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6

길갈에서의 리추얼

(여호수아 5:9-15)

 

1. 리추얼

리추얼(Ritual)은 한국 말로 의식(儀式) 또는 의례(儀禮)를 뜻한다. 리추얼은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억(remember)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New Start)의 기능이다. 리추얼은 우리의 삶에 마디를 제공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도와준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예배는 대표적인 리추얼이다. 충분한 리추얼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 리추얼을 잘 하는 사람은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김현관/이영주 집사님네 개 해리가 2년 전에 죽었을 때 내가 집전한 리추얼을 통해 두 분이 많은 위로를 받았고 해리를 잘 떠나 보낼 수 있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래서 집사님네는 리추얼을 통해 형성된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반려견 아리를 데려와 잘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신태숙 권사님 댁 자녀분들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리추얼(장례예배)을 통해서 엄마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끼리 한동안 본인들만의 리추얼을 통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잘 떠나 보낼 수 있어 이제 어머니 없는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2.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 길갈 리추얼

성경책 민수기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이 가데스 바네아인 것처럼, 성경책 여호수아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은 길갈이다. 길갈의 뜻는 “굴러갔다”, 또는 “떠나갔다”이다.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은 길갈의 리추얼이다.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아주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길갈의 리추얼은 지난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광야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제 시작된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길갈의 리추얼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3. 요단강 도하 후 이스라엘이 행한 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안으로 들어가자 요단강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고 바닥을 드러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다. 출애굽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순간이다.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은 성스럽고 순조로웠다.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서서 행한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요단강 바닥에서 열 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강변 서쪽에 기념물로 쌓아 놓는다. 이것은 징표의 역할을 한다. 후일에 자손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해주고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할례를 시행한다. 출애굽한 백성 중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 중 남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요단강을 건넌 후 이들은 할례를 시행한다.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할례를 시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없이 많은 적들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해야 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굉장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할례를 받아 회복하는 동안 적군이 쳐들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겜 땅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나쁜 일이 발생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히위 족속의 족장 하몰의 아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디나와 같은 어머니(레아) 밑에서 태어났기에 분노를 참지 못한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의 계획을 세운다. 디나를 아내로 달라는 하몰의 요청에 응하는 척하면서, 그러면,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 요청에 응하겠다고 꾀를 낸다. 그 딜은 받아들여졌고,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 바로 그때, 할례를 받고 회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히위 족속의 성읍에 기습하여 들어가 모든 남자를 죽인다. 이만큼, 할례 받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요단강 도하 후, 전열을 가다듬은 것이 아니라, 할례를 시행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시작될 전쟁을 맡긴다는 뜻이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이다. 우리가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결단 아닌가?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일들 앞에서 주눅들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담겨야 한다.

 

4.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발생한 첫 번째 역사

길갈에서의 리추얼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하나님은 그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길갈이다.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얼마나 위대하고 은혜로운 이름인가! 길갈! 꼭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제시대의 수치가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삶에서 굴러가지 못하고 떠나가지 못한 것에 있다. 아직까지도 친일논쟁을 벌이는 것은 국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수치다. 만약, 해방 후에, 적절한 리추얼을 통해 국가의 수치를 온전히 굴려보내고 떠나보냈다면 한국이 아직까지 친일문제로 시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의 수치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고 싸우는 일이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 여러 다툼이 있었지만, 적어도 애굽의 수치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었다. 왜 그랬는가? 바로 길갈에서 할례의 리추얼을 통해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고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5.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두 번째 역사

길갈에 진을 치고 여리고 평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통해 유월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쳤다. 광야에서는 긴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기의 힘으로 먹거리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우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어린 아이의 신앙이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의 신앙은 어른의 신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삶을 이끌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6.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세 번째 역사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주시고(떠나보내 주시고), 만나를 그쳐 이제 자립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여호수아 5장 13절 이하의 짧은 에피소드는 강력한 인상을 준다.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칼을 손에 쥔 한 사람이 여호수아의 눈에 들어왔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그 사람은 대답한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보내신 천사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징표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곳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리고 전쟁을 시작으로 이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고 얼마나 든든했겠나. 두려움이 눈 녹듯 물러가고 그의 마음에는 용기가 솟아올랐을 것이다.

 

7. 리추얼의 중요성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서 발생한 이 모든 감격스러운 일들은 리추얼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리추얼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우리가 ‘예배’라는 형태로 드리는 리추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정기적으로 행하는 리추얼에 삶의 무게를 실으라.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 것처럼,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삶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속상한 일들, 삶을 가로막고 있는 일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리추얼을 통해서 모두 굴려보내고 떠나보내라.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공적인 리추얼도 있지만, 각자 삶 속에서 나만 아는 소소한 리추얼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답답하고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든 삶 속에서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 보라. 리추얼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이다. 리추얼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멋지고 활기찬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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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2

연약궤를 멘 제사장들

(여호수아 3:7-17)

 

1.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민수기(광야에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견한다. 야곱 가족들의 애굽 이주 이후 430년 동안 가나안 땅에 가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그 땅이 어떠한 땅인지 알지 못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성경은 신명기를 지나, 여호수아서에 이르러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정탐꾼을 파견하는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때와는 달리 두 명만 파견한다. 이것은 명백히 여호수아와 갈렙 연상시키는 정탐꾼 파견 사건이다. 여러고 성에 정탐 다녀온 두 정탐꾼의 보고는 그것을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 두명의 보고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 2:24)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의 이야기는 광야를 지나면서 믿음이 성장한 이스라엘을 보여준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단강 앞에서 섰다. 감격의 순간이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생각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 속에서는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2. 요단강을 건너는 역사적 순간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수 3:5). 그리고 여호수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가라”(수 3:6). 제사장들이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간다. 그리고 요단 물 가에 이르러서 거기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말씀을 선포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족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수 3:10)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앞두고, 그리고 정복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정복전쟁이라는 용어가 많이 폭력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용어가 절대 아니다.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의롭지 못한 세상 질서를 몰아내는, 구원행위에 대한 강력한 비유적 용어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라합의 해방일지’를 통해서 보았다.

 

3.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다. 그래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기 좋게 바닥이 드러났다. 물이 끊겨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갔다. 여기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역할을 주목해 보자.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다.[1] 이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스도인은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다.

 

4. 그리스도인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메고 있는 것은 언약궤,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은혜와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언약궤를 메고 제일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는 마인트셋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신명기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편에서 먼저 땅을 분배 받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가 정복전쟁을 할 때 선봉에 서서 모든 이스라엘이 약속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으로 산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인류를 위한 봉사와 섬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는 솔선수범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입으면 저절로 되는 일이다. 히브리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봉사와 섬김, 즉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이 험한 세상에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희망이다.

 

6. 마이드셋의 변화

요단강 도하 사건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그리고 입성하면서 이스라엘의 마인드셋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의 마인드와 광야에서 40년 유리할 때의 마인드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의 마인드는 애굽에서 살 때와 광야에서 살 때의 마인드와 같을 수 없다. 우리도 그렇다. 팬데믹 이전의 마인드와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는 같지 않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 이후를 살면서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로 살 수 없다. 무엇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호수아의 말씀처럼,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마인드로 우리는 전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지역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요단강을 건너가자!



