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11. 30. 02:38

시편에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편은 전쟁 제의에서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고대사회에서 일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늘 사람들의 실생활과 부딪히는 문제였다. 전쟁에서 지고 이기고는 곧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전쟁을 하기 전에 드리는 제의(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을 것이다. 이것이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시편이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인생은 전쟁과 같지 아니한가? 요즘 시대는 총성 없는 전쟁의 시대이다. 전쟁터에서 전쟁하는 것처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은 곧 전쟁이다. 진짜 전쟁이 아니더라도 집을 나서기 전 이 시편에 기대어 기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가르치는 현대 문명에서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나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이나 모두 기도의 중심에는 자신 밖에 없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선 시인은 회중들이 왕을 향해 어떻게 중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이야 다 똑 같은 것 아니겠는가! 왕을 향해 중보한다는 것은 왕의 운명이 곧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왕이 이기면 자신들이 이기는 것이고, 왕이 지면 자신들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독특하다기보다 매우 이스라엘스럽다.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그리고 성소, 즉 시온에 기대어 중보한다. 왜 이들은 여기에 기대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중보기도를 드린 후 진행되는 선언에서 볼 수 있다. 선언은 단연 구원의 성취가 담겨있다. 이 구원의 성취는 매우 확고하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싸워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이겨놓은 당상이라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그리고 성소(시온)’에 기대어 기도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심에 가 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승리는 확고하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에 기대어서,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더 확고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러한 기도는 어떤 사람이 병거, 말을 의지하는기도에 불과하다. 병거와 말처럼 유한하고 종국에는 썩어 없어질 것에 기대어 기도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어디 있는가? 자기성취에 기대어 기도하는 자는 결국 성취한 것을 잃고 나면 허무와 절망에 빠질 뿐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기성취가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렇게 되면 자기성취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즉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되어지는 일에서 성취와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든 나와 함께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만 성취와 승리를 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되어지는 일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찾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패배요 절망이다. 십자가 위에서 되어졌던 일은 죽음이었지만, 거기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총은 분명 승리요 소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제의적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신앙의 지표를 준다. 집을 나서기 전 기도하는 자의 기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정확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의 이름에만 기대어 기도하라. 이미 우리의 일상은 그 안에서 무한한 성취를 이루었고 승리하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만 하면 된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30. 22:25

시편 19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되어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4. 09:49

시편 18

은혜와 공적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없다. 그건 노예 계약일 뿐이다. 짝사랑이 아름답긴 해도, 그건 사랑의 허상이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상상만이 투영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쌍방향의 개념이다. 서로 마음을 나눌 때 참 사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찬양은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또한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격적인 돌봄을 받는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자가 베푸는 은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보호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이렇게 표현된다. ,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 그리고 산성.

 

시인은 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을까? 시인은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21-24).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시인은 의인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구약의 개념이다. 이런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 율법이 곧 하나님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자기 의덕분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와 공적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다르다. 구원은 배타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뜻이다. 자기 의는 공적이다. 이것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를 범하는 거다. 자기 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은혜(칭의)로 구원 받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의로움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라면 무엇 때문에 의로움을 추구하는가?

 

다시 한 번 관계와 구원의 문제를 돌아보자.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사귐)는 일방적이고 배타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노예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의로움이다.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사귐은 쌍방향이다. 이 사귐에 들어온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신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겉으로는 자기의 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자기 의를 말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의()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의는 공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생겨난 의는 은혜이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시인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 얼마나 분명하고 감사한 찬양의 이유인가?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16. 13:24

시편 17

만족은 멈춤이다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만족하기까지 멈출 줄 모른다.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이 강제로멈추게 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인간의 멈추지 않는 욕망을 멈추게 해주고 겸손을 맛보게 해주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은총이다.

