이다. 통혼 문제는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자리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사회적 통념과 매우 다른 개혁이다. 느헤미야가 통혼에 대해서 개혁의 칼날을 들이댄 것은 그들의 신학적 반성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한 이유를 솔로몬에게서 시작된 통혼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자신들을 망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느헤미야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심각성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통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드러난 것 때문이 아니라 감춰진 것 때문이다. 감춰진 감정이 폭발할 때 화를 내게 되고, 그 이유모를 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사회(공동체)가 무너지는 이유 드러난 것 때문이 아니라 감춰진 것 때문이다. 그것이 악인지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그일이 결국 어느 시점에 가면 사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된다. (, 한국사회의 가부정적 문화, 편리를 추구하는 생활 방식(플라스틱 사용, 화석연료사용 등)).

 

개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도 세포 안에 감춰진 암 세포 때문이다. 그 감춰진 암 세포를 얼마나 빨리 발견하여 제거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 (우리 아버지는 친구 목사님 따라 우연히 건강검진 받으러 가셨다 간암을 발견하여 수술해서 6년 반을 더 사셨다. 만약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 일찍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개인의 사회적 커리어를 망치는 일도, 결국 자기 자신만이 아는, 또는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감춰진 나쁜 습관() 때문이다.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일이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일이 오랫동안 진행되다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되어 가정이 무너지는 법이다. 교회 공동체도, 국가 공동체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감춰진 악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가정을 돌아보고, 교회 공동체를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면서 우리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감춰진 악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의 생명을 지키고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비춰주는 사랑과 의의 거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2018.03.23
때와 순종  (0) 2018.03.20
구원은 은혜다  (0) 2018.03.13
통증과 (중보)기도  (0) 2018.03.08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2018.03.0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13. 03:53

구원은 은혜다

(민수기 21:4-9)

  

요즘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에 가장 많이 투자를 회사가 어디인지 아는가? 우버이다. 아마존이 유통업의 판도를 바꾸었다면, 우버는 운송업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우버의 목표는 손님, 또는 물건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정확하게운반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인공지능센서를 개발하고 지형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우버가 개발하고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는 타사(구글)에서 개발하는 자율 주행 자동차에 비해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만약, 자율 주행 자동차 시대가 도래했고,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기겠는가? 당연히,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길 것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장해 줄 초월자를 찾기 마련이다. 옛날 이집트는 나일 강을 주기적으로 범람시키는 신()인 하피를 섬겼다. 나일 강의 주기적 범람으로 인해서 나일 강 주변의 땅은 옥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사가 잘 돼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잘 범람하도록 하피 신에게 예배를 드리며 그 신을 만족시키려 했을 것이고, 나일 강을 어김 없이 범람시키는 하피 신을 신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왜 신뢰하는가?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댈 수 있는 따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고백하며 신뢰한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제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과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는 하나님은 사뭇 다르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은 매우 스윗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안전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의 재앙을 보냈고, 그 재앙 중 10번재 재앙이 임했을 때, 하마터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도 애굽의 장자들처럼 죽을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애굽 한 이후에도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홍해에 가로막혀 애굽 군대의 칼날에 죽거나 홍해에 빠져 죽을 뻔했다.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렀을 때도 그랬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데, 그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한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여러분의 몸을 실은 자율 주행 자동차가 안전하지 않거나 정확하게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불평할 것이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했던 불평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안전하게, 정확히 인도해 줄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평했다.

 

