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3. 2. 22. 03:14

군자삼락(君子三樂):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군자의 즐거움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군자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인은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즐거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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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3. 2. 8. 05:08

일사천리(一瀉千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함 / 말이나 글이 조금도 거침이 없음

 

중국의 長江(장강:양자강)黃河(황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유명합니다. 각기 중국을 서에서 동으로 쌍둥이처럼 흐르면서 대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두 강은 예부터 시인묵객의 좋은 벗이 되어 명시나 명화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남송의 학자 진량(陳亮)은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이라는 글에서 장강의 위용(偉容)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長江大河 一瀉千里 不足多怪也 (장강은 대하이니 일사천리로 흐른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一瀉千里 본디 장강이 거침없이 천리를 내닫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장강의 흐름처럼 어떤 일을 매우 신속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 '엄산당별집' –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국가반란죄를 뒤집어 씌운 로마당국이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모든 것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되기를 바랬습니다. 게다가 절대로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죽은 시체를 어서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물론 옛날이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느리게 돌아갔겠지만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인간 마음의 조급함일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것이나,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 분주한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기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일사천리로 진행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리는 속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빠르게 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잠깐 멈추어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자는 자신들이 표방하는 팍스 로마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됐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던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씌워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과도한 구원의 욕망을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진짜 구원자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멈추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았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그리고 병들고 배고픈 민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의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으면 베풀어지지 못하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멈춤의 영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손 쉬운 일 한 가지는 자신의 두 발을 교통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걸어보시지요. 무엇이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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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춘추 시대, 노나라에 왕태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비조(鼻祖)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올자(형벌에 의해 발뒤꿈치가 잘린 불구자)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이니라.” -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 –

 

톨스토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의의(意義)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덕 있는 사람이 곧 명경지수가 아니겠는지요?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되는 것을 일컬어 소명(Vocat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의미합니다. ‘내적 부르심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고, ‘인생의 목표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사도 바울의 소명은 이방선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무단히 노력을 합니다. 선교를 다니면서 박해를 받아 죽을 고비를 한 두 번 넘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계를 위해서 천막 짓는 일도 합니다. 물론 동역자들을 만나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지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한 직업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것들이 동원될 뿐입니다. 소명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곳만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집중되니, 마음이 잔잔하니, 세상 풍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명경지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심을 받은이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영어로 ‘fix your thoughts on Jesus’인데,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릴 때 소명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인생의 의의를 도대체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명이 흐려질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흐려진 만큼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이 분명할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분명한 만큼 고요해질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답게 자기 인생의 의의를 분명히 깨닫고 사는 명경지수의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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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힌다 / 생사를 같이 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

 

해로는 시경에 있는 '격고(擊鼓)'편의 시에 나오는 말로, 전선에 출전한 병사가 싸움터에서 방황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生死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 (삶과 죽음과 헤어짐과 만남에 상관없이, 항상 함께 하자 언약하였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겠노라). ‘동혈은 시경의 '대거(大車)' 편의 시에 나오는 말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군주와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군주는 포로가 되고 부인은 초왕의 아내로 지목되어 궁으로 끌려갔습니다. 초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부인은 포로가 된 남편을 만나 '죽어도 이 몸을 타인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고선 시를 짓고는 자결했고, 남편도 따라서 자결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 한 유래는 대부(大扶)가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옛 애인이 보고 부른 노래에서 연유한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穀則異室 死則同穴 (살아서는 집이 다르나,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 하리라.)  - 시경(詩經) –

 

