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4. 30. 14:54

내 사랑 내 곁에

(딤후 4:9-22)

 

역사를 보면 독신으로 산 위인들이 많다. 그 중에서 몇 명만 꼽자면, 우선 니콜라 테슬라가 있다. 우리 교회 옆에 있는 테슬라 자동차 회사는 테슬라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이름을 따와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토머스 에디슨의 라이벌로 유명하다. 에디슨는 직류시스템을 주장한데 반해, 테슬라는 교류시스템을 주장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물론, 토머스 에디슨이 워낙 위인으로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리고 현재는 테슬라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났고, 그래서 현재 전류시스템은 교류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베토벤과 아이작 뉴턴 같은 위인들도 독신으로 살았다. 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이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계 3대 악처(소크라테스의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콘스탄체, 톨스토이의 소피아)가 있는데, 그 중의 제일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이다. 유명한 철학자 중에는 독신으로 산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들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악처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바울 사도는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으로 산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때에 누가 보고 싶을까? 가족이 있는 경우는 물론 배우자나, 자식들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독신의 경우에는 가족이 없으므로, 동료나 친구가 보고 싶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울에게서 발견한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 여기에는 스푸타솔그리고 타케오스라는 헬라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 오라는 뜻이다.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 오라고 말하고 싶은, 이렇게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또는 이렇게 보고 싶다고 말할 때,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와 줄 사람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다.

 

바울의 마지막 소망과 인사가 담긴 본문에는 신앙생활 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신앙생활은 삶과 분리된 어떠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의 삶,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 신앙생활(교회생활)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신앙을 후퇴시키지 말라. 사회초년생은 이런 질문을 한다. “세상이 왜 그래요?”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사랑의 아픔을 겪는 청춘남녀는 이런 말을 한다. “ 사랑이 왜 그래요?” 사랑은 원래 그런 곳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왜 그래요?” 교회는 원래 그렇다.

 

바울 사도의 신앙의 여정을 보면, 그는 꽃 길만 걷지 않았다. 가시밭 길도 수도 없이 걸었다. 지난 날의 신앙의 여정을 돌아볼 때,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동역자도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회고하면서, 마지막 인생을 보내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한때 그의 동역자였던 데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단순히 바울을 떠난 것뿐 아니라 신앙을 저버린 상황이다. 매우 가슴 아픈 상황이다. 바울은 그레스게와 디도에 대하여도 언급한다. 같이 있어주길 바랐지만, 이들은 사역이 바빠서 함께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중에서, 디도는 참 훌륭한 목회자이다. 개인적으로 동질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목회자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고 소아시아 등 유럽지역을 다니며 전도할 때 가장 목회하기 힘든 곳은 크레타 섬이었다. 그런데, 디도는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그뿐 아니라, 디도는 초대교회(바울 당시) 중에서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가서 고린도교회를 정상화시킨 목회자이다. 그는 열심을 다해서 교회를 섬겼던 신실한 목회자이다.

 

바울은 누가와 마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현재 누가는 바울의 곁에서 바울을 보살피는 중이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바울과 함께 끝까지 동역한 신실한 사람이다. 그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계속하여 바울을 돌봤다. 그뿐 아니라,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복음을 기록하고 알렸다.

 

마가복음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는 제 1차 선교여행 때 바울 일행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인물이다. 아마 그 때는 몸도 마음도 어려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서는 일이 발생했다. 나중에 마가는 회개하고 열심히 사역해서 바울에게 인정받는 일꾼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고 있다. 원수 같은 놈이었는데, 이제는 보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바울의 인생에는 정말로 원수 같은 인간도 있었다. 그 중에서 본문에 언급되는 인물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이다.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라.” 알렉산더는 구리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 때문에 우상을 버리는 사람이 늘어나자, 알렉산더는 바울이 자신의 사업을 방해한다는 생각에 바울을 죽도록 괴롭혔다. 바울은 그에 대한 심판을 주님 손에 맡기고 있다.

 

인생 말년에 바울은 사람만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물건도 보고 싶었다. “내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13). 여기서 말하는 책은 성경책이다. 바울 당시의 성경책은 필사본으로, 두껍고 무거워서 휴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도여행을 다닐 때 휴대하지 못했지만, 그는 소중한 성격책을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보이고 있다.

 

나에게도 소중한 성경책이 있다. 나의 스승이신 Ted Runyon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성경책이다. 1985년 한국 개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정판으로 만든 성경책이다. 그 당시 Runyon 선생님은 정동제일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 받은 성경책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2005). 성경책이 이러한 문구를 써서 주셨다. “To Junsik Chang, With great wishes for God’s blessings and your success in your further studies. Theodore Runyon” 해석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복을 빌고, 앞으로의 공부에 큰 성과가 있기를 빈다.” 2016, 선생님은 추천서를 써서 나를 GUT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2017511), 선생님은 소천하셨다.