 

시인의 탄원을 따라가다 보면 만족은 나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 멈출 수 없는 감정으로 소리 높여 탄원한다.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드리는 탄원기도는 원수의 입장에서 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게 의로운 자의 기도인가 싶을 정도로 감정이 너무 격해져 있다. 원수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짓밟히는 것을 보게 되기까지 만족이 없는 듯 하다. 원수를 비방할 때 쓰는 언어가 매우 과격하다.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갚아주셨으면 하는 방법이 매우 잔인하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이 급격하게 가라앉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그가 의로운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만족이 없기 때문에 쉼(안식)이 없다. 쉼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다. 평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늘 고달프다.

 

시인의 삶이 어떻게 이토록 만족 없는 삶에서 만족이 넘치는 삶으로 급격스럽게 변하는지 보라. 하나님을 만났을 때다. 하나님을 뵙고 나니 세상과 나는 간 데 없고오직 하나님만 보인다. 하나님을 뵈니 끝 간데 모르고 달려가던 마음이 만족함을 얻어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을 뵈니 원수도 안 보이고, 원수에게서 받았던 상처도 사라지고, 원수에게 가졌던 복수의 찬 분노도 사라진다. 하나님을 뵈니 이 마음이 하나님으로 차고 넘쳐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진다. 이제 시인은 만족한다. 이제 시인은 쉴 수 있다. 이제 시인은 평화 가운데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만족이 없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숨 쉴 틈 없이 달려간다. 조금만 더 달리면 이 마음에 만족이 올 거라고 자위하면서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나 만족은 신기루와 같다. 잡으려고 달려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고, 잡았고 생각한 순간 이 마음은 불만족에 또 쉼과 평화를 잃는다.

 

시인을 통해서 우리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 하나님을 뵈올 때 이 마음에 만족이 온다. 그러니까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참된 만족을 얻는 길은 우리의 삶에 만족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한 그것을 붙잡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틀어서(메타노이아, 회개) 하나님을 의로움 가운데 뵙는 것이다. 하나님을 뵐 때 오는 만족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멈추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쉼을 얻게 한다. 멈추어 안식하면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을 만나 만족하게 되면 모든 것이 멈추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10. 12:12

시편 16

짬자신앙에서 벗어나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 것이야!”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짬뽕도 먹고 싶고 자장면도 먹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짬자면을 만들어 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욕심이 뷔페식당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지적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교만이라고 일컬은 원죄이다. 이것은 우주의 블랙홀과 같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아무리 빨아들여도 만족함이 없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한다. 이 교만은 하나님까지도 상대화시켜 자기 만족을 위해 이용한다.

 

시인은 이렇게 자기 집중에 사로잡혀 있는 교만한 자와 거리를 둔다. 시인은 우상숭배자들처럼 하나님을 상대화시키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교만한 자들는 혼합주의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부요케 해줄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이방신들(우상들)에게 피의 전제를 드리며 그들의 이름도 부른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교만의 결과다. 교만이 만들어낸 짬자신앙이다.

 

시인이 이러한 짬자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신앙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끝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내면서 산다. 성취할 일거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오락도 있고, 사회적 교제도 있는 가운데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오감적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산다. 오히려 이런 자에게는 신앙조차 취미생활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마지막 날에 위에 열거한 것들,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것들이 나의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기쁘고 행복하다. 두 다리 딛고 살고 있는 땅이 척박하기로 유명한 팔레스타인 땅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기업()이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삶이 오직 하나님께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었다고 찬송하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시인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산업)과 피()를 마신다.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마음을 두거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피난처를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나의 살은 그리스도의 살이고 나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셨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아 하나님만 바라보며 산다. “짬자신앙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5

시편 15

윤리를 넘어 칭의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일상은 없다. 자는 것, 먹는 것, 쉼 쉬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까지도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편은 제의전승으로 분류되는 시인데,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누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개 제사법은 외적인 형식을 주로 취급하는데, 이 시는 제사와 관련해서 윤리적인 면을 취급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첫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정직과 진실을 제시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정직과 진실에서 멀다.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최초의 인간 아담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 안에 거짓과 속임수가 꿈틀댔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겪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 하고 속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 이미 거짓말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어려서부터 윤리적인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해도 잘 교정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늘 거짓말 하고 속인다. 시인은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답게 정직과 진실을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있다고 못박는다.