[1]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신앙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이스라엘이지만,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보편성을 성취해야 할 개별적인 나라에 불과하다. 보편성의 개념과 개별성의 개념을 혼동하면 안된다. 더불어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 둘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잘 가려서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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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18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수아 1:1-9)

 

1. 구약성경의 중요성

신약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깊이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깊이는 같이 간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예수와 같다. 조슈아!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구원자/해방자)이다. 구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원 받아 죽은 후에 천국간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구원이 아닌 게 없다. 궁극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상태가 구원의 가장 근본이다. 그래서 구원은 어떤 여정으로 표현된다. 그것을 구약에서 배운다.

 

2. 모세의 시대가 가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오다

이스라엘은 지금 위기를 맞았다. 모세가 더 이상 본인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맞닥뜨린 상황과 같다. 예수님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위기를 겪었듯이, 이스라엘도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다. 언제든지 변화의 시기는 위기와 기대가 공존하는 법이다.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을 이끌던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 자리에 서게 되었다.

 

3. 여호수아는 누구인가

여호수아를 소개하는 구절을 보면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소개하는 것을 본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렸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불린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 여기서 ‘종’은 사회적 계급을 지칭한다.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계급이 존재했을 때, 양반과 대비되는 천민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가 ‘종’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종’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호칭은 매우 영광스러운 호칭이다. 신분계급을 나타내는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mediator)을 감당하는 사람을 ‘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직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러니, 여호수아 자신도 ‘내가 과연 모세의 뒤를 이어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자기불안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가 자신들을 잘 이끌어 가나안 땅에 들일 수 있을까 의심도 있었다. 이러한 자기불안(자기확신의 부재)와 의심은 위기를 불러오기 충분했다.

 

4. 교회 처음 부임하던 때의 회상

회상해 보면, 내가 우리교회 부임하여 처음 나눈 말씀이 여호수아의 말씀이다. 교회에 부임하여 첫 설교한 것이 토요일 새벽기도였는데, 그때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여호수아의 말씀을 나눴다.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의미에서 여호수아의 말씀을 나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나누는 여호수아의 말씀은 늘 힘이 된다.

 

그 당시(2016년 9월) 일기를 보면, 이런 일화도 있다. 김성래 목사 딸 세린이(루시)가 꿈을 꿨는데, 우리가 큰 교회 지어서 이사 들어갔다는 꿈이었다. 그걸 그때 아이가 꿈을 꿨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주어서, 그때, 김성래 목사가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그런 기록이 있다. 그 꿈이 이제 이루어지나? 비록 우리가 지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이 때에, 그런 꿈의 이야기나, 특별히 여호수아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려주는 것 같다.

 

5. 전환점의 중요성

인간에게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으면 불안과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이스라엘을 보라.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음에도 출애굽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 한 뒤에도 광야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 이들의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을 살다 보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별히, 루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아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요단강 동편에 자리 잡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리고 대화가 필요하다. 겸사겸사 심방을 시작했다. 긴밀한 비전 나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마음으로 비전을 공유하고 그것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6. 우리교회의 위기와 비전

지난 몇 년 간의 목회를 돌아보면,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출애굽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팬데믹을 맞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활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새롭게 출발하고, 새로운 미니스트리를 열어가려고 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자연재해에 가로 막혀 그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광야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좀 더 명확하게 다듬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새로운 교회로 장소를 옮겨 그곳 교회와 Partnership Ministry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시절을 지혜롭게 넘기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고 은혜이다. 각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살려서, 교회의 사역을 극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맨파워, 아이디어, 열정이 있다. 우리가 늘 아쉬워하고 갈망했던 것은 좀 더 편안한 시설과 좀 더 보편적인 예배 시간이었다. 그리고 좀 더 긴밀하게(close) 협력할 수 있는 generous한 host 교회를 만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소망과 잘 어울리는 교회를 잘 찾은 거 같다. 이것을 위해 온 교회가 아주 오랫동안 기도해 왔다.

 

7. 강하고 담대하라

변화(Transition)을 마주하면 두려운 법이다. 요즘 사람들이 매일 두려움 가운데 사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고, 이제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전쟁을 앞두고, 엄청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을 다잡고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모세와 함께 했던 내가 여호수아와도 함께 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꼭 필요한 말씀이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8. 모세의 수종자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여호수아는 처음에 ‘모세의 수종자’로 불렸다. 그런데, 가나안 입성이라는 사명을 잘 수행한 뒤에, 여호수아는 더 이상 ‘모세의 수종자’로 불리지 않고,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으로 불린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수 24:29). 여호수아를 처음 소개할 때의 문구와 비교해 보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향해서 함께 힘을 합하여 나아갈 때, 우리 교회 뿐 아니라, 감람산교회, 그리고 우리들의 각자 삶 속에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믿음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우리의 비전을 이루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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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0. 24. 13:11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민수기 1:1-19)

 

1.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BC 587년 유다가 망하고, 헬라화가 되었을 때, BC 300년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70인역(셉튜아진트)’로 불린다. 신약 성경 시대는 여전히 헬라 시대였으므로, 신약 성경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AD 382경부터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불가타라 부른다.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 때,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영향으로 각자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길을 열었다. 아무튼, 성경은 크게,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의 영향 아래서 번역되고 발전되었다

 

2. 성경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셉튜아진트)가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신약 시대 때 성경은 ‘70인역’이었다. 사도 바울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의 편지들을 썼다. 70인역(헬라어 성경)에서 민수기를 ‘숫자들(아리테모이)’라고 번역했다. 70인역의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어 성경도 ‘민수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에서 민수기는 ‘베미드마’, 즉 ‘광야에서’이다.

 

3. 민수기를 헬라어로 ‘숫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민수기에 두 번에 걸친 인구 조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36장까지 있는데, 1장과 26장에 인구 조사 이야기나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 조사(Census)를 하는 이유는 병역과 조세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서서히 국가의 요소를 갖추어 갔다는 뜻이다. 인구 조사했더니, 장정(20세 이상/싸움에 나가서 싸울만한 남자)만 60만명 정도 되었다. 정확하게는 1차 조사 때 603,550명, 대략 40년 후에 시행된 2차 조사 때 601,730명이 계수되었다.

 

4. 민수기는 대략 40년 정도의 시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1차 조사는 출애굽 후 13개월 후에, 2차 조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시행된다 민수기를 이해하려면, 인수 조사를 기준으로 보는 것보다, 지명을 중심으로 보는 게 좋다. 민수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가데스 바네아’를 꼭 기억해야 한다. 민수기는 크게 세 지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내산 – 가데스 바네아 – 모압 평지.

 

5. 시내산에서 발생한 일은 성막(어디에서 제사를 드리나), 제사법(제사법(어떻게 제사를 드리나), 제사장(누가 중재하나), 정결법(누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나), 절기법(언제 제사를 드리나), 인구조사, 진영 갖춤 드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발생한 일은 정탐꾼 사건과 이스라엘의 반역이다. 이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보내게 되고, 출애굽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모두 광야에서 죽는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죽는다. 모압 평지에서 제2차 인구조사(출애굽 2세대)가 시행되고,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 설교의 구체적인 기록이 민수기 다음에 나오는 신명기이다.

 

6. 민수기는 ‘숫자들’이라는 관점보다, ‘광야에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성사적 존재/sacramental being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세속적 존재/non-God being/secular이다. 세속 사회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종교)와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다. 세속화는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현대)의 특징은 신을 사회 활동에 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사적 존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사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란 하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필수적인 곳이다.