오늘 말씀에도 이스라엘의 불평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나아갔다. 그런데, 그 우회도로가 별로 좋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불뱀이 등장한다. 이것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불평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응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려움에 처하면 불평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떻게 사람이 불평하지 않고 사는가. 성경에 보면 불평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편에 보면, 대부분의 시가 탄원시이다. 탄원시는 시인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대표적인 탄원시인 1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리고 다른 대표 탄원시인 22장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라고 하는 장르로 대하고 있어서 그렇지, 이 탄원시들의 내용 자체는 매우 거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때로,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놓으라. 천벌 받을까 봐 무서워 하지 말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 시편에 보면, 불평으로 시작한 시편은 나중에 감사의 찬송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평을 감사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불뱀은 독이 있는 뱀을 의미한다. 어릴 적, 우면산 기슭에서 독사를 참 많이 봤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사는 까치독사와 살모사이다. 까치독사는 알록달록 색깔이 예쁘고, 살모사는 회색과 검정색 점이 박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화단을 꾸미려고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 까치독사가 나타난 적이 있다. 점심 시간이었는데, 오전반을 마치고 하교하는 저학년 아이들이 까치독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독사는 독이 바짝 올랐는지, 대가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한 아이에게 돌진했다. 나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밀쳐내고, 가져간 강목으로 독사의 머리를 후려쳐서 독사를 잡았다. (내가 이래봬도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의인이다.)

 

독사에 물리면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독사에 물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을 한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모세는 그들의 간청대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보통,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개되면, 우리는 이런 예상을 할 수 있다. 백성들이 회개하며 간청했고, 모세가 중보기도 했으니, 그들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뱀들을 물러가게 해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우선, 뱀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무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이 그들이 의도하고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뱀이 물러가고, 더 이상 뱀이 그들을 물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구원은 은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에베소서 2 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 말은 우리가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리는 공짜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구원이 공짜로 우리에게 선물로 임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 하며 좋아한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은 은혜다라고 하는 말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면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구원은 은혜다라는 말은 생명의 완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신비로운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을 설정해 놓고, 하나님이 그것에 맞게 구원해 주시기를 원한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을 날(공짜로)로 먹으려 하는 놀부 심보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가 있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열망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상정해 놓은 구원을 갈망하며 기도한다.’ 결혼하고 싶은 처녀나 총각은 자신이 원하는 신랑감이나 신붓감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취직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성취해 주시기를, 즉 자기의 뜻대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설정해 놓은 구원의 방식이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가?

 

결혼 하기 전 청춘 남녀는 너 없으면 못살아.” 그러다,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제 너만 없으면 살겠다고 한다. 취직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 회사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다가,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 회사를 퇴사한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퇴사한 사람과 퇴사를 꿈꾸는 사람.”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죽어라 공부했는데, 그 회사에 다니면서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퇴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열왕기하 18장에 가면, 불뱀(놋뱀)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남유다의 왕으로 등극해서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그 중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도 있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깨부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놋뱀을 향하여 아직까지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놋뱀에 임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놋뱀이 가졌던 신비한 능력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놋뱀이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무슨 능력이 있는 양, 목에도 걸고 다니고, 차에도 걸고 다니고, 현관에도 붙여 놓고, 집에도 구석구석 달아 놓는다. 십자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지, 십자가에 무슨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은혜다. 구원은 공짜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우리가 생각한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신비롭게 우리에게 임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말은 구원이 그들에게 공짜로 임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예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인 것이다. ‘구원이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

 

그러니, 너무 삶에 힘 주고 살지 말라. 지금 그거 안 되면 죽을 것 같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구원은 신비한 방식으로 임한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러니, 일이 좀 안 된 것 같아서 힘들어 하지 말고, 일이 좀 잘 된 것 같다고 들뜨지 말아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은 정도로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우리의 삶에 이루어 주실 것이다. 구원은 은혜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때와 순종  (0) 2018.03.20
감춰진 악  (1) 2018.03.15
통증과 (중보)기도  (0) 2018.03.08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2018.03.05
용서를 택하라  (0) 2018.03.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8. 16:57

통증과 (중보)기도

(에스라 9:1-15)