 

둘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제시한다. 특별히 입으로 짓는 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마음에 들어 있는 생각이다. 생각이 비뚤면 입도 비뚤어진다. 이건 감출 수 없다. 잠깐의 립서비스는 할 수 있지만, 결국 속내는 입술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삶은 교만에서 온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를 교만한 자라고 한다. 교만만큼 다스리기 힘든 인간의 악한 본성도 없다.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악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둠은 빛이 들어와야 물러나듯이, 교만의 어둠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빛이 들어와야 물러간다. 그러므로 교만과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빛을 사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 비취는 한 교만의 어둠은 발 붙일 곳이 없다.

 

셋째로 시인이 제시하는 윤리는 돈 놀이에 관한 것이다. 돈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다. 이 사회는 돈 관계로 엮여 있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개인적인 윤리가 아니라 사회윤리로 확대된다. 좋은 사회 시스템과 좋은 법은 바로 이 돈 놀음에 피해보는 사람이 없도록 돈 관계를 잘 정리해 주는 시스템과 법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건전하게 살아가더라도 사회적 제도와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돈 관계 때문에 고통 받게 되어 있다. 돈으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회가 바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윤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윤리를 지닌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이건 너무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발언이다. 인간을 일컬어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펄벅은 살아 있는 갈대라고 했으며, 성경은 상한 갈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의 수식어는 각기 다르지만 갈대라는 명사는 똑같다. , 갈대처럼 한 없이 흔들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그만큼 토대가 깊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인간에게 덧입혀 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갈대처럼 흔들리다 쓰러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윤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덧입혀지는 의로움(칭의), 바로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4

시편 14, 53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있다하는 자들을 어리석다 하고, ‘하나님이 있다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을 어리석다 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생각의 중심에 인간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거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한다. 이들의 삶 속에는 어리석음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없다하니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게 되고, 마음이 부패했으니 그들이 하는 행동은 모두 가증스럽고 악한 일들뿐이다. 당연한 결과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없으니, 생명 냄새 나는 일들을 행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명이 떠난 송장이 내뿜는 송장 썩는 냄새 나는 일들 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먹어버린다. 하나님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복음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가난한 자들은 삶의 토대가 없는 이들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삶의 토대가 없는 이들은 기댈 곳이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스스로 삶의 토대를 쌓으려 하기 때문에 늘 분주하다. 그러나 그들이 쌓은 삶의 토대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거리가 먼, 유한하고 썩어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생명이 아닌 것에 기대어 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생명이 없는 곳에는 평안도 없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평안도 없다.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생명자체이신 하나님 만이 평안을 주신다.

 

시인은 하나님 만의 고유한 구원 방식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가난한 자들을 못살게 굴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도리어 어리석은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그렇게 온다.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온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가난한 자들이 걱정하고 근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는하나님을 인정할 것인가에 있을 뿐이다.

(시편 14편과 53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3

시편 13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인의 처지는 처절하다. 이 짧은 구절에서 어느 때까지를 네 번이나 외치고 있다.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섰다는 뜻이다. 이건 외적인 환경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고 영적인 면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다. 이런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끝까지 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서지 않는다. 그 환경에 얽매이고 매달려 육체의 고통만 당하고 있을 뿐, 참 구원을 위해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죄악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영적인 절박함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박함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 절박함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그냥 저절로 오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시인의 간구를 보라. 한계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라. 우리는 보통 기도하기를 우리의 원수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수를 이기려는 의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싸워 이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시인은 원수로 인한 인내의 한계상황에 다다랐을 때 그 문제 갇혀 좌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있다. 시인의 간구는 이것이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왜 시인은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설화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짐을 죄악을 향한 것,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시대도 이것을 부추긴다. 세상에 눈이 밝아져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의 삶을 발맞추려고 욕심을 극대화시킨다. 세상에 눈이 밝아지면 나 밖에는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바알신앙을 갖게 된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바알신앙으로 타락시킨다.