 

바울은 가슴 아픈 경험을 털어 놓는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6). 어렵고 힘들 때 도와주는 이 없이 모두 떠나 버렸다. 아마도 이것이 독신의 어려움이 아니겠는가. 가족이 없었던 바울의 아픔이 아니었겠나.

 

아픔을 말하면서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동적인 교훈을 준다. 목회 도중(신앙생활 도중)에 사람들의 배신이나 버림받음을 섭섭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용서하는 자세를 보일 것을 주문한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일까? 바울의 신앙고백은 이렇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힘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맡겨진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인사를 전하고 있는 네 사람을 주목해보자. 우선 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적인 동역자였다(16:4). 다음으로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언급하고 있다. 오네시보로의 이름의 뜻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116-18절은 오네시보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바울은 그를 마음을 다해 축복한다. “그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이렇게 특별히 생각하는 이유는, 감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보로는 수소문해서 그 먼 길을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 신실한 일꾼이었다.

 

바울은 에라스도와 드로비모를 언급하고 있는데, 에라스도는 고린도에서 구제금을 모이며 주의 일에 헌신한 일꾼이고)19:22), 드로비모는 에베소 교회 출신으로서 에베소 교회의 구제금을 가지고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던 인물이다(고후 8:18).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내에 있던 바울은 드로비모를 데라고 성전에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는 오해를 받고 체포된다 (21:30). 바울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드로비모는 지금 병들어서 밀레도에서 요양 중이다.

 

바울 사도가 인생 말년에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은 성경과 사람들(동역자들)이었다. 그는 성경을 사랑했고, 동역사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 곁에는 지금 무엇이 있는가? 사랑, 아니면 다른 것?

 

개인적으로, 세화교회 공식 취임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목회하기 시작한 지, 20개월이 되었다. 오늘 나는 나름대로 언약을 갱신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한다. 일년, 또는 20개월을 돌아보며 감사한 것이 참 많다. 우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내 곁에 놓아주신 사랑이다. 또한 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놓아주신 사랑이길 소망한다.

 

앞으로, 그리고 인생을 돌아볼 때, 서로가 서로에게 늘 함께 하고픈, 디모데, 마가, 누가, 브리스가와 아굴라,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드로비모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동역자를 곁에 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행복해 했던 것처럼, 나도 여러분이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 우리 함께 힘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이 시대에 크게 쓰임 받는 세화 공동체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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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고

 

악의 이상야릇한 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자유,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돌리고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것을 바꿔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사회를 사는 의미가 아닐까요.”(175).

 

악은 왜 존재하고, 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그 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적인 악을 파헤치고, 그 시스템적인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악은 텅 빈 마음에 깃든 병이다. 악은 관계를 결여한 병이다. 악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 타자에 대한 소외, 이 세상에 대한 소외에서 발생한다. 악은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에 팬 골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악은 죽음과 파괴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악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문학과 철학과 성경(신학)을 동원한다. 다양한 악의 실체를 밝힌 후,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있을까? 이 세상은 과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사랑할 만한 존재인가?

 

우리는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즉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의 능력은 책임(responsibility = response + ability)’을 불러오는데, 책임이란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타자가 요청하면 거기에 응답하는 것, 세상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통찰력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혁명이나 사회 변혁 같은 거대담론보다 세간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얻은 것인데,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은 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엉망진창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세간의 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나를 뛰어 넘는 어떤 존재와 이어져 있다는 소망 안에서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악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이 세계와의 단절의 골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는 자기 자신 안에 생긴 골, 타인과의 관계에서 패인 골, 그리고 이 세상과의 사이에서 생긴 골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존재) 안에 사랑의 능력을 태동시키고 성장시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세간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토마스 홉스의 사상으로 보는 남북관계


근대는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유럽에서 발생한 30년 전쟁(1618-1684)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며 자신의 사상을 키운 토마스 홉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every man against every man. 왜 인간은 서로를 향해 투쟁할 수 밖에 없을까?


토마스 홉스가 주목한 것은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이다. 여기에서 홉스의 독특한 인간론이 발견되는데, 그는 인간에 대해서 비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관론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또는 칼뱅이 말하는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앞의 신학자들은 죄의 개념을 인간에게 가져와 인간에 대한 비관론(죄에 의한 타락)을 전개하지만 홉스에게서 발견되는 비관론은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라 경험적 또는 철학적 비관론이다.