 

7. 광야는 온갖 소리(소음)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데 있어 특징/속성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세미하게 들려온다. 광야 같은 고요와 침묵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엘리야 선지자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왁자지껄한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며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는 궁극적 소통의 자리이다.  

 

8. 현대인들이 가장 애 먹는 일은 소통이다. 현대인들은 ‘말이 안 통한다’고 호소한다.
소통에는 상업적 판매 기술로서의 소통과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이 있는데, 특별히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의 부재는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한다. 도시는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곳이다. 각종 기계음, 각종 언론 보도, 엔터테인먼트, 일자리 등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들만 있다. 무엇보다 도시의 삶은 내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먹히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언어 표현이 유혹적이거나 폭력적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은 주체적이기 힘들고, 늘 누군가/무언가의 지배 아래 있다.

 

9. 도시인들을 보라. 주체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불필요한 소비와 불필요한 말을 하면서 산다.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보라. 소유를 보라. 우리는 정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보다, 온갖 유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포장된 광고들에 의해서 물건을 구매하기 일쑤다. 게다가 도시인들은 바쁘게 살다 보니,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감정)에 귀기울여주거나,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나누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세상)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된다.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함, 감정의 나눔 부재, 무관심은 관계의 상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관계의 붕괴까지도 가져온다.

 

10. 현대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이다. 물리적으로 광야 같은 환경 만들면 좋으나, 실제로 조용한 데를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진짜 광야 같은 시골 같은 곳을 자주 찾는 것도 어렵다. 시간과 비용 문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삶 가운데서 광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묘연하다.

 

11. 다음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의 방법들이다. 다음에 제시된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소통도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눈을 감고 심호흡 자주 하기

2) 모든 기기를 멀리하기 (스마트폰/TV)

3) 책 읽기 / 시 읽기 / 성경 읽기 (침묵과 집중이 저절로 된다)

4) 기도 시간 갖기 (기도문 읽기)

5) 상대방에게 귀기울이기 (공감)

6) 교회를 광야처럼 오기 (광야 나오는 행위)

 

12. 현대 도시인들은 숨을 잘 쉬지 않고 산다. 바쁘다 보니 숨쉬는 것도 잘 못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자주 하는 일은 가장 손쉽게 광야로 가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의 정신을 가장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시각적으로 습득하는 정보는 흥미를 유발시키고 뭔가 강력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자극적인 영상으로 획득된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의 뇌를 조정한다. 그것들은 반성적/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막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기기를 통해서 습득하는 정보보다, 책으로 습득하는 정보들이 삶을 더 깊게 만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13. 현대인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업계는 만년 불황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하여 책을 읽을 기회는 더 줄어든 것 같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특별히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위한 방법으로 내가 가장 추천하는 독서는 ‘시 읽기’이다. 시 언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시가 제시하는 세계에 갔다오는 것은 마치 광야에 다녀오는 것과 같다. 시 읽기는 현실에 파묻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14. 현대인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이것을 특별히 방해하는 것은 도시의 소음과 스마트폰이다.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느라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만나도 만난 게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습관처럼 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 오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을 ‘광야에 나오는 행위’로 인식하면 큰 유익이 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특별한 것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교회를 광야로 생각할 때 그곳은 하나님의 음성이 더 명확히 들리는 자리가 되고, 하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으면 살아갈 없는 인간의 운명을 더욱더 절실히 경험하는 자리이다.

 

15. 유대교 랍비 조너선 색스는 “믿음은 소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 저명한 랍비가 정의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삶을 사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파묻혀 소음 아래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짜증나기만 하고,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16. 시편 1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마다 그것들은 말씀을 쏟아내고

밤마다 그것들은 지식을 전해 준다.

이야기도 없고 말소리도 없다.

그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것들의 음악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17. 우리는 도시의 소음 파묻혀, 온갖 만물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외로움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도시에 광야처럼 사는 데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자주 물으라. 생각과 감정에 동감해주고, 위로해 주라.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있고, 당신과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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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19. 10:1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레위기 1:1-2, 8:1-13)

 

1.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향 평준화한다. 성경에는 인간을 아주 존귀한 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기독교 신앙은 ‘신화’(Theosis/하나님처럼 되는 것)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이러한 특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품위 있게,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레위기 8장은 제사장의 임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임직식 거행은 7일간 지속되었다. 왜 7일간 거행되었을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관 속에서 제사장의 임직식을 생각해 보면, 제사장 되는 일은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냥 보통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받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창조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에 쉰 것을 포함한 과정), 하나님은 7일 동안 제사장을 ‘창조’한다.

 

3. 창조는 만듦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성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는 지음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조는 내가 단순히 피조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창조는 부르심이다.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제사장 직분을 부여하시는 것은 제사장을 창조하신 일이고, 제사장을 부르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7일 간 거행되었다는 것은, 7의 숫자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사장의 완전함, 즉 거룩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세우신 제사장은 거룩하다.

 

4. 우리가 사는 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한다. 랍비 조너선 색스는 행복와 의미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주로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에 반하여 의미는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으로서 특히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짧게 표현하면, 행복은 소유과 관련되고, 의미는 기부하는 것(희생)과 관련된다.

 

5.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누구든 행복하다. 개도 고양이도 사람처럼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행복해한다. 그러나 의미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현상이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긴장하거나, 불안하거나, 염려되거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너선 색스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것이다”(매주 오경읽기 영성 강론, 178쪽).

 

6. 행복만 추구하면 인간은 삶이 천박해지거나, 자기에게만 열중하다 결국 이기적인 삶이 되기 십상이다. 행복만 추구하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한다. ‘이거 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인생을 행복의 차원에서 더 끌어 올리면 의미의 차원으로 간다. 의미의 차원에서 인생을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고통을 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행복의 차원에서만 인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7. 깊은 절망에서 생존한, 아우슈비츠 비극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지 말고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의미의 심리학을 발전시켰다.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아 그 절망을 이겨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모습 속에서 그는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8.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사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기에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종교적 인간이 분명히 비종교적 인간과 다른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과업이 아니라 사명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과업으로 경험하는 사람과 삶을 사명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을 그냥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을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만큼 일을 하겠지만,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일을 한다.

 

9. 신앙은 인생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깊은 것을 경험하게 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구약성경의 다섯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모세오경’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세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특별한 존재(사람)로 만들었는가? 그 해답은 레위기서의 이름에서 발견된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라는 뜻이다. 모세가 특별한 존재가 된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깊은 총애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특별해진다.

 

10.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위기에서 이 부르심을 보지 못하고, 그저 희생제사나 제사장에 대한 법들, 그리고 정결법 등 만을 보고 말면 손해다. 이러한 것들만 보면 레위기는 정말 재미없는 성경일 뿐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흘러내려가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집전하는 일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모세와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흘러내리고 있다.

 

1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성찰이다. 임직을 한다는 것, 직분이 생긴다는 것은 교회 일을 부담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게 아니다. (일반 회사에서 직급이 높아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부르심’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행복의 관점이 아니라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나에게는 사명이 있구나!” 이런 부르심의 경험 가운데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12. 부르심은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타고 흐르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내가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시 말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1)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고, 2)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직분을 받을 때, 이러한 신앙의 실존적 기쁨이 있어야 한다.