통증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통증은 나쁜 것이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증을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통증을 못 느끼니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통증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독교 영성은 통증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느끼는 통증에 대한 거룩한 반응이다.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만,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 영성가들은 하나같이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기도의 삶은 산 이유는 그들이 느끼는 통증의 범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남다른 통증의 범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 하나님과 가까이 살면서 잃어버렸던 통증의 감각이 살아난 것이고,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통증을 자신의 감각으로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스라이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이었다( 7:11). 에스라는 제 1차 포로귀환을 이끈 스룹바벨에 이어, 2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학자 겸 제사장으로서 무너진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는 무너진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며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바로 세워 나가는 듯 보였다. 그들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을 보고 울었으며, 나중에 다시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를 보고, 그 옛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추억하며 주저 않자 울었다. 그만큼 그들은 마음 속에 여러 가지 한이 서려 있었으며, 예루살렘 재건과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재건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일에 대한 보고가 오늘 본문이다. 방백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전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9:2-3)

 

한 마디로 얘기해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증한 이방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잘못인가?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독특한 자기 이해의 입장에서 봐야 하지, 다른 시선으로 보면 현대 사회의 문화적 교류에 반하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요즘엔 국제사회 간에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그 문화 교류 안에는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로 표현하면, ‘통혼(intermarry)’도 포함된다. 요즘엔 인종들 간에, 다른 국적 사람들 간에 통혼이 자유롭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UN의 권고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통혼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라며, 통혼에 대한 관념을 바꿀 것을 권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통혼에 대하여 나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에스라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간의 통혼을 가증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이후, 왕을 비롯관 고관들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3차례에 걸쳐 강제로 이송되었고, 다른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진 경험을 했다. 지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자신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한다. 여기서 이들이 신학적 반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도 어떠한 일을 겪고 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발생했는지, 신앙과 연관하여 돌아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학적 반성을 통해 낸 결론은 이것이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계약(covenant)’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즉 선민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내산 계약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했다. 그런데, 그 계약은 조건부 계약이다. 이스라엘이 그 계약에 충실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지만, 그들이 그 계약을 어기면, 그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말 것에 대한 계약이 있다. 이것을 헤렘법이라고 하는데, 그 계약을 보면 이렇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7:2-4).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대노하며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은 이유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계약 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약 파기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이렇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위에서 신앙의 성장, 영적인 성장, 즉 영성은 통증의 회복이라고 했다. 통증의 회복은 두 방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피조물)의 통증을 느끼는 능력이 부족하다. 일례를 들어, 옛날에 잔치가 열리면 돼지나 소를 손수 잡았다.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 교회 앞마당에서 돼지를 직접 잡는 것을 보았다. 돼지를 목만 내놓고 못 움직이게 만든 뒤, 해머(망치)로 돼지의 머리를 힘껏 내리 치는데, 바로 그때 돼지는 그야말로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돼지의 비명, 즉 고통의 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돼지를 잡아 먹겠다는 일념 하에, 돼지의 고통의 비명 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욕망이 강하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또한, 나무를 자를 때도 마찬가지다. 생나무를 자르면 진물이 나온다. 그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의 표현이다. 그들은 진물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무가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정도로 영리한 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고기를 낚시하고 그 물고기를 칼로 손질 할 때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던 이유는 그 통혼 소식이 그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에게 실제적인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저녁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다. 그 기도의 핵심은 죄에 대한 용서의 간구이다.

 

에스라가 기도하며 죄에 대한 용서를 빈 이유는 죄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고, 인간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통증을 못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안 아프니까. 아무 문제 없는 줄 알고.

 

그러나, 에스라는 달랐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죄가 자신의 죄로 다가왔다. , 그들의 죄 때문에 자신이 아팠다. 그리고, 그는 죄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을 느꼈고, 그 죄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아프게 할 것이라는 느꼈다. 아주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지 않을 수 없었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지 않을 수 없었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앉아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고통이 가해지면, ‘아이구 아버지하면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뿐이다.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또다시 가나안 족속과 통혼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좋은 대로 가나안 족속들과 또다시 통혼했다. 이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통증이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죄들이 난무하고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죄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자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중보기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흔(stigma)이라는 것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창자국의 상처가 신자의 몸에 그대로 새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가시관 때문에 생긴 이마의 상처, 그리고 채찍질 당할 때 생긴 등의 상처, 또한 피눈물과 피땀도 성흔의 범주에 들어간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성흔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초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13세기 이후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성흔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성인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시에나의 카테리나(Catherine of Siena, 시에나의 캐서린)이 있다.