 

시인의 간구는 이와 다르다. 시인은 원수의 조롱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밖에는 없다는 것을 신앙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눈에 빛을 주셔야, 즉 영적인 눈을 주셔야 원수를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바로 이거다. 참된 문제 해결은 나를 짓누르는 외적인 환경이 나에게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두 절에서 외적인 환경에 평안이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한 원수의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 즉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 원수의 조롱이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보이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2

시편 12

말은 존재의 집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

 

(언어)은 존재의 집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유명한 말이다. 내가 내뱉는 말에 나의 존재가 담겨 있다는 것을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라. 우리가 얼마나 함부로 말을 내뱉는지.

 

시인은 함부로 말을 내뱉는 악인들의 말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온통 거짓아첨뿐이다(2). 그들의 마음은 둘로 나뉘어져 있어서 도통 진실을 분간할 수 없다. 진실과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을 바꾸고 말로 사람을 호린다.

 

시인은 자신의 혀를 믿고 거짓과 아첨뿐인 말로 세상을 뒤흔드는 그들의 악행을 본다. 그들은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졌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의 혀로 자기 마음대로 말하면서 살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발견한 인간의 말이다. 결국 교만함만 낳는 멸망의 말이다.

 

시인은 인간의 말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말씀)을 선포한다. 악한 자들의 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신다. 악한 자들의 거짓과 아첨뿐인 말도 듣고 계시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의 탄원의 말도 들으신다. 하나님은 고통 당하는 자들의 탄원을 들으시고 일어나신다. 그리고 그들을 안전한 지대로 옮기신다(4). “도우소서”(1)라는 탄식을 듣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시인은 거짓과 아첨뿐인 인간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순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하고 불순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신실하고 믿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한다. 거짓과 아첨뿐인 인간의 말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순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순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혀를 주장할 때까지, 그래서 나뉘어진 마음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때까지, 우리는 말을 아끼고 아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혀를 주관할 때 그때 비로소 입술을 열어 말해야 한다. 그때는 덕스럽고 복스러운 말만 나오리라.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39

시편 11

정직한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

 

시인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말한다. 위기에 처했을 때 물리적으로 성전으로 피했다는 말도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성전 자체가 무슨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머무신다는 말은 매우 성례전적인 신앙고백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지은 이유는 보이지 않게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이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살았다.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성전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악인이 화살을 겨눌 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피했다. 시인이 자신이 겪는 위기와 고통을 악인이 쏜 화살에 비유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살은 시인의 시대에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먼 곳에서 공격할 수 있고, 재빠르게 적을 해치울 수 있는 무기였다. 화살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었다. 시인이 겪는 위기와 고통은 바로 이러한 무시무시한 무기로 공격하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해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적들은 밝은 데서 그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데서쏜다. 뒤통수를 치고 술수를 쓰고 은밀하게 공격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무서운 무기로 이렇게 은밀하게 공격하는데 거기에 안 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위기와 고통은 이렇게 눈 뜨고 코를 베이는 격인 때가 대부분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악인의 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이렇게 한탄한다.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것이 최선이다. 악인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의인이 악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더 큰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 ,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돌보시고 당신의 큰 권능으로 우리를 곤경에서 구해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좌절하기 쉽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하나님의 얼굴이 가린 것 같고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악인의 공격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압박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시고 우리를 환란에서 구원해 주신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악인의 악행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의인들을 모른 채 하지 않으신다. 위기와 고통의 상황에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이것을 믿는 자가 정직한 자이고,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35

시편 9, 10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시편 9편과 10편은 함께 읽어야 한다. 이 시편들은 답관식(acrostic Psalms)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각 연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열해서 쓴 것을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내용만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도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알리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이 어울려 빚어내는 언어 예술이다.