홉스는 사람의 정신과 몸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더 뛰어난 몸이나 더 뛰어난 정신이 없고, 모두의 몸과 정신은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평등성이 인간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가져다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몸,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때 발생한다. 서로 같은 것을 얻고자 할 때 거기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서로를 파괴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남한이나 북한, 그리고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 그것은 국가의 안전이다. 홉스의 평등성에 기대서 말한다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다스리거나 간섭할 수 없다.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모든 나라가 같은 것을 향해 경쟁할 때이다.


홉스는 이러한 상태를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바로 그 죽음의 위협이 인간들 간에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을 통해 서로 투쟁 관계에 있던 인간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평화를 일구어 낸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서로 간에 평화 계약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하기 때문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자연 상태에서 서로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 가장 큰 원동력은 홉스가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the fear of death’이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은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연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홉스가 발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오는 사회 질서는 굉장히 원시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심오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그대로 적용되는 실제적인 정치 이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한과 북한이 평화 협정을 맺게 되는 계기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치가 없을까’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보다 위대한 긍정적 가치가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일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해방의 끝은 어디인가?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흑인여성해방신학, 남미여성해방신학(Mujerista), 퀴어신학, 탈식민지신학, 그리고 장애인신학,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악들과 맞서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지목하는 일 보다(물론 이것도 중요하다)는 어떤 악이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었는지, 왜 차별하고 있는지 모르고 차별한다. 일례로, 장애인신학에서 말하는 근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주체이다. 근대는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를 파악하지,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거부된다. 그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거부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탈근대(Post-Modernity)를 살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보면, 내 생각에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가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어필하느라 모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시키는 현대인은 그렇게 사회에서 소비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가 주장하고 실천했던조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비사회를 돌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더 갈망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메시아 사상이 할리우드에 히어로 물들과 만나 판타지로 치닫고 있지만, 판타지가 아닌 희망(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은 깊고, 내 발걸음은 너무 느리다.


Posted by 장준식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그리고...

마음의 고향 같은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숲을 가지고 있는가. 그 숲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없다면, 인생의 아픔을 어디에서 달랠 수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느낌,
스캇 &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는 느낌,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는 느낌,
그리고,
나영석 PD의 <삼시세끼>를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아프면서도 그 아픔을 치유(힐링)할 공간과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의 삶에
작은 숲이 되어 작은 힐링을 제공하는 <리틀 포레스트>,
결국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연과 그 자연에 깃든 추억과,
무엇보다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갈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작은 숲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숲을 함께 거닐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을 완성한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말한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괜찮아’의 위로가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권하는 영화,
그리고,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도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를 살리고 싶다

Christianity is Platonism for the masses.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처방약을 보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의사가 이 약을 당신에게 처방해 준 이유는 이 약이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장)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사명을 열심히 지켰다.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나갔고, 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 그 땅과 그 땅의 사상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복음만 봐도, 로고스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로고스는 유대 개념이 아니다.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차용한 것은 헬라인들의 철학인 플라토니즘(플라톤 철학)이다. 그런데, 그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사상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차용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이 더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유통되는 소위 기독교의 교리는 대개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등장하는 두 왕국 이론도 그렇고, 그의 원죄 개념도 그렇고, 그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도 그렇다.


중세에 가면, 플라톤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해져, 더 복잡한 기독교 교리가 생성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성만찬 교리가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섞인 교리이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의 보편 논쟁은 모두 플라톤 사유의 반영이다. 보편의 개념(이데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이 실재론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철학이 유명론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교회를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보편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야, 보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교회는 영토와 사상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복음의 훼손을 가져왔다. 복음의 이원론적 해석이 불러온 가장 큰 재앙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몰이해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정의롭게 정화시키는 원동력을 잃었고, 오히려 사회의 적폐가 되었으며, 여전히 몰역사적인 구원만 외치고 있는 데 머물고 있다.


니체가 외친 구호,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는 옳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도 옳다. 니체가 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왜곡한 교회의 파렴치한 역사와 권력이다. 치료를 위해 처방한 약이 그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친 격이다. 교회가 지금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그 부작용을 걷어내고, 약효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게 끔 만들 수 있을까? 교회를 살리고 싶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4. 10. 04:33

두려움, , 평강

(요한복음 20:19-23)

 

4개의 복음서는 모두 빈무덤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약간씩 다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건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것과 같다. 다만, 복음서 저자들이 전하는 것은 빈무덤이다.