 

성흔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통을 그대로 육신에 채우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성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성흔, stigma)을 지니고 있노라”( 6:17).


물론, 우리 모두가 성 프란치스코처럼, 시에나의 카테리나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육신에 성흔을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느끼는 고통과 죄를 통해 고통당하는 이 세상의 무고한 자들의 그 모든 고통을 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괴로워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주가 제한적인 것은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다 느끼신다. 그래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의 간구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리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교회)이라면,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실제적으로, 희미하게 나마 느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최소한 양심이고 예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성숙이고 영성의 심화이다. (중보)기도는 통증의 회복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나의 것으로 삼아, 그 통증의 치유를 위한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의 통증 때문에 기도하는 행위는 구원 받은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기도의 자리로 밀어 넣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신비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위로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춰진 악  (1) 2018.03.15
구원은 은혜다  (0) 2018.03.13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2018.03.05
용서를 택하라  (0) 2018.03.02
내 삶을 깨뜨립니다  (0) 2018.02.2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5. 13:45

무심과 단순

(출애굽기 20:1-17)


구원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어떤 이는 “10원 빼기 1원이요.”라고 어쭙잖은 농담을 건네기도 할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가질 수는 있어도, 구원에 대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조차도 잘 모른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구원은 예수 믿으면 받는 거야.” 구원을 예수, 그리고 믿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구원의 개념이나 실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어떠한 것 때문에 완전한 생명에 금이 갔다. 그 어떠한 것이 무엇인가? 죄이다. 죄란 생명의 완전성을 헤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죄악이란 생명을 위협하는 부정한 것이다. 죄가 나쁘고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죄 짓지 말아야 하고, 죄를 멀리 해야 하고,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실존(Anthropology)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인간에 대한 비관론(Pessimism)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Optimism)이다. 비관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이야기 한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낙관론은 인간에게서 희망을 본다. 인간에게는 죄를 넘어서는 그 어떠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생명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비관론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는 낙관론도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은 생명책이다. ,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시다. 성령은 생명을 존재케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함께 읽은 십계명도 생명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온통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책이다.

 

율법은 단순한 법조항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이다. 율법에는 율법을 통해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생명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율법이 어느 순간 생명을 못살게 구는 존재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법이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손 마른자(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며, 예수를 죽일 놈 취급한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7-28).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온다. (안식일에 배고파서 밀이삭을 자른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율법은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인데, 어느 순간부터 율법이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의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건강하고 배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손 마른 자나 배고픈 자는 안식일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들의 생명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리고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이 그것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들은 손 마른 자와 배고픈 자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안식일에 몸이 아픈 자를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이유는 그가 율법에 담긴 희망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여러분에게 십계명은 무엇인가?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여러분을 구속(拘束,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하는 율법 조항인가? 우리는 흔히, 율법을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고, 귀찮게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이고 무지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사실 단 한 가지이다. 모두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크게 세 가지로 그 얼개를 나눌 수 있다. 1계명부터 3계명과, 4계명, 그리고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가 그것이다. 우선 1계명부터 3계명의 의미를 살펴보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기서 핵심은 우상이다. 우상(Idol)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헤치는 힘(power)’을 말한다. 반대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 가나안 전쟁이 그것이다. 특별히 여호수아서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고자 가나안 족속들과 피 튀기는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하는 이야기를 본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봐야 하는 문제이다. 가나안에는 각 부족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몰렉, 밀곰, 다곤 등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신들을 잘 섬겨야 그 땅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들을 섬길 때 인신제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킹콩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킹콩이 사는 섬의 부족은 킹콩을 잘 섬겨야 자신들이 멸망하지 않고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인신제사를 한다.

 

우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에 대한 경고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상숭배하면서 산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며 사는가? 또한 우리는 어떤 이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당하고 사는가? 우리는 우상숭배하면서, 그 우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면서 산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상숭배 속에서 사는 불쌍한 존재이다. 자기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지 말라. 남의 이익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 그러한 일이 있다면 저항하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3계명을 어기며 사는 것이다.