마음이 훈훈합니다. 부부사이에 이러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늙어 가는 일은 쉽지만, ‘함께늙어 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늙어감을 경시하는 사회풍조와 이혼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해로동혈이 그저 골동품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 보지만, 사실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신적인 영역이라 쉽지 않고, 인생은 복잡한 피조물의 영역이라 쉽지 않습니다. 사실상 신적인 영역과 피조물의 영역이 함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모순이고 부조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이 부족해서, 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인생()의 일치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인생의 일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인생의 일치를 몸소 보여주신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신앙과 인생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신앙과 인생이 일치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부활이라는 또 다른 현실이 열렸습니다.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는 삶 너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신적인 영역, 즉 부활, 영원한 생명, 새창조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 땅에서 해로동혈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늙어가고,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오히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내려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남자(한 여자)해로동혈하지 못했다고 하는 자책에 매이지 말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해로동혈에 힘쓰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는 의식을 통해서 해로동혈을 약속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죽어 예수 그리스도가 묻혔던 그곳에 묻혔다가 다시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아나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살겠다고 인침 받는 것이 세례이니, 이것만큼 확실한 해로동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해로동혈이 우리 육신의 부부사이의 해로동혈또한 가능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인생이 신앙을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인생을 이끌어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젊어서 한 몸이 된 배우자와 해로동혈하는 은혜를 누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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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택목(良禽擇木):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 /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가려서 섬긴다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遊說)하기 위해 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습니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습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습니다. - 춘추좌씨전

 

옛말에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골라 사귀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을 도모합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이것 또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성(罪性)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여기서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도 맞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오히려 미워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들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드디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그때부터 제자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둥지를 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고 힘껏 전합니다.

 

우리의 재능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재능을 알아준다기 보다, 그 재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서 우리들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놓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도 애절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할지 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의 둥지를 틀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현명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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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약고구(良藥苦口): 좋은 약은 입에 쓰다 /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유익한 것이다

 

()나라의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크게 동요해서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항우보다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하게 되어 3세 황제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중에는 온갖 재보와 아름다운 궁녀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으나 장군 번쾌가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 물러가 진을 치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유방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장량이 간했습니다. “화려한 아방궁에 눈이 멀어서 진나라의 폭정을 본받으려 한다면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습니다. 번쾌의 충언을 들으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불현듯 깨닫게 되어 왕궁을 물러나 패상(覇上)에 진을 쳤습니다. 이로인해 유방이 민심을 크게 얻게 됨은 물론입니다. -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우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말은 복음입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소식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 듣기를 거부합니다. 아마도 회개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한 오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는 묵시사상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묵시사상에 의하면 종말이란 곧 세상의 멸망인데 이를 심판의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표현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심판 당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종말론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묵시사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심판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지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심판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지옥의 불과 같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개념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새롭게하시는 분이지, 지옥 불에 태워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한다는 예가 단적으로 들어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운동에 참여하고 그 운동을 통해 회개의 역사를 삶 가운데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의로운 하나님 나라가 입에 쓰게 느껴지기 때문에 잔인하게 뱉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죄악이고 추함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전하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보다 바른 말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직면하고 있는 최고의 현실이요 진리입니다. 약이 입에 쓴 이유는 그 몸을 병()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귀에 거슬리는 이유는 존재를 불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이 말씀에 의해서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불의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더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 나라의 임재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의로운 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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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12. 19. 03:33

천재일우(千載一遇): 년에 만날 있는 기회 /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이르는

 

동진(東晉)의 학자 원굉(袁宏)은 삼국시대의 탁월한 신하 20명의 업적을 찬양하는 글을 썼는데, 그 중 위()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명마를 가릴 줄 아는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 천리마[] 한 필을 찾아내지 못한다 [夫未遇伯樂則 千載無一驥]'고 적고, 어진 임금과 뛰어난 신하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 년에 한 번의 기회는 이 세상의 통칙이며 [夫萬歲一期 有生之通途(부만세일기 유생지통도)] 천 년에 한 번의 만남은 현군과 명신의 진귀한 해후다 [千載一遇, 賢智之嘉會(천재일우 현지지가회)]. - 문선(文選) 원굉(袁宏)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 –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용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뜻입니다. 여름만 되면 납량특집 단골 주제로 등장하는 구미호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설을 들으면, 이무기도 구미호도 무작정 천 년을 기다린다고 용이 되거나 인간이 되는 듯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또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 년을 기다려온 바로 그 기회의 날에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그 기회를 놓쳐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낱 미물에 불과한 이무기이고 구미호이지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놓여버린 천 년 만에 온 그 기회를 또 얻기 위해서 또 다른 천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세월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기회의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회는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기회가 지나고 난 뒤에 아무리 울어도 소용 없는 법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뭇거리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출애굽을 감행합니다. 이들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천재일우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둘러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 탈출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재현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 유대인들은 지팡이를 지고 배낭을 메고 서서, 급하게 먹을 것을 챙기느라 누룩을 넣지 못한 빵을 손에 쥐어 들고 먹는 시늉을 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만큼 급박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급박한 상황의 절정이 누룩을 넣지 않는 빵에서 나타납니다. 누룩을 넣어 빵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지요. 이 정도로 긴박하게 천재일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는 먹을 것조차도 제대로 챙길 수 없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나면 먹는 것도 먹는 것 같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긴박함이 전해지는 단락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 그리고 가족들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좀처럼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생계와 가족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 말이죠. 그런데 복음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자들을 부르시는 정황은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15). 라는 복음을 선포하신 뒤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를 보여줍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천재일우입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생계도 가족도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오직 그 나라는 회개(메타노이아) 와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회개와 믿음이란 온 존재를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그것을 향해 여는 행위입니다.