 

13.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면 삶이 행복해질거라고 한다. 물론 이 말도 틀리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거나 절망할 때도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인생의 깊이로 들어간다.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의미의 세계로 더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고, 사명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14.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더 존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를 것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렇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이다. 이것을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흘려보내는 신앙인이 직분자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직분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내리도록 나를 내어주는 존귀한 자, 존귀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직분자들은 그것을 더 큰 기쁨 가운데 누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부르심’을 통해 삶이 더 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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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5. 02:58

브살렐과 오홀리압

(출애굽기 35:30-36:7)

 

1. 미국에 유학 와서 수업을 듣는데, 첫 수업에는 언제나 서로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냥 한국 이름 Junsik Chang을 말했는데, 교수를 포함해 거의 모든 학우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편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그냥 속 편했다. 그런데 나는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영어 이름을 하나 지어 교수와 학우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Jeremy이다(2004년).

 

2. Jeremy는 성경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Jeremiah는 Jeremy 또는Jerry로 줄여 부른다. 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도 마음에 들었고, 망해가는 조국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동분서주하며 마음 아파하고, 핍박 받고, 결국 슬픈 마음을 안고 죽어간 모습도, 모두 마음에 남았다. 이것은 내가 한국인으로서 겪은 역사의식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국문과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는데, 한국의 현대문학은 일제시대 때 꽃피웠다. 한국의 문학 속에는, 그리고 한국의 문인들 마음에는 예레미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레미야의 이름의 뜻이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신 자!

 

3. 성경을 읽으면서 참 좋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대할 때이다. 성경의 이름은 대개 신앙고백이다. 한국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지만, 성경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연관된 이름 짓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 뜻이 광범위하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의 이름은 하나님 경험이 담긴 것이 대부분이다. 다른 말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라는 뜻이다.

 

3. 브살렐은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브살렐은 아주 유명한 가문 출신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를 보면, 브살렐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이다. 훌이 누군가? 시내산 도착 전 르비딤에 머물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시에 쳐들어온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벌일 때 모세와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 아론과 더불어 모세의 피곤한 팔을 붙들어 올린 인물이다. 모세와 아주 가까이서 동행했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던 인물이다. 브살렐은 바로 그 유명한 ‘아론과 훌의,’ 그 훌의 손자이다.

 

4. 오홀리압은 ‘아버지는 나의 장막이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오홀리압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도 하나님 경험이 특별했던 것 같다. 장막은 보호해주고 안식을 주는 곳인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 그러니, 오홀리압이 성막(하나님의 장막)을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5.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대할 때, 그 이름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은 그들만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이름을 보면, 야곱의 뜻은 ‘발 뒤꿈치를 붙잡은 자’이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는데, 얼마나 장자가 되고 싶었으면 형의 발 뒤꿈치를 붙들고 태어났겠는가.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그 인생의 애환이 그대로 들어가 있고, 펼쳐질 삶의 파노라마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겨루어 이긴 뒤, 야곱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으로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이다. 결국, 야곱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

 

5.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의 뜻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고, 내가 얼마나 인생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인생의 일기예보와 같다. 이름은 그냥 그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름은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고, 무엇보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폭풍우를 만났을 때 나를 붙들어 주는 닻과 같다.

 

6. 요나를 보라. 요나의 뜻은 ‘비둘기’이다. 비둘기는 예전에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로 쓰였다. 요나는 가드헤멜 아밋대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열왕기하 14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등장한다. 예후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왕으로서 여로보암 2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쳐서 나라의 부흥을 이룬 인물이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 그런데 어떤가?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의 역할을 한다. 요나의 삶이 흔들릴 때 요나를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의 이름이다. 자신은 ‘비둘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신앙고백의 이름을 가진 자는 그 이름이 붙들어 준다.

 

7.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두 가지 가슴 벅찬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는 ‘감동’(나탄)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름이 처음 거론되는 곳은 출애굽기 31장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성막을 만들 것을 명령하시며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명하여 부르신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 충만이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부어주셨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성령’이라고 말지만, 좀 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용어를 쓰자면, ‘감동’이다.

 

8. 감동은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면서 가까이 다가서는,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같은 것을 경험해도 누구는 감동이 있고 누구는 감동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주 신비한 것이다. 감동은 그 대상을 한없이 가까운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신 것이고,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하나님을 한없이 가깝게 느낀 것이다. 이런 것이 쉐키나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는 것.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단순히 성막을 제작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성막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성막 그 자체였다.

 

9. 또 한 가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가슴 벅찬 용어가 등장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풍경을 직접 보면 이렇다.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지고 왔다”(출 36:3b). 성소의 일을 맡은 자들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는 예물을 너무나 많이 가져왔다. 그래서 모세가 이런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출 36:6). 그만 가져오라!

 

10.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새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런데,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하나님을 다시 찾던 이스라엘 벡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비로소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율법과 성막은 쉐키나이다.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눈으로 보여주는 것(세크라멘트)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가까워지셨다. 그런데,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가까이 계신 것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성막을 지을 때 쓸 재료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칠 정도로 가지고 온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1. 우리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이 무엇일까? 부흥이란 무엇일까?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 장면 아니겠는가! 나탄과 나사.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 하나님과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 성막은 이미 브살렐과 오홀리압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지어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막은 이미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지어진 성막을 꺼내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성막이 없는데, 즉,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없는데, 바깥으로, 눈으로 보이는 성막을 억지로,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만든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12.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으시다. 너의 이름을 무엇이냐? 너는 나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느냐? 나에 대한 너의 신앙고백은 무엇이냐? 너에게는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있느냐?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이 지어져 있느냐? 그런 것 없이, 그냥 바깥으로 보이는 성막에 나와 앉아 있는 것 아니냐? 나는 너와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너에게 나의 은총과 복을 충만이 부어주고 싶다. 그러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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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24. 01:29

[그 중에 제일은 겸손]

 

아마샤. 남유다 왕국의 제 9대 왕입니다. ‘여호와는 강하시다’는 뜻입니다. 아마샤는 예루살렘 출신 왕비 여호앗단의 소생입니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과거도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스가 신복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죠. 그래서 아마샤는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습니다. 물론 삼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았지만, 아마샤는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율법을 따릅니다. 그 당시 율법은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왕하 14:6). 그래서 아마샤는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만 처리할 뿐, 그의 가족들은 살려줍니다.

 

아마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은 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원수를 갚을 때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킨 것도 이러한 좋은 평가에 한몫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샤에 대한 평가에는 2% 부족한 게 있습니다. 선왕인 아버지를 좇아서 열심히 해서 모든 게 좋았는데, 그 당시 왕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인 ‘다윗 왕’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아마샤는 다윗 왕처럼 되고 싶은 욕심이 컸던 모양입니다.

 

다윗 왕처럼 되고 싶은 욕심은 아마샤 왕의 업적에서 드러납니다. 아마샤는 다윗처럼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을 물리친 것과 똑같이 에돔을 물리치고 에돔의 도시 중 하나인 셀라를 차지합니다. 그런 후에 셀라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옥드엘.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차지한 도시의 이름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다윗 왕의 업적과 대등하게 만들어, 자신을 다윗 왕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죠.