 

두번째로, 4계명을 살펴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은 쉬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기억할 때 일어나는 은혜이다. 모세오경에는 두 개의 십계명이 나온다(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 물론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부분이 있다. 4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이 다르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11).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창조때문이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이와는 달리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5:15). 신명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구원때문이다. 안식일은 구원의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누가 나를 창조하셨나?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신다.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26-32)

 

누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인가? 그렇다면, 왜 안식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얼마나 소진하고 있는가! 안식일에 들로 산으로 놀러가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쉬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이 철저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자기 스스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생명을 못살게 구는 죄에 상태로 우리를 밀어 넣고 말 것이다.

 

나머지 계명( 5계명 ~ 10계명)은 모두 이러한 신앙고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10계명은 욕심 부리지 말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다. 만족과 감사는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화처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때만 가능한 신비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는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한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얼마나 욕심쟁이로 사는가. 이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로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각 사람이 모두 시장(market)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에게 그 가치 외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소비력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욕망만 난무하는 타락한 시대이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집에는 전화기 한 대, TV 한대만 있었다. 그것으로 족하고 행복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누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 지 집안 사람들이 다 알았다. “준식이네 집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준식이 친구 영주입니다. 준식이 있어요?” “준식아 영주한테 전화왔다.” 만약 준식이가 영주한테 전화를 받고 바깥에 나가면, 집안 사람들은 준식이가 누구를 만나러 나가는지 다 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식이가 집을 나가도 누구 만나러 나가는 지 모른다.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레위기 2523절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땅을 영구히 팔지 말 것은 땅은 다 내것임이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욕심부리는가. 땅에서 난 소산은 다 주님의 것이다. 땅에서 나지 않은 것으로 만든 것이 어디 있나.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모두 땅의 소산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핸드폰도, 자동차도, 집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며 얼마나 욕심부리고 치사하게 굴며 사는가.

 

우리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 개인을 시장으로 보고 소비력이 없는 사람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은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았던 것처럼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신앙고백하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나, 3세계의 가난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제 5~10계명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시 한 편을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 한다. 이병률 시인의 <이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시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는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십계명의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이 시 중에서 다음 시구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무심함을 / 단순함을 /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우리는 무심하지 못하고, 단순하지 못해서,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아서, 우리는 살지도 버티지지도 못하고 먼지처럼 쓸모 없어진다. 참으로 비극이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나니, 우상을 숭배한다.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못살게 굴고 소진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 만드는 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여 남의 것을 탐하고 차지하느라 은밀한 죄를 지으면서 산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명의 완성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욕심부리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생명의 완성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다른 것들에는 무심하게 된다는 것을.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면, 단순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계명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무심함과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은 은혜다  (0) 2018.03.13
통증과 (중보)기도  (0) 2018.03.08
용서를 택하라  (0) 2018.03.02
내 삶을 깨뜨립니다  (0) 2018.02.27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1) 2018.02.2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 17:22

용서를 택하라

(열왕기하 5:1-14)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순신 장군 때문에 훌륭한 장군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 중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그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특별히, 높은 지위에 있거나, 몸이 아픈 이들에게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많은 희망을 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아픈 현실에서 구원 받기 위해 지푸라기 한 가닥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아만 장군처럼 행동한다. 다름아닌, 순종이 그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체면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그 방법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 또한 감사해 한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 이야기는 좀 더 큰 틀에서 봐야 한다.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 속에 발견되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해 보려고 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 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로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이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를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린 여자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그들을 죽이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물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군대를 데리고 사마리아를 치러 올라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는 나아만 장군과 그의 왕이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있는 동안은 그 나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했다.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용서가 어떠한 큰 일을 이루게 될지 모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순종(용서)을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용서를 선택하라.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선교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평화의 도구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증과 (중보)기도  (0) 2018.03.08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2018.03.05
내 삶을 깨뜨립니다  (0) 2018.02.27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1) 2018.02.22
광야로 가자  (1) 2018.02.22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