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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8. 16:57

통증과 (중보)기도

(에스라 9:1-15)


통증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통증은 나쁜 것이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증을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통증을 못 느끼니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통증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독교 영성은 통증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느끼는 통증에 대한 거룩한 반응이다.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만,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 영성가들은 하나같이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기도의 삶은 산 이유는 그들이 느끼는 통증의 범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남다른 통증의 범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 하나님과 가까이 살면서 잃어버렸던 통증의 감각이 살아난 것이고,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통증을 자신의 감각으로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스라이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이었다( 7:11). 에스라는 제 1차 포로귀환을 이끈 스룹바벨에 이어, 2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학자 겸 제사장으로서 무너진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는 무너진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며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바로 세워 나가는 듯 보였다. 그들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을 보고 울었으며, 나중에 다시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를 보고, 그 옛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추억하며 주저 않자 울었다. 그만큼 그들은 마음 속에 여러 가지 한이 서려 있었으며, 예루살렘 재건과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재건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일에 대한 보고가 오늘 본문이다. 방백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전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9:2-3)

 

한 마디로 얘기해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증한 이방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잘못인가?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독특한 자기 이해의 입장에서 봐야 하지, 다른 시선으로 보면 현대 사회의 문화적 교류에 반하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요즘엔 국제사회 간에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그 문화 교류 안에는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로 표현하면, ‘통혼(intermarry)’도 포함된다. 요즘엔 인종들 간에, 다른 국적 사람들 간에 통혼이 자유롭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UN의 권고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통혼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라며, 통혼에 대한 관념을 바꿀 것을 권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통혼에 대하여 나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에스라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간의 통혼을 가증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이후, 왕을 비롯관 고관들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3차례에 걸쳐 강제로 이송되었고, 다른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진 경험을 했다. 지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자신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한다. 여기서 이들이 신학적 반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도 어떠한 일을 겪고 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발생했는지, 신앙과 연관하여 돌아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학적 반성을 통해 낸 결론은 이것이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계약(covenant)’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즉 선민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내산 계약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했다. 그런데, 그 계약은 조건부 계약이다. 이스라엘이 그 계약에 충실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지만, 그들이 그 계약을 어기면, 그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말 것에 대한 계약이 있다. 이것을 헤렘법이라고 하는데, 그 계약을 보면 이렇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7:2-4).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대노하며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은 이유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계약 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약 파기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이렇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위에서 신앙의 성장, 영적인 성장, 즉 영성은 통증의 회복이라고 했다. 통증의 회복은 두 방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피조물)의 통증을 느끼는 능력이 부족하다. 일례를 들어, 옛날에 잔치가 열리면 돼지나 소를 손수 잡았다.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 교회 앞마당에서 돼지를 직접 잡는 것을 보았다. 돼지를 목만 내놓고 못 움직이게 만든 뒤, 해머(망치)로 돼지의 머리를 힘껏 내리 치는데, 바로 그때 돼지는 그야말로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돼지의 비명, 즉 고통의 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돼지를 잡아 먹겠다는 일념 하에, 돼지의 고통의 비명 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욕망이 강하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또한, 나무를 자를 때도 마찬가지다. 생나무를 자르면 진물이 나온다. 그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의 표현이다. 그들은 진물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무가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정도로 영리한 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고기를 낚시하고 그 물고기를 칼로 손질 할 때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던 이유는 그 통혼 소식이 그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에게 실제적인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저녁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다. 그 기도의 핵심은 죄에 대한 용서의 간구이다.

 

에스라가 기도하며 죄에 대한 용서를 빈 이유는 죄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고, 인간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통증을 못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안 아프니까. 아무 문제 없는 줄 알고.

 

그러나, 에스라는 달랐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죄가 자신의 죄로 다가왔다. , 그들의 죄 때문에 자신이 아팠다. 그리고, 그는 죄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을 느꼈고, 그 죄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아프게 할 것이라는 느꼈다. 아주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지 않을 수 없었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지 않을 수 없었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앉아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고통이 가해지면, ‘아이구 아버지하면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뿐이다.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또다시 가나안 족속과 통혼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좋은 대로 가나안 족속들과 또다시 통혼했다. 이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통증이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죄들이 난무하고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죄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자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중보기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흔(stigma)이라는 것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창자국의 상처가 신자의 몸에 그대로 새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가시관 때문에 생긴 이마의 상처, 그리고 채찍질 당할 때 생긴 등의 상처, 또한 피눈물과 피땀도 성흔의 범주에 들어간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성흔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초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13세기 이후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성흔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성인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시에나의 카테리나(Catherine of Siena, 시에나의 캐서린)이 있다.

 

성흔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통을 그대로 육신에 채우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성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성흔, stigma)을 지니고 있노라”( 6:17).


물론, 우리 모두가 성 프란치스코처럼, 시에나의 카테리나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육신에 성흔을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느끼는 고통과 죄를 통해 고통당하는 이 세상의 무고한 자들의 그 모든 고통을 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괴로워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주가 제한적인 것은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다 느끼신다. 그래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의 간구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리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교회)이라면,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실제적으로, 희미하게 나마 느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최소한 양심이고 예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성숙이고 영성의 심화이다. (중보)기도는 통증의 회복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나의 것으로 삼아, 그 통증의 치유를 위한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의 통증 때문에 기도하는 행위는 구원 받은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기도의 자리로 밀어 넣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신비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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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