 

여기까지는 인간적으로, 또는 왕으로 그럴 만합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마샤의 다음 행보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에게 메신저를 보내 시비를 겁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왕하 14:8). 시쳇말로 ‘맞짱 뜨자’는 말입니다. 아마샤는 에돔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북이스라엘을 굴복시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윗의 반열에 올려 놓는 것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보입니다. 이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레바논 가시나무와 백향목 우화를 들어, 아마샤를 꾸짖습니다.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여졌구나”(왕하 14:10). 요아스 왕은 마사야 왕을 꾸짖으며, 괜히 화를 자초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마샤 왕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아마샤는 에돔 격파 후 실제로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다윗처럼 에돔을 격파할 때 하나님이 도우셨던 것처럼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도 자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샤는 이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과 지나친 신앙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했습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힘을 잘못 판단했던 것이죠. 결국 전쟁은 벌어졌고, 힘의 우위에 있던 북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여 성벽을 부수고, 성전과 궁전에서 보물을 약탈합니다. 아마샤는 자신을 다윗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다가, 도리어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곱게 죽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반역의 무리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마샤 이야기의 교훈은 명백합니다. 사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라는 것이죠. 겸손은 잘 돼도 우쭐대지 않는 것이고, 못 돼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늘 ‘주님’께 두고 잠잠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 잘 해도, 우리 개인의 인생, 교회의 미래, 나라의 운명은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살면서 쌓아야 하는 덕들 중에, 그 중에 제일은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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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8. 08:24

주일과 자유

(출애굽기 6:9, 16:23-30)

 

1.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최근 기사를 보면,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최근 2년 사이에 2.7세나 감소했다. (Horrifying numbers of Americans will not make it to old age/7.31.2023) 현재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6.1세다. 세계 최고의 암 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암 때문이다. 굉장히 아니러니컬한 현상인데, 암 때문에 죽는 이유는 의료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 때문이다. 암에 걸려도 돈이 없는 사람은 최고 수준의 암 치료 기술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총기사고와 교통사고가 있다. 미국인은 2022년도에만 교통사고로 43,000명 정도가 죽었다.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은 2023년도 현재까지 25,000명 정도 된다.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이 또 있다. 약물중독이다. CDC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107,000명이나 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 중의 하나로 젊은 층의 죽음이 지목됐다는 것이다. 2021년도에만 15세에서 24세의 젊은이 38,307명이 죽었다.

 

3. 이렇게 충격적인 사망이 발생하는 원인과 기대수명 감소에 대해서 이코노미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이 흥미롭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중시하는 자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더불어, 정부의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4월, 미국 청년 보수단체 ‘터닝포인트 USA’ 설립자 겸 회장 찰리 커크는 “수정헌법 2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년 총기 사망의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총기 소유에 대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한 해에 몇 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감수해야 할 사항이지, 수정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미국에서는 ‘자유’가 이념으로 작동하여 정치 싸움에 이용된다. 그래서 미국식으로 이해하는 ‘자유’의 개념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비판적으로 미국식 자유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자유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지인데, 그 자유가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인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자유 말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의 자유를 통해서 이 땅에서 왜곡되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유를 바로잡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5. 출애굽기는 우리들에게 ‘해방’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남미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된 해방신학은 성경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발전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출애굽기는 해방과 자유의 이야기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해방을 갈망하는 이유는 지금 삶이 어딘가에 억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억압되어 있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다보니, 삶이 괴롭다는 뜻이다. 행복하고 편안해야 하는데, 무엇인가에 억눌린 사람은 자유가 없어 삶이 괴롭다.

 

6.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조가 들어서는 바람에) 노예로 전락하여 괴로운 삶을 살았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우리의 삶이 이런 것 같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같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지옥을 사는 것처럼 괴롭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7. 이스라엘은 애굽의 학대에 너무 괴로워 날마다 울부짖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학대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학대’는 히브리어 ‘라하츠’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라하츠’라는 말이 나오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라하츠는 ‘괴롭힘’, ‘학대’, ‘압박’이라는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영어로는 ‘oppression’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의 하나님(God of the oppressed)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학대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학대 받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된다. 반대로, 절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학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인생에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8. 학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행동하는 학대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행동하는 학대는 ‘괴롭힘’이다. 누군가를 어려움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학대’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학대에는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다른 말로 방치라고 한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학대’를 안 하고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면, 우리는 ‘행동 안 하는 학대’를 자행하고 살 때가 많다. 내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학대 당하고 있는 존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기도 안에서 그 학대 당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드시 입을 것이다.

 

9. 학대 당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학대를 보시고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그의 종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기 6장을 보면 아주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학대 당하여 괴로운 마음을 표출하던 이스라엘이 정작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discouragement)과 가혹한 노역(cruel bondage)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 6:9).

 

10. 학대가 나쁜 이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학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는 반응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대는 몸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래서 생명의 존엄성을 형편없이 훼손시킨다.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다른 생명과 소통이 안 된다. 특별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데, 학대 당하여 존엄성을 훼손 당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11.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시 반복하여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출애굽 사건을 가장 발목 잡았던 것은 ‘걍퍅한 마음(discouraged /stubborn/hardened/heart)’이었다. 두 강퍅한 마음이 출애굽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 가졌던 강퍅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강퍅한 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내 앞에 이미 와 있다. 다만, 내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임하느냐 구원이 임하지 않느냐의 차이를 낳는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 마음을 풀라.

 

12.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걍퍅한 마음을 넘어서는)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마침내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한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 광야에서 받은 첫 번째 훈련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 사건과 엮여 있다. 만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안식일 훈련을 위함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쉼이다. 쉰다는 것은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은 곧 자유를 뜻한다.

 

13. 오랜 세월 동안 애굽에서 학대당하며 마음이 상하고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못하는 것, 그들에게 없는 개념은 ‘쉼’(sabbat)이었다. 그들에게 쉼이라는 것이 없었다. 즉,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일으키신다. 만나 사건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 즉 ‘자유’를 가르쳐 주신다.

 

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학대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은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평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됐다. 거기에는 무슨 학대가 있지 않았다.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존재할 뿐이었다. 거두어들일 때 그냥 하루치 먹을 양식만 거두어들이면 됐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느라 불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6일에는 두 배를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조금 더 하면 됐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 일곱 번째 날은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면 되었다.

 

15.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면서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되었다. 안식일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절대로 애굽에서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그 이후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했다. 자유의 삶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에서 자유를 빼앗아가는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나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라, 참 자유를 주지 않고 가짜 자유는 주는 악한 것에 몸과 마음이 빼앗겼다는 뜻이다.

 

16.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에게 ‘주일’(The Lord’s Day)로 계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을 지킨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고백은 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보다 안식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인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주일을 지킨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17. 표면상으로는 다종교의 국가이지만, 심층상으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노예 제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독교 정신 때문이다. 노예 제도가 존재할 때 미국인들의 종교성은 유난했다. 그들은 노예 제도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노예 제도를 운영했던 미국인들조차도 ‘주일을 지켰다.’ 그들은 주일을 지키면서 아주 종교적인 마음으로 주일에는 노예를 쉬게 했다. 그들이 무슨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노예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노예들은 주일에 쉬는 것을 통해서, 그 옛날, 출애굽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자유’를 배웠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노예들이 갈망하는 자유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노예 제도를 포기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했던 역사인식 방법)

 

18.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킨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준다. 절대, 절대,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주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는 내 영혼의 건강에 대한 바로미터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딘가에 속박당하여 있다는 뜻이다. 하루 빨리 그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라. 참된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주님 외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말라.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다. 주일을 지키라. 그러면 주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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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1. 04:13

영성

(출애굽기 3:1-12)

 

1. Ted Runyon. 에모리대학교 조직신학자. 2017년 5월 11일 소천하셨다. 저서 중에 <New Creation>이라고,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저술이 있다. 이 책은 산타클라라UMC 담임목사를 하셨던 김고광 목사님이 한국말로 번역했다. 나중에 개정판을 낼 때, 개정된 부분이 잘 번역됐는지, 런연 교수님이 봐달라고 하셔서 확인해 드린 적이 있다. 나는 Ted라는 이름과 인연이 깊은 듯싶다. 에모리의 Ted Runyon이 추천서를 써주시고, GTU의 Ted Peters가 나를 제자로 받아주셨다.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Ted Runyon에게서 두 개의 수업을 들었다. 하나는 실존주의철학(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성례전신학(Sacramental Theology)이었다. 런연 교수님은 늘 수업시간에 지난 주 신문의 주요 토픽을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시작했다. 인상적이었다.