 

시편 9편은 감사찬양시이고, 시편 10편은 탄원시이다. 찬양과 탄원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맨날 찬양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탄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찬양과 탄원은 변증법처럼, 또는 대위법처럼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시편의 내용이다. 시편 9편의 내용은 하나님이 무대 중앙에 서 계시고 악인들이 주변을 서성이는 형국이고, 시편 10편은 악인들이 무대 중앙에 서 있고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시는 형국이다.

 

눈이 더 가는 것은 시편 10편의 탄원이다. 희극보다 비극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심리가 반영된 탓이다. 시인은 애가 탄다. 악인들의 비아냥거림에 속이 뒤집힌다. 악인들이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어보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10:4). 악인들이 세상에 판을 치는 이유고, 그들이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인들이 대놓고 악한 일을 저질러도 하늘에서 금방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현상이다. 내가 지금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해서 당장 나에게 천벌이 내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악인들은 마음이 대담해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눈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손발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전혀 돌보지 않나 보다. 하나님은 없다.’ 악인들의 악행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가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실까?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다. 꾀를 내어 남을 속이려다 도리어 그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악인들의 악행을 이처럼 꼬집고 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9:15). 악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은 참으로 악랄하다. 그것들은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고(10:9), 거기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다(10:7). 악인들의 횡포에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은 넘어진다. 아프게 넘어진다.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악인들을 그냥 놓아두시는 거다. 그들의 죄값은 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로 인해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렇게 탄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재판관이지만, 의인들에게는 피난처시다. 그러니까 탄식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의인들에 대한 구원인 것이다.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신다’(10:14). 시인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13

시편 8

위기의 그리스도인

 

요즘엔 하늘에 별이 별로 없다.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공해 때문에 안 보일 뿐이다. 공해에 찌든 하늘에 듬성듬성 뜬 별을 보면서 사는 현대인들이 이 시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현대인들은 소박한 별에 관심이 없고,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에 열광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늘을 온통 덮고 있는 주의 영광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보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문명과 거리가 먼 시골로 간다. 가로등조차 없는 깊은 산골 일수록 더 좋다. 달 밝은 밤도 피하는 것이 좋다. 칠흑 같은 밤이 좋다. 오직 하늘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만 보이는 밤이 가장 좋다. 현대인들은 그런 곳을 애써 찾아 가야 하지만, 시편 8편을 쓴 시인이 살던 시대는 매일 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인은 밤하늘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눈에 보기 좋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위엄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들보다 힘 센 존재가 아니다. 연약하고 겸손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아이와 젖먹이. 통쾌한 역전이다. 그야말로 예술이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인간 없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인간을 말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시인이 통찰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다(5). 이는 창세기의 창조질서가 반영된 진술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뒤 그 지배권을 인간에게 넘겨 주셨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떠 지어졌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지배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어야 할 선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꾸 이 경계를 무너뜨린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다 보니, 만물을 발 아래 두다 보니 어느새 청지기의 사명은 없어지고 마음이 교만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스스로 신이 된다. 시인이 시의 처음과 끝을 무엇으로 시작하고 끝맺는지 보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는다. 시인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기 전에 예배자이다. 예배자는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이다. 주의 영광을 가리는 자는 예배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원수와 보복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늘 이 긴장 관계에 산다. 예배자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허락 받은 자로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있는 존재이다(5).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위태롭다. 날마다 예배자로 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만이 이 위기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22. 23:37

시편 7

악인의 절망, 의인의 희망

 

