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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5.07 거듭난다는 것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5. 18. 09:17

열매와 행함

(마태복음 7:15-27)

 

기형도라는 시인이 있다. 1960년 생인데, 28살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다. 그는 중앙일보 기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후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는데, 한국 문학평론계의 거장 김현 교수가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으로 1989년도에 출간했다.

 

한국인으로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치고 기형도 시인의 시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시는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중에서 목사인 나의 시선을 사로 잡은 시가 있다. (아마 나 뿐 아니라 그의 시를 읽은 모든 목사들이 이 시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이다.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서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 평소에 강조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 말에 교회 집사들은 분노한다. 왜 그들은 목사님의 말에 분노했을까? 그들은 반대로, 생활이 아니라 성경에 밑줄을 긋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우리도 범하는 오류이다. 우리도 성경에는 열심히 밑줄을 그으면서, 생활에는 밑줄을 잘 긋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소위 산상수훈의 마지막 교훈이다. 마지막 교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은 열매행함이다. 이것과 관련된 핵심 구절은 이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는 말씀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자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이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열매로 안다는 것은 결과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매, 즉 결과만 좋으면 다 용서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면 이상한 거다. 팥 심었는데 콩이 나면 이상한 거다.

 

열매는 정직하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는다. 자연은 정직하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겉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는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어떤 신문 기사를 보니 한국 바다에서 백상아리가 잡혔다 한다. 양식을 하기 위해 쳐 놓은 정치망에 상어가 걸려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댓글이 참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이제 바다도 마음대로 못 가겠네.” 그랬더니 그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어들이지요! 인간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죽는 상어가 얼마나 많은데사람이 백상아리한테 물려 죽는 비율은 로또에 맞는 비율보다 적어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상어가 사람들의 손에 죽습니까?”

 

정말 맞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여느 맹수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위험하다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신과 세상에 선언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앉아 숨쉬기와 그냥 가만히 있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라고 생각한다. 숨만 쉬어도 공해를 만들어 내고, 뭣 좀 해 본다고 손만 대면 망치고 죄를 생산해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거듭나게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열매와 행함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가장 위험한 짐승의 탈을 벗고, 겉과 속이 같은, 즉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리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의 열매(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를 맺는 참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사도 요한이 강조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 3:18). 사랑은 말과 혀로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함의 문제이지, 말함의 문제가 아니다.

 

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ㅡ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학이편 6)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열매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주여 주여외쳐도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천국에 못 간다. 열매와 행함은 거듭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귀한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구원의 열매를 맺으셨고, 행함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참인간이고 참그리스도인이고, 참 거듭난 피조물이라면,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고 사랑의 행위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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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5. 7. 02:22

거듭난다는 것

(요한복음 3:1-16)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다. 마태, 마가, 누가는 히브리적인 사고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헬라 사고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헬라 사고의 원류는 플라톤이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이것은 플라톤의 저작이 후대 철학의 일반 개념들 형성에 풍부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과정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이다. 그가 말한 원문은 이렇다.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s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I do not mean the systematic scheme of thought which scholars have doubtfully extracted from his writings. I allude to the wealth of general ideas scattered through them.

- A. N. Whitehead, (New York: Free Press, 1985), p.39

 

"유럽의 철학 전통을 가장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규정하자면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잇따른 각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마구 발췌하여 꿰맞춘 학자들의 도식적 사고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퍼져나간 일반 개념의 풍부함을 말하는 것이다." 

 -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2부 제1사실과 형상셋째 단락.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원론이다. 이원론이란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인식적가치적 우위를 두는 사유 방식을 말한다. 존재의 세계를 이데아라고 부르고, 생성의 세계를 현상 세계라고 부른다. 우리가 현상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의 세계에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존재의 세계에 인간의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상 체계를 지닌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사상 체계를 이용하는 복음서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이 기독교의 복음과 결합하면서 많은 문제를 낳은 게 사실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적극 수용하여 복음을 전한 극우파의 대표적인 예는 영지주의이다. 지금은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자들로서,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을 지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그들만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았는가?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는 플라토니즘의 대중화다.” 니체는 기독교의 맹렬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비판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아니라, 플라토니즘을 통해서 왜곡된 기독교였다.

 

니체가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플라토니즘과의 결합 때문에 많은 부작용을 생산해내고 있는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하여 사용한 테제는 이것이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은 니체가 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나오는 선언이다.

 

우리가 알아 둘 것은, 기독교는 플라토니즘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은 누군가가 죽었다라고 선포한다고 해서, 존재가 없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 진리인 것을 끊임없이 우리의 삶으로 증명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룩한 의무를 지녔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정말 알아듣기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한 밤 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누가 행하겠습니까?” 이 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거듭나야 한다는 이 말 (Born again)! 우리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나이브하게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아주 진솔한 질문이다. 진리를 알아가려면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질문해야 한다.

 

거듭남에 대한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물과 성령은 물질과 영을 말한다. 물은 물질이고, 성령은 영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플라토니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말이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이 플라토니즘이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를 갈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거하게 되는 회심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은 이러한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요한복음은 거듭남을 사랑과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사랑(아들)을 내어주신다. 그리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은 요한복음서와 요한의 서신의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이런 말도 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신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사랑하면 책임이 생긴다. 나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사랑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미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이 세계(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랑의 사람이다.

 

영어로 책임은 Responsibility이다. 이것을 풀어서 보면, 책임은 Response + Ability이다. , 책임이란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성경에는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일례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거듭난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거반 죽게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웃에 반응한다. 그러나, 레위인과 제사장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이웃의 아픔에 반응하지 않고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못 본체 하고 지나친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반응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 부탁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 전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복음서에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나온다. “밭을 샀는데, 밭에 나가봐야 합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봐야 합니다. 장가 들어서 못 갑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가? 나 자신에게 반응 잘 하고 있는가? 건강을 잘 살피고 있는가? 몸이 살려달라고 요청하는데,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몸매가 장난, 장난 아닌 사람, 육신을 돌보지 않다가 병에 걸린다. 마음이 살려 달라는데, 신경 안 쓰다가 자살하는 것, 병으로 넘어가기 전에 반응 좀 하라.)

 

5, 가정의 달을 맞아, 특별히, 가정을 돌아보자. 부부 간의 갈등의 발단은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남편은 반응이 없어요, 사람이랑 사는 건지 시체랑 사는건지모르겠어요.” 남편이 아파도 부인이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저 인간은 그냥 저렇게 아파서 죽어도 싸니까?’ 반대로, 남편들은 부인에게 열심히 반응해야 한다. 여성들이 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모두 진리다.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불만은 여자들이 조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군대를 안 갔다와서!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불만은 남자들이 철이 없다는 것이다. ? 애기를 안 낳아봐서! 남자들은 생명 태생의 원초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래 철이 없다. 그러니,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잘 듣는 게 좋다.)

 

아이들이 부모님들에게 가장 스트레스 받아 하고, 가장 서운해 하는 것도, 반응이 없는 것이다. 대개 부모님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아 올 때만 반응한다. (찬유 성적표) 성적을 잘 받아와도, 칭찬보다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성적 잘 받아오면 놀라운가, 아쉬운가? 한국 부모들은 아쉬워한다. 조금 더 잘 했으면 올 100인데, 1등인데, 하면서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어! 긴장 늦추지 말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질과 영, 즉 전인적인 거듭남을 말한다. 플라토니즘은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 이 세상은 진실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거듭남은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의 일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육의 일에도 변화가 온다.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게 되면,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셨듯이, 우리도 나 자신과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지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책임은 반응하는 능력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거듭남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 세상(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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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