 

2. 지난 주 신문의 주요 토픽은 단연, ‘폭염’(Heatwave)이다. 미국만 해도 폭염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인구가 1억 7천만명에 달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가 끝났다.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다 We've Gone Beyond Global Warming and Into Global Boiling"고 발표하기도 했다. 폭염, 또는 홍수 피해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무엇보다, 농작물의 타격이 심하다. 한국 뉴스를 보니, 상추 100그램에 2,428원이고 삼겹살 100그램에 2,555원이다. 그래서 우스갯말로, 상추에 삼겹살을 싸 먹는 게 아니라, 삼겹살에 상추를 싸 먹는 시절이 왔다고 한다. 이제 베트남 쌀국수 집에 가면, 스리라차를 보기 힘들다. 기후변화로 칠리 페퍼 제배가 안 되기 때문이다.

 

3. 이런 문제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아마도, ‘먹고사니즘’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먹고사니즘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 발생하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들’에 파묻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나와 상관없는 일 같은, 그런 일이 전혀 눈에 안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나 자신의 문제와 나의 문제다 보다 더 큰 문제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산다.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창세기의 마지막 축복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 1:7).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atmosphere)가 바뀐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를 맞이한 것과 같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니”(출 1:8).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생육하고 번성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고통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요셉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치 있던 것이 가치 없는 순간이 된 것이다.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따뜻함이 없어지고, 냉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은 이스라엘을 차갑게 대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출 1:11).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 1:14). 이렇게 엄한 노동과 괴로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급기야는 아예 산아제한을 두려고 한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라는 끔찍한 명령까지 내려진다.

 

6. 모세는 이런 난세에 태어난 인물이다. 태어나면 곧바로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애굽의 왕, 바로의 딸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모세는 왕자 대접을 받으며 성장한다. 왕궁에서 귀하게 자란 몸이지만, 태생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출애굽기 2장 11절 이하는 모세의 장성한 시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보고 의분이 일어 자기 딴에는 히브리 동족 편을 든다고 애굽 사람을 쳐죽인다. 그런데, 나중에 이 일이 탄로나서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7. 애굽에서 떠나온 모세는 이제 자기 삶에 집중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 미디안 광야에서 떠돌던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거하며, 결국 그의 일곱 딸 중 하나인 십보라와 결혼을 하여 미디안 광야에 정착해서 살게 된다. 이제 모세는 더 이상 애굽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히브리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은 삶은 산다. 그렇게 모세는 그냥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듯싶다.

 

8.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한 개인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던 모세가 자기보다 더 큰 존재, 자기보다 더 큰 문제에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영성’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또는 삶을 살아가면서 ‘영성’(spirituality)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영성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요즘 많이 유행하는 말이 이런 것이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줄여서 ‘SBNR’이라고 한다. 나는 영성을 추구하지만(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9. 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개 ‘영성’하면 뭔가 신령한 것으로만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요즘엔 영성을 ‘명상’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냥 혼자 조용한 곳에서 가서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영성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자주 듣는데도 불구하고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거나, 영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이 아주 막연해졌다.

 

10. 영성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쉬운 말도 풀어서 설명하면, 영성이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영성과 영성이 아닌 것을 잘 보여준다. 출애굽기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연결되면서 커가던 존재가 어느 새 모든 관계가 끊기고 고통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서 나보다 더 큰 존재인 부모에게 연결되면서 커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부모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아기는 부모를 통해서 ‘영성’을 배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기에게 최초의 영성이다. 인간은 처음 경험이 중요하다.

 

11. 아기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자기보다 큰 존재인 부모보다 더 큰 존재에게 접속하기 시작한다. 친구를 통해서,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그리고 학교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등등, 이제 아이는 자기의 존재를 확장해 간다. 그렇게 성장해 가던 아이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한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는데,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연결되어 가면서 성장하던 존재가 어느 때부터 더 큰 존재에로 연결되어 나가는 것이 막히고,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만 축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더 큰 존재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될 때, 인간은 고통받는다. 애굽의 이스라엘이 딱 그랬다. 고된 노동과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내몰리다 보니, 어느새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 잇대어 사는 법을 잃어버렸다.

 

12. 모세의 삶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을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면서 성장해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성장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왕궁과 애굽에서 도망쳐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듯했다. 더 이상 그에게 하나님도, 동족 이스라엘도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냥 그렇게 미디안에서 고립된 인생을 사는 듯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들었을까. 그러한 그의 삶과 마음이 그가 십보라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르솜.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alien)가 되었음이라.”

 

13. 내가 요즘 읽은 책 중에 <연결된 고통>이라는 책이 있다. 한 번 읽어보길,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이다. 한 의사(이기병)가 외국인노동자진료소에서 근무하며 환자를 돌보면서 경험한 것을 인류학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이야기니까, 기본적으로 마음 아프다. 낯선 땅에 와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인가. 그 중에서 내가 예전에 담임하던 교회의 한 교인을 생각나게 하는 일화가 눈에 띄었다. 네팔 사람인데,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로 와서 살던 사람 이야기다. 이 사람이 외국인노동자진료소에 와서 받은 진단은 ‘심부전증’이었다. 심부전증이 온 직접적인 원인은 술 때문이었다.

 

14. 그런데, 이 사람이 술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네팔은 가부장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한다.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 가장이 된 이 네팔 남성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외노자로 와서 농장 일을 시작으로, 직물 공장, 비료 공장 등지에서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는 자명하다. 원하지 않는 곳에 와서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좀 날 때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빈도와 양이 늘어갔다.

 

15. 그런데, 문제는 과음을 하고 난 다음 날 술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채 업무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공장의 오너나 주변 동료들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음주 경력이 길어지면서 결국 심부전증에 걸리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일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니까. 그래서 아픈 몸을 숨기고 가까스로 일을 해오다가 병원을 찾은 것이고, 금주 권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회사에서 해고가 된 것이다. 계약 갱신이 안 된 것이다. 술 먹는 것 때문에 회사에 근심이 되었던 터라, 계약 갱신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술을 더 먹게 되었고 결국, 그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16.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딱 이런 분이 있었다. 서울시 공무원을 지내신 분인데, 자녀 중 한 명이 지체장애자여서, 아이를 위해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분이었다. 아이는 미국에 와서 돌봄을 잘 받아 UC 샌디에고 대학에 들어갔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자녀를 위해서 미국에 오긴 왔지만, 와서 말도 잘 안통하고, 일거리도 없어서, 말 그대로, 나그네로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흘러흘러 조지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 분도 자신의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시간 날때마다 술을 마셨다. 술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마셨다. 나는 술병 난 이 분을 달래 주러 심방을 참 많이도 나녔다.