말이 칼보다 무섭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시인은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상황을 전쟁에서 쫓기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1). 이제 자신의 결백을 풀어줄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안 계시다. 하나님이 시인의 마지막 희망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댄다. 그러나 그 기댐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기댐이 아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형편이 어려운 때나 언제든지 시인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시인의 마음은 희망적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기대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의로움이다.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시고, 불의를 못 참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11). 성질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의분을 내시는 것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분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 가운데 날 뛰게 될지를 상상해 보라. 시인이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를 통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의로움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로움에만 희망을 걸고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움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희망을 걸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자신의 마음의 정직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한다. 의는 의와 통한다. 시인은 만약자신에게 고소자들의 무고한 그 죄들이 발견된다면 징벌을 받아도 괜찮다고 맹세하고 있다(3-5).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호소한다(10).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다. 시인은 잉태임신의 은유를 사용하여 악인을 묘사한다. 그들이 행하는 악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듯, 악인은 죄악을 잉태한다. 즉 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임신해서 배양되고 장성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죄의 뿌리는 깊다. 우리가 짓는 죄는 지금 당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서 길러진다는 말이다. 죄악의 실체가 안 보인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는 죄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죄의 씨앗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씨가 자라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 죄의 씨앗을 제거하셨다. 이미 뿌려진 죄의 씨앗이 현재까지도 그 실체를 드러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제 더 이상 죄의 씨앗은 뿌려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절망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희망이다. 바로 여기에 시인의 감사 찬송이 우리의 감사 찬송이 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15. 04:30

시편 6편
나를 떠나라는 외침

 

시인은 아프다. 질병 때문에 아프고, 원수 때문에 아프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아프다. 그것을 시인은 벼가 떨린다라고 표현한다(2).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뼈는 육체적 힘과 건강이 자라는 처소이며, 심지어는 감정의 처소이기도 하다. ‘뼈가 떨린다는 시인의 고백을 통해 그의 건강과 정신이 얼마나 쇠약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이고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시인은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는 흔히 죄의 고백하면 잘못한 일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우선 고대 히브리인들의 생각에 질병은 죄의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조건 불합리한 생각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이 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신학적 진술이지, 자연과학적 진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도덕적 뉘우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학적 신앙 고백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이러한 처절한 참회의 기도는 헛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시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하게 호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법적인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헤세드(언약적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에 신실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함, 즉 당신의 의를 위하여 시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다.

 

시인의 탄원은 이제 구원의 확신으로 바뀐다(8). 현재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시인은 더 이상 낙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헤세드) 안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원수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외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게서 시인을 떨어뜨릴 수 없다. 이 당당한 신앙의 고백이 원수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과 너무도 닮아 있다. 예수는 자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쳤고( 4:10), 자신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쳤다( 16:23). 이렇게 시험을 이기고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언약이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아가페(사랑)라고 증거한다. 구약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게 한다. “나를 떠나라!”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2. 02:05

시편 5

사귐의 기도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 기도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하기 위해 하던 모든 일을 멈추었다. 기도의 생활화를 충실히 준행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도에 집착했을까?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경건한 행위였다.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의인의 필수요소였다. 의인은 기도했고, 기도하는 자는 의인이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세상에 보일 수 있는 방법이 기도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경건의 모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기도의 생활화는 결국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경건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데 무력해진다. ? 기도가 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는 생활 속에서 빨리 해치워야 할 의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시편 5편은 아침 기도이다. 자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둔 셈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영성은 아침에서 비롯된다. 한국 교회는 여기에 더 집착한다.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새벽 기도 문화는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농경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전이 새벽기도에서 왔다고 미화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 새벽기도는 만능열쇠이다. 모든 묶인 것을 푸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맞는 말이지만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기도 신학에서 기도는 사귐의 차원이지 능력의 차원이 아닌 것을 밝히고 있다.

 

시편 5편의 시인은 아침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린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능력의 차원에 있지 않고 사귐의 차원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도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기도가 사귐의 차원에 있으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그분의 뜻을 따라 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시인은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보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심판과 보호는 목적이 아니고 결과일 뿐이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3)이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고(4-6),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11-12)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보호를 기대하게 한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시인을 보라. 그의 눈에는 원수들의 배역함이 보이지만, 결국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수들의 배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자, 사랑)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앞에서 원수들의 배역함은 아무 것도 아니다. 원수들 때문에 원통해 하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곧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는 능력의 기도에 머물지 말고, 사귐의 기도에 빠져 들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