 

빈무덤사건에 대해 전하는 방식은 복음서마다 다르지만, 빈무덤 사건이 불러온 제자들의 반응은 같다. 두려움과 의심이다. 본문은 빈무덤 사건이 발생한 날 저녁 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도 자기의 스승처럼 잡혀가 죽임을 당할까봐서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오해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같은 빈무던 사건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빈무덤 사건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음모가 등장한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가 생전에 했던 말,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말을 전하며 사흘동안 예수의 무덤에 경비병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무덤 앞에 경비병을 세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무덤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은 경비병을 매수하여 이런 증언을 하게 한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대인 당국자들이 꾸민 음모의 주범으로 지목된 제자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처한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으나 실제적인 고통을 가져온다. 두려움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본문에서도 표현하고 있듯이, ‘문을 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조심하게 만드는 순기능도 있지만, 두려움이 깊어지면 무엇보다 삶은 그 자체로 문을 닫아 버리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두려움은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두려움은 생명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

 

성경은 두려움과 맞서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생명을 꽃피운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와는 반대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그 안에 갇혀 허무하게 생명을 허비하고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이다. (11:27-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그 중에서 하란은 일찍 결혼하여 룻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데라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모님과 형제들보다 먼저 죽는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당한 데라는 남은 자녀들과 손자 룻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한다.

 

그런데, 데라는 무슨 일인지,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중간에서 멈추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산다. 그곳의 이름은 하란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인생의 문을 닫고 그곳에서 살다 죽은 일에 대하여 여호수아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4:2).

 

그렇다. 데라는 자식을 잃은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생의 문을 닫고 우상의 쾌락에 빠졌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생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인생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다.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이 닥쳤고,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두려움은 평강을 잃은 상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잃은 것을 되찾아 주시고자 한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린다. 평강이 없다. 그래서 표정이 어둡고, 행동이 거칠고, 말에 독이 묻어 있다. 우리는 문을 닫고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내면의 발전도, 관계의 발전도, 신앙의 발전도 이루지 못하며 산다. 생명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답답하게 갇혀 그 자리를 맴돌다 철 지난 꽃처럼 시들고 만다.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만 묻어날 뿔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명을 가두고 있는 두려움을 깨부수고 문을 열 수 있을까? 본문에 의하면,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들에게 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실제적인 일이다. 두려움이 닥치면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일단 숨이 잘 안 쉬어 진다. 두려움에 처한 사람의 숨소리와 평강 가운데 있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건강한 사람의 숨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을 안정시킬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인가? 숨을 고르게 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숨을 정상적으로 쉬지 못하기 때문에 신체는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셧다운시킨다. 그것이 기절이다. 기절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신체가 원래 지니고 있는 정상적인 숨의 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의 보호장치이다.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두려움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동안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훈련시키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기위해서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두려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성경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처럼 두려움에 갇혀 하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란(두려움)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모세도 처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을까봐 두려워 광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문을 닫고 살았지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여호수아도 모세의 뒤를 이어 영도자가 되었을 때,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깨고 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두려움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못하게 하지만, 두려움을 물리쳤을 때,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 큰 권능으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며 두려움을 물리치도록 이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보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두려움을 깨뜨리는 숨을 쉰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예루살렘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걸으셨다. 십자가의 죽음 앞두고 예수님에게 닥쳐 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 닥쳐왔을 때 예수님이 행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오해한다. 기도는 단순한 경건생활이거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응답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어떠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큰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경건생활을 위하여, 원하는 것을 아뢰기 위하여, 무엇인가 응답받기 위하여, 또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작두 타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더 큰 능력을 받는다.)

 

기도는 (루아흐, 성령, 생명의 영)’을 받는 자리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재능(gift)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권능을 받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능이 없거나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아주 조그마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언어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어(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망신당할 까봐에 대한 두려움 등 때문이다. 이 외에, 크고 작은 일이든 우리가 선뜻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능력이 없거나, 권능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다.

 

13년 살던 조지아를 떠나야 한다는 내적인 소명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괴롭힌 것은 재정 문제가 아니다. 돈은 어차피 없는 인생이라, 그러한 것은 별로 신경 쓰고 살지 않는다(그 문제에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두려움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생활해야할 지에 대한 두려움, 모든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런데,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때문인데, 그 숨은 기도의 자리에서 받았다. 30대 초반에 이민교회를 개척해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교회를 세워 나가며 한 가지 깊이 깨닫은 진리는 기도에 대한 것인데, 기도는 두려움을 물리치는 을 쉬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숨은 다른 숨이 아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숨이고, 그 숨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불어넣어주신 생기, 생명의 숨이고, 그 숨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 숨은 담대함이다.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꼭꼭 숨어 있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전혀 감당하고 있지 못하던 제자들이 을 쉬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창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14-21).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 때문에 문을 닫고 있는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을 받으라. 그 숨은 여러분을 멈추어 서게 만든 두려움을 물리쳐 줄 것이고, 묻을 열고 나와 하나님의 주신 재능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으로 크고 위대한 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어 보자. 그 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평강을 줄 것이다. 그 숨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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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