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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0. 08:09

때와 순종

(요한복음 12:20-33)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행인 셋을 잘 대접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을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때를 잡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는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전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사 3:1-8)

 

복음서에 보면 이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7). 춤춰야 할 때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야 할 때 슬피 울지 않는 사람들, 참 쉽지 않다.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도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한 소통의 문제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풍성한 생명을 나눌 수 있는가의 중요한 문제이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할 때를 언제 알았는가? 기도할 때하늘에서 무슨 음성을 들었을 때? 아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 뵙기를 청한 것을 통해서 알았다.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인들의 요청을 예수님께 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인자가 영광을 얻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갖는다. 어떻게 수난과 죽음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해체요 죽음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썩는 것은 생명의 사라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변화이다. (ppt) 밀알 안에 저러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때 비로서 저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생명의 변화는 나 자신의 해체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내 생명을 드릴 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체하거나 죽음의 상태에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깨달은 때는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은 이런 뜻이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데, 그의 죽음은 심판의 죽음이요, 구원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있고, 그 소통을 통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때를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는 데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알아,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할 때, “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현재완료시제인 엘렐뤼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가 이미 지금 여기에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뒤로 물러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게 오히려 사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죽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는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그 뜻을 감당하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 없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쳤다. 그런데, 오히려 그 순종이 이삭을 살리고 아브라함을 살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에스더서를 보면, 모든 유다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가 나온다. 그런데, 그때 온 유다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에스더 때문이다.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에스더는 삼일 밤낮을 금식한 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려고 작정한다. 그러면서, 에스더는 이렇게 말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죽음을 불사하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로 겸심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드르개의 이말 때문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3:15-16).

 

세상도 매력적인 남자/여자를 이렇게 부른다. 차도남 / 차도녀. 차든지, 뜨겁던지,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에 반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도 모르고, 그것에 순종도 안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나? 이방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방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왔으니까! 오늘 말씀에도 명절에 예배하러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예배하다라는 말은 '프로스퀴네인'인데, 이것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에게 무릎은 ''을 상징한다. 그러니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만물의 주인인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 독일제국을 세운 프로이센의 불세출의 정치가 오토 비스마르크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이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아브라함의 천사 대접 이야기를 정치가 입장에서 풀어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바꾸어서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는 집단적으로 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살면서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수많은 여자를 만난다. 그런데, 왜 저 사람하고 결혼하는가? 때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결혼 한 것! 하나님의 뜻이 임했고, 때가 찼고, 그래서 순종해서 결혼했으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결혼했는데, 아직까지 긴가민가하면, 행복하지 않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런데, 믿음으로 밀고 나가면, 행복해진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 ‘죽으나 사나 나는 당신 밖에 없어!’ ‘당신은 내 삶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결과야!’


선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누군가에게는 선교가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야하는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 같은데그러면, 순종해야 한다. 그냥 밀고 나가라. 주변여건환경 따지도 묻지도 말고, 밀고 나가라. 그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거다. 그래야, 나를 통해 선교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어진다.

 

교회에 어떠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헌신해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나의 경우, 에어컨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 바쁘지만, 주님 주신 집회를 통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비용을 마련케 하시고, 헌금해서, 올해는 반드시 에어컨 설치해서 예배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어떤 프로젝트에 헌신하라는 마음 주시는데, 순종하지 못하면, 재물이든 시간이든 이상하게 그 만큼 다른 곳에 허무하게 쓰게 된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고 친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자적으로,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를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내 삶의 역사를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영성이다. 이는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이룰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모멘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우리에게 복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잠재력은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임할 때 순종하면, 마치 뻥튀기 튀기듯이 엄청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이 얼마나 보람차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인가. 때를 분별하라. 그리고, 그 때가 임했을 때, 순종하라.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이미 여기에 와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순종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때를 분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순종하여) 모든 생명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때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다시 말해, 역사 속(우리의 삶 속)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면, 주께서 우리를 통해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 주시며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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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