 

어진 임금(현군)과 뛰어난 신하(명신)이 만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듯이, 하나님 나라와 참믿음의 사람이 만나면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새창조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원하는 구원입니다. 신앙이란 천재일우같은 사건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 인간의 응답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신비로운 구원사건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신앙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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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지신(移木之信):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 약속을 실행한다는

 

()나라 효공(孝公) '상앙'이란 명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부국 강병책을 훗날 시황제의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습니다.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앙은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三丈: 9m)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붙였습니다. '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십 (五十金) 주겠다고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지켰다고 합니다. -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專) -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옮기신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 때였습니다. 75세도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자손을 그렇게 번창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참으로 믿기 힘든 약속이었습니다. 75세에 자손을 번창시켜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도록 자손이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브라함은 부인의 몸종을 통해 자손을 이어보려 시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에 괜히 험한 꼴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조차 번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참기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힘을 다해 순종했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대신 어린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옮기신 궁극적인 나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언덕에 굳건하게 나무를 박고 거기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에 뼈를 묻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처럼 모든 만물이 부활하게 것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떠한 일을 행하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못미더워 아우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위의 고사성어에서 걸린 오십금의 상금과는 비교도 정도로 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한 상금을 걸고 하나님의 약속을 못미더워 합니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약속의 말씀을 힘써 전하는 수밖에는 없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속성상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도 하나님보다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어떤 것에도 방해 받거나 영향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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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요수 인자요산 (智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과 어진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성격과 행동 경향을 설명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식별력이 높습니다. 자신과 맺어지는 인간 관계에 관심이 많아 항상 겸허한 자세를 가지려 노력합니다. 두루 흘러 맺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기 때문에 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즐기기를 좋아합니다. 반면에 어진 사람은 의리를 편안히 하고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습니다. 그래서 산을 좋아합니다. 늘 자신과 하늘의 관계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위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적어 한 곳에 가만 있기를 좋아하여 고요한 성격이 많습니다. 또한 마음을 가다듬고 물질적 욕구에 집착하지 않으니 오래 삽니다. , 지혜 있는 사람은 물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산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장수한다고 합니다.  - 논어(論語) 옹야편(翁也篇) –

 

지혜로운 사람의 본성과 어진 사람의 본성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대답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 예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인성(人性)보다는 신성(神性)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의 인간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종교회의와 칼케톤 종교회의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동등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는 반신반인이 아니라 완전한 신, 완전한 인간(vere homo vere dues)이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 예수는 100% 인간이었던 동시에 100% 신이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기도 합니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기독교의 고백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믿음이 온전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앎의 고양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인 믿음은 얼마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맹목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믿음은 아는 데서 오고 이해하는 데서 성숙해 집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알게 되었을 때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이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입으로 시인하는 겁니다.

 