 

17. 그렇게 공사장 인부로 살아가던 이 분이 엘에이 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잘 사는 가 싶었다. 어느 날 나에게 전화가 와서, “목사님,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이제 곧 건유찬유 좋아하는 뻥튀기 사들고 조지아에 목사님 뵈러 한 번 가겠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의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반갑게 받았는데, 소식은 비통했다. “목사님, 남편이 죽었어요. 술병을 이기지 못해서, 집에서 술만 먹다가 죽었어요. 그동안 남편을 위해서 힘써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비통한 소식이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 분의 술주정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그냥 그렇게 세상을 떠나셔서, 마음이 침울했다.

 

18.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리면 결국 고통 당하면서 죽는다. 요즘 시대가 악마 같은 이유는 ‘자기’에게만 갇혀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큰 존재, 나보다 더 큰 문제에 나를 연결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요즘 시대에 가장 편만한 감정이 무엇인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영성’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없는 시대, 내가 제일 큰 존재인 시대, 즉, 나보다 더 큰 존재, 나보다 더 큰 문제에 연결되지 못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고, 내가 제일 큰 존재이다 보니, 자기 바깥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 부모도 무시하고, 선생님도 무시하고, 누구든지, 마음에 거리끼면 무시한다. ‘니가 뭔데?’

 

19. 모세가 호렙산 사건을 통해서 회복한 것은 영성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큰 존재인 줄 알고 이집트 왕자로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스럽게 살던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일로 인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해서, 결국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모세를 더 큰 존재에 연결시킨다. 그 큰 존재는 하나님이었고,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었고, 그들을 통하여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었다. 그렇게 모세는 더 큰 존재와 연결되면서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

 

20. 영성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는 것이다. 영성의 궁극은 가장 큰 존재인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것이다. 영성은 다른 말로,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나는 나 스스로 큰 존재가 아니라 바깥의 존재와 연결되면서 커가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보다 작은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존재를 만나든지, 그와 연결되면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와 야곱에게서 극명하게 배울 수 있는데, 모세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와 연결되면서 그 앞에서 신발을 벗었고, 야곱은 얍복강에서 어떤 존재(천사)와 연결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는 내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영성의 욕구가 없으면 우리는 성장하기 힘들다. 영성을 통해 성장한 사람은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존재를 대한다.

 

21.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의 문제(정치적 폭력)나 기후변화의 문제를 겪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영성의 부재 때문이다. 자기가 가장 큰 존재라고 생각을 하니, 나의 바깥 존재를 함부로 대한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들 생각해 보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나보다 큰 존재라고 생각하면, 땅에 묻혀 있는 광물이 나보다 큰 존재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모두 거기에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현재 경험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폭력의 문제나 기후변화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보다 큽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는, 영성을 회복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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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8. 05:20

이야기 상실의 시대

(출애굽기 12:21-28)

 

1. 전세계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엮여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다.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또는 어떤 논문이든,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등장하면 그것은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흐름을 타고 흐른다.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현실, 또는 어떠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2. 하루 이틀 듣는 뉴스 거리는 아니지만, 지난 주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큰 뉴스 중 하나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하나는 교사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구타를 당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가 학교에서 자살한 이야기이다. 모두 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전국의 교사들은 학교의 현실을 알아달라며 들고 일어섰고, 정치권에서는 서로 상대 진영 탓만 하는 공방이 일고 있다. 교사들 입장에서 이 문제를 묘사하면, 그야말로 ‘선생님들 수난시대’다. 이는 군사부일체의 이념 아래서 살던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심하게 충돌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3. 정치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교원단체도 크게 두 곳으로 양분되어 있다. 하나는 진보를 대표하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 1989년 설립 / 77,000명 가입 / 31%)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를 대표하는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1947년 설립 / 120,000명 가입 / 64%)이다. 전교조에서 이룬/이루고 있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것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학생인권조례와 교권(교사의 권한/권리)가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참 안타까운 게, 이는 마치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맞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을 했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것이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는 것 같은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교사들의 수난시대를 경험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아이들은 선생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막돼먹은 것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학교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학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겪고 있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질문/의문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산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인가?

 

5. 우리 외할아버지, 오지섭 목사님이 지으신 책이 여러 권 있는데,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로 한시를 지으셨는데, 시 중에 한글시로 지으신, 아주 위트 있고 아름다운 시가 있다. 그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감람산 기슭에 웃는 백합되었다가

우리 주 근심할 때 내보일까 하노라

 

6. 나는 이 시를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것은 10대 후반에 지은 시이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우리님 마음속에 웃는 추억 되었다가

우리님 그릴때만 내보일까 하노라

 

그리고, 다음 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지은 시이다. 제목은 ‘추모’이다. 내 나이 스무살에 지은 시이다.

 

달빛도 외로이 한숨만 내쉬는 이 밤

한세상 모든 시름 이곳에 모아 두고

먼저 가신 님 다시 만나 適人從父 하소서 (삼종지도: 재가종부, 적인종부, 부사종자)

 

7. 이야기란 내가 나보다 커지고 성장하는 사건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책을 통해서 할아버지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에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한 그 정체성을 점점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내가 지은 시들은 ‘나’를 키워나가면서 만들어낸 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란 나의 바깥으로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이야기란 나보다 큰 존재에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혼자서, 독립적으로, 고립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과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이야기’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창세기는 수많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족장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족장들이 각자의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자기의 정체성을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고,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하고, 야곱이 죽으면서 자녀들을 축복하는 이야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야곱의 축복에 따라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얼마나 축복 가운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족보로 시작한다.

 

9. 그런데, 오랜 세월(430년) 애굽에 살면서, 점점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뒤안길로 밀려났다. 급기야 그들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고된 노동만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니까, 삶 속에 탄식만 흘러나왔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10. 출애굽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야기를 되찾아 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 이야기를 상실하면, 죽음이 난무한다. 우리도 21세기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는다. 인간은 극도로 개인화되고, 고립된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나를 잇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비대해진다. 이런 존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폭력이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크고 유일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기 발 밑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는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우리가 목격하는 현상들이다.

 

11. 출애굽은 ‘자기’를 더 큰 존재에 잇대는 작업이다. 노동에 파묻혀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보니, 자기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며 살게 된 이스라엘은 어느새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신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자손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조상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도하도록 이끈다. 그 이야기는 모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오랜 세월 동안 사라졌던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시 꽃을 피운다. 모세가 등장한 이후, 이스라엘은 이야기로 다시 가득 찬다.

 

12. 이야기가 사라져 고통 받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야기를 회복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 모세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출애굽기 12장은 이야기가 어떻게 회복되고,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 어느 순간부터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스럽게 살면서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다시 회복해 준다.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아들딸이 여러분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이것은 야훼께 드리는 과월절(유월절) 제사라고 일러주십시오. 이집트인을 치실 때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그냥 지나가시어 우리의 집을 건져주신 야훼께 드리는 것이라고 일러주십시오”(26-27).

 

13. 모세가 행하는 일은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먼 훗날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부모와 자녀 간에 이렇게 이야기가 매개가 된다면, 부모와 자녀 세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서로의 공통된 정체성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그 정체성을 발판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나 혼자 써 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란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갈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다.