()와 인()은 지혜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자(智者)와 인자(仁者)는 지혜와 사랑이 충만한 사람 정도로 풀이하면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성품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지혜의 왕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증거합니다. 완전 인간이신 예수께서 지혜와 사랑이 충만하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본성 중의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물처럼 겸손하고 산처럼 뚝심이 있어야겠죠. 지혜는 화평케 하고 사랑은 형통케 합니다. 지혜의 사람은 평화의 도구가 되고, 사랑의 사람은 책임 있는 삶을 삽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해야 할진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지혜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처럼 조화롭게 평화를 이루는 삶, 산처럼 뚝심 있게 책임 있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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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改過遷善): 지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나라 혜제 때 양흠 지방에 주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태수 벼슬을 한 주처의 아버지 주방은 주처의 나이 열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주처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없어져 하루 종일 하릴없이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힘이 천하장사였던 주처는 걸핏하면 남을 두들겨 패는 포악한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시간이 흘러 주처는 철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지난 허물을 고쳐서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의 결심을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처는 마을 사람들에게어떻게 하면 마을 사람들이 평안하겠냐고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산의 호랑이, 장교(長橋)의 교룡(蛟龍)과 더불어 주처를 삼해(三害,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세 가지 존재)라고 여겼는데, 삼해가 모두 없어지면 평안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눈엣가시 같은 주처가 호랑이와 교룡에게 죽기를 바라고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주처는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호랑이와 교룡을 죽이고 마을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망한 그는 마을을 떠났고 동오(東吳)에 가서 학자 육기(陸機)를 만나게 되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육기는, “굳은 의지를 지니고 지난날의 과오를 고쳐서 새사람이 된다면(改過遷善) 자네의 앞날은 무한하네.”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주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후 10여 년 동안 학문과 덕을 익혀 마침내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 진서(晉書) 본전(本傳) –

 

성경의 인물 중 누구니 누구니 해도 개과천선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울 사도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 개과천선 한 인물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베드로는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인물은 아니었으니 그를 일컬어 개과천선 한 인물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황이 다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예수 믿는 자에게 해악을 엄청나게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사람을 개과천선 이전에는 사울이라고 부르고 개과천선 이후에는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사울은 지극히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름 뜻에서도 나타나듯이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신의 행동이 해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열성분자였던 그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서 정의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남에게 해악을 끼칠 때는 이러한 현상이 지배적입니다. 그것이 남에게 해악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어떠한 명분에 의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겁니다.

 

자칭 정의로운 일을 수행하던 사울은 어느날 정의를 집행하러 다메색으로 가던 도중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는 생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빛의 형태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상당히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낯설기 보다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황홀한 경험 때문에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지시대로 한 그리스도인의 집(아나니아)에 가서 그의 기도를 받은 후에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개과천선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경험하고 눈이 멀었다 떴을 때(기도하고 떴을 때) 같은 눈이지만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바로 그 상태. 자칭 정의를 수행하던 지극히 큰 자 사울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개과천선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정의를 수행하는 지극히 작은 자 사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우쭐해져서 자신을 큰 존재로 여기지만, 그리스도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되어 지극히 작은 자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개과천선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개과천선한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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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냄

 

()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 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나라 이전의 옛 책들을 그에게 바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 (修學好古, 實事求是)”라고 말했습니다. -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 –

 

이스라엘에도 옛날 책이 있었으며, 학문 탐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책은 구약이고, 그들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구약을 열심히 연구하여 나름대로 사회 체계와 질서를 잡아 나갔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대립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그들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 기자의 눈을 통해서 봐서 그런 것이지, 그 당시 실제 사회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잔치 집에서 윗자리를 차지해도 좋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명망을 얻으며 사는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최고의 지혜였고, 그들이 하는 행동은 최고의 경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이 하는 말에 도전을 하지 못했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 어귀에 나가면 인사 받느라 정신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상석에 앉아 대접을 받았습니다. 요즘 시대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사회 지도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유대 사회 최고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났을 때 그들이 예수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잖은 당혹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성서 기자의 눈으로 해석된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신약 성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우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믿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구약성경을 지독히도 열심히 탐구해서 나름대로 사회 체계와 질서를 잡아 나갔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하간왕 유덕은 옛날 책을 좋아하고, 학문 탐구를 즐겼고, 그래서 결국 사실로부터 언제나 옳은 결론을 얻어냈다고 하는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간왕 유덕 보다 못한 인물들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들도 하간왕 유덕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 사건이 신비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사실만을 탐구한다고 해서 그 비밀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2:25).

 

우리는 이것을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생떽쥐베리는 자신이 비행기를 몰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불시착하게 된 가운데, 어떤 먼 별에서 지구를 찾아오게 된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로 <어린 왕자>를 전개합니다. 생떽쥐베리가 고장난 비행기의 엔진을 고쳐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부르면서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막 한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생떽쥐베리가 깜짝 놀라면서 돌아보니 거기에 '어린 왕자'가 서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초면에 그런 생뚱맞은 부탁을 한 이유는 그가 떠나온 작은 별에 두고 온 양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떽쥐베리는 일손을 멈추고 양 한 마리 그리기 시작했는데, 몇 장을 그려도 어린 왕자는 그때마다 '이 양은 병들어 보여', '이건 양이 아니야, 뿔이 달려 있잖아', '너무 늙었어.'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다시 그려 달라고 떼를 씁니다. 생떽쥐베리는 '어린 왕자'가 너무나 까다롭게 구는 바람에 지쳐서 나중에는 그냥 '동그란 구멍이 두어 개 뚫려 있는 나무 상자' 하나를 대충 그려 주고는, "네가 찾는 양은 바로 이 상자 안에 있어."라고 말해 줍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그림을 받아 들자마자 "이게 바로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야."라고 하면서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리고는 그 그림의 상자에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양이 자고 있네."라고 하며 아주 만족스러워 합니다.

 

신비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양과 같습니다. 상상력(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형태로 말입니다. 그렇게 구약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그리스도를, 평생 구약성경 연구에 삶을 바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받아 든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명시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가 드러난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여전히 그리스도는 신약이라는 상 자 안에 들어 있는 양과 같습니다. 상상력(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결코 사실(성서의 진술)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예수가 곧 그리스도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예수와 고백된 그리스도가 합쳐진 호칭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성경이라는 상자에 감추어져 있는 양과 같은 진술입니다. 당신은 진정, 성경의 상자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성서의 진술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내고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질문 또한 감추어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겠군요.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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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 /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헛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당나라 현종때 도사 여옹(呂翁)이 예전의 조나라 수도였던 한단으로 가던 도중 주막에서 가난한 청년 노생(盧生)을 만났습니다. 노생은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려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막집 주인이 밥을 짓기 시작하는데 노생이 졸고 있자 여옹이 베개를 주면서 그것을 베고 자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생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결혼하고 수상이 되었다가 모함으로 귀양살이도 하고, 다시 복직하여 많은 손자를 두고 80세까지 잘 살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품을 하니 이 모두가 꿈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막집 주인은 아직 밥을 다 짓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옆에 앉아있던 여옹이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노생은 그 가르침을 명심하겠다고 감사하며 한단을 떠났습니다. -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지난 며칠간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꿈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예수라는 분을 통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터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예수라는 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분은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 옛날 다윗처럼 용맹하게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한단지몽’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유대인들은 ‘호산나’ 외치며 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외침과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꿈과 희망은 모두 십자가에서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습니다. 예수의 생전에 그를 따랐던 이 두 제자는 꿈같았던 한 때를 기억하며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는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가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한바탕 도성 예루살렘을 시끄럽게 했던, 그리고 온 유대를 들썩이게 했던 예수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에 당도하자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집에서 유숙하고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이 감사 기도를 하고 나누어 먹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예수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생시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생시인지, 아니면 부활의 주님을 몰라 보는 이 세상이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거나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믿습니다!”를 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에게 부활은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지 않으면, 부활은 우리의 참된 미래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은 ‘한단지몽’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계몽의 사건이 아니라, 참된 우리의 실존을 말해 줍니다. 궁금증을 갖고 질문해 보십시오.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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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초보은(結草報恩): 풀을 맺어 은혜에 보답한다는 / 죽어서까지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춘추시대 진나라에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그는 아들 위과를 보고 아비가 죽은 뒤에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 서모를 개가시켜 잘 살도록 하라고 항상 일러 왔습니다. 그러다가 무자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다시 과에게 명령하길, “내가 죽거든 너의 서모도 나를 따라 같이 죽게 하여 합장을 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후 무자가 죽게 되자 위과는 그의 아버지 무자가 병이 깊었을 때 분부한 명령은 제 정신에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무자가 생존 시에 누누이 분부하던 뜻을 따라 순장하지 않고 서모를 살려 주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했습니다. 그 뒤 진()나라와 ()나라가 싸움이 벌어져 위과가 전쟁에 나가 진()의 유명한 장수 두회와 싸워 위태로울 때 서모 아버지의 망혼(亡魂)이 나와 풀을 잡아 매어 두회가 탄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하여 두회를 사로잡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날 밤 위과는 꿈 속의 싸움터에서 풀을 맺던 그 노인을 만났는데 자칭 개가한 서모의 아버지라 하면서 자기 딸을 죽여 합장시키지 않고 살려 시집 보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피차 사랑의 빚 외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13:8).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허무하게 만드는 일 또한 없을 겁니다.

 

우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무슨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구원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구원하는 일이 본성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은혜에 보답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실로 생소한 반응인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할 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신앙의 한계를 미리 정해 놓는 처사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깊고 크셔서 우리가 헤아릴 수 없고 갚을 수도 없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릴 수 있게 됩니다. 다 갚았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쉽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보답의 차원에 머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을 건져낸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죄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구원 사건인 이유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때문입니다. 구원의 더 깊은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죽음이 구원의 징표라면 이 땅을 살다 죽은 모든 사람이 구원자로 칭송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아야 그의 죽음이 구원의 효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활의 관점에서 구원을 보지 않고, 죽음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의 개념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창조요 생명의 완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 들어섰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결초보은의 신앙생활을 넘어, 존재의 변화(새로운 피조물, 생명의 완성) 차원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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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大器晩成):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 크게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삼국 시대, ()나라에 최염(崔琰)이란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 외모가 시원치 않고 출세도 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고. 틀림없이 인물이 테니…' 과연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 최염전(魏志 崔琰傳) –

 

나다나엘 호손이 <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나게 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네스트는 어릴 엄마가 해준 바위 얼굴에 대한 전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인물이 되고 또한 외모도 바위 얼굴을 닮아가게 거라는. 어네스트는 그러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믿었고 그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품고 살면서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개더골드,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그리고 올드 스토니 피즈가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위엄 있게 있는 바위 얼굴의 인품을 고스란히 간직하지 못한 같다는 생각에 어네스트는 실망을 합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이제 어네스트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 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어네스트가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바위 얼굴을 닮고 싶다는 염원과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가 어네스트를 바위 얼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동네 사람들의 평가에 우쭐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네스트는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대하고 대망한다는 것은 이만큼 결과를 낳습니다. 어네스트는 살면서 바위 얼굴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바위 얼굴처럼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바위 얼굴을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엄청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만 이루고 나면 세상을 모두 얻게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을 겁니다. 무엇이 되고 나면 다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합니다. ‘작은 그리스도 되어야 한다는 , 세상을 짊어진 어린양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그리스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패배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네스트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존재를 집중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것입니다. 닮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네스트처럼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아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대기만성형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기술이나 처세술로 도달할 있는 형상을 좇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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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하고 굳센 것을 누른다 / 어떤 상황에 대처할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이기는 같지만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것에 당할 수는 없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음을 당하게 되면 굳고 단단해진다. 풀과 나무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게 되면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가 강하게 되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해지면 꺾이게 된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자리하게 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자리를 잡는다.”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굳고 강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은 없다. 물의 역할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알건만 그 이치를 실행하는 사람은 없다.” - 노자 도덕경 -

 

인간은 언제나 강한 것을 원합니다. 강한 나라가 지배하고 강한 사람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군사력을 키우고, 한 개인은 권력을 키웁니다. 노자의 통찰력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그만큼 죽음에 기울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죄성이라고 합니다. 죄성은 곧 죽음에 기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성에 기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죽음의 냄새 밖에는 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그 죽음을 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인간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육의 발전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가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지요. 물론 굉장히 획기적인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교육을 통해서 인간 존재가 나아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기대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가 르네상스 이후입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조절하고 계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희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바로 세계 1차 대전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고 패망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죽음에 기운 존재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죄성에 기운, 죽음에 기운 인간의 존재를 인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절대자인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고, 인간은 그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라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의 선포자입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가 구원으로 유효한 까닭은 그가 바로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자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구원 선포가 유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수혜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구원의 주체만이 구원을 선포할 때 그 구원은 믿을 수 있고 확실한 것이 됩니다.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이 참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죽음으로 기울어진 우리의 전 존재를 걸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솟아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지배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부드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힘없이 끌려가 십자가 위에서 조용히 처형당하셨습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드러우시고 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참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구원자로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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