 

14. 학교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 간의 대립,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과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보겠다고, 학생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또는 교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정쟁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서는 학생과 교사의 이야기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정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자신을 연결시켜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시대이다. 즉,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이다. 자아가 고립된 시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다. 함께 즐겨야 할 볼링을 혼자서 즐기고 있는 시대이다. (로버트 퍼트넘 /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

 

15. 우리는 정말로 유례없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의 시대에는 적군과 아군이 서로를 죽이지만, 요즘 우리는 스스로 죽는 시대(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외로움과 분노를 어쩌지 못해, 상대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부모든, 선생이든, 친구든) 화를 분출하여 상대방에게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하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를 더 큰 존재, 나의 바깥의 존재에 연결시키는 일을 잘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을 먼 데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나 자신에게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경험하며, 또는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사회도, 심지어 지구도,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16.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지구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더 큰 이야기로 확장해 가는 여정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부모의 이야기를 입고, 친구, 사회, 우주, 하나님의 이야기에 편입되면서 성장해 간다. 근데 요즘은 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 우주, 사회, 친구,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탈퇴하여, 나 자신으로만 고립되어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이야기 상실의 시대다.

 

17. 가정이 평안 하려면 가정에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가정의 풍경은 어떤가? 각자 방에 들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 밥도 각자 따로 먹는다. 가장 가까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멀다. 인터넷을 통해서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 연결은 허구일 뿐이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친교/fellowship)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풍경은 어떤가? 흩어져 살다, 주일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또다시 흩어진다. 서로의 생사, 서로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예배도 같이 드리고, 밥도 같이 먹고, 사역도 같이 하고,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눈물로 흘리고 기도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연결되는 것을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기 보다,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 상실은 우리 안에 이미 깊이 와 있다.

 

18. 이렇게 이야기가 상실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예수의 이야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라도 다른 데 가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이야기를 상실하여 모두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야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더 긴밀히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자. 이야기가 우리의 삶,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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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0. 03:39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창세기 50:19-21)

 

1. 요셉은 성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요셉과 더불어서 입지전적한 일물로 다니엘이 있다. 한 명 더하면, 에스더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파란만장했던 삶에 더해, 매우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의 자리에, 에스더는 바사(페르시아)의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녀들이 이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리고 에스더처럼 아이들이 잘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이들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결을 배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요셉은 ‘꿈 꾸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별명이 그렇게 좋은 뜻으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비아냥거리면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그런 별명이 어떻게 붙여졌는지와는 별개로 요셉의 인생을 바꾸어 준 것은 바로 ‘꿈’이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세 개의 꿈이 등장한다. 하나는 요셉 자신의 꿈이고, 다른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거기서 만난 고위관리 두 사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바로의 꿈이다. 요셉 자신이 꾼 꿈은 형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그것 때문에(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의 꿈은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바로의 꿈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로 이끌어 주었다.

 

4. 심리학(Psychology), 또는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이라는 학문이 있다. 이 분야는 ‘유대인 학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 학문의 창시로 널리 알려진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해, 알프레드 아들러, 멜라니 클라인 등,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은 대부분 유대인이다. 나는 심리학이 유대인에게서 비롯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 학문을 발전시킨 것이 요셉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심리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읽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대표 저서 중 하는 <꿈의 해석>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의 정신(Soul/Mind)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5. 우리 시대에 정신분석학의 위용은 대단하다. 그만큼 프로이트의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두 개의 정신분석학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정신분석학, 다른 하나는 개의 정신분석학. 한국 예능(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두 명의 강사가 프로그램을 주름잡고 있다. 한 명은 정신과의사인 오은영 원장이고, 다른 한 명은 개조련사 강형욱 원장이다. 오은영과 강형욱은 현재 한국 사람들의 실질적인 사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저 사람이, 왜 저 강아지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갈등이 증폭하는데, 그들의 행동 뒤에는 그 행동을 이끄는 어떠한 ‘심리(정신)’이 있다는 보여줌으로써, 저 사람이나, 저 개를 이해하게 되고, 관계를 다시 회복해 나간다.

 

6. 프로이트 이후에 심리학(정신분석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아주 색다른 심리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 아론 벡, 마틴 셀리그만이 그들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유슈비츠 생존자로서 의미치료라는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아론 벡은 인지 행동치료라는 심리학을,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다. 이들이 발전시킨 심리학의 공통적인 생각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 우리가 느끼는 방법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7. 이러한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심리학자는 빅터 프랭클이다. 빅터 프랭클이 쓴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한 문장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그 막사들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마지막 빵조각을 나눠주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하나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다.

 

8.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읽어보면(한나 아렌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개돼지로 전락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 빼앗기고, 인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좀비처럼 살아간다. 몸을 씻을 곳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위에서 진술한 것 같은 위대한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자유라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보여지는 현실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이다.

 

9. 유대인들이(물론 극소수이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대 절망의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진술한, 그러한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러한 상황에 닥치면 그 이야기를 삶 속에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게 신앙이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함인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내 삶 속에서 작동하도록 우리의 삶을 이야기에 내어주는 것이다.

 

10. 요셉은 충분히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는 억울하고 기분 나쁜 일을 경험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에서 개돼지나 다름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마음 속으로, ‘내가 만약 잘 돼서 성공한다면, 나의 인생을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인간들을 절대로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거야.’라고 되새김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나의 인생은 왜 이래’, 하면서 한탄하고 한탄하면서 비뚤게 나갔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품고 살았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그가 어려운 중에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요셉이 우리의 예상을 깨고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보면, 더 명확하게 우리 마음에 요셉의 고백이 들어온다.

 

두려워들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11.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많은 이들이 ‘신앙 무용론’을 말한다. 신앙을 갖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신앙은 삶에 소용이 없는 듯,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신앙 무용론을 펼치며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인이 가장 열심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성경공부 하지 말고, 성경과 연애하라!)

 

12.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작업이다. 신앙의 깊이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이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갇힌 생각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셉의 이야기를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13. 생각은 바꾼다고 바꿔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며 산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나 고통을 주는 사람이나,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심리학(정신분석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생각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신앙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신앙은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구원은 이렇게 온다.

 

14.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창세기의 족장들 이야기를 보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이삭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야곱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일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 좋은 삶으로 전진해 나아가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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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11. 06:27

예의

(창세기 37:12-36)

 

1.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에 온지 딱 20년만이다. 살면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취득해야겠다는 갈망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런데, 살다 보니 미국 시민권이 내게로 왔다. 미국 시민권 취득을 계기로, 어떻게 하다 나는 미국에 왔으며, 이렇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 대한 좋은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초등학교/중학교 시절(1980년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변변치 못했다. 그때 TV에서는 주로 미국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미국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함께 ‘A특공대’(The A Team)도 보고, ‘전격 제트 작전’(The Knight Rider)도 보았다. 그리고 ‘V’라는 SF 드라마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미국 드라마들이다. 서부 영화도 즐겨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이름은 튜니티’였다. 나중에 미국 와서 찾아보니 이 드라마의 영어 타이틀은 ‘My name is Trinity’였다.

 

2. 아버지는 나에게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워 주셨다. 아버지는 목원대에서 신학공부를 하셨는데, 그 당시 아버지의 은사들 중 에모리대학교 출신이 몇 분 계셨다. 대학을 진학할 때쯤 아버지는 종종 미국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특별히 내가 에모리대학교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주미대사가 에모리대학교 총장 출신인 제임스 레이니였다. 이 분 이야기를 하시면서 에모리대학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모리대학교 유학을 꿈꾸웠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그것도 에모리대학교로 유학 나오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는 이렇게 미국에서 유학도 하고 자리잡고 살고 있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3.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은 이렇게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 아버지의 친절한 행동이 나의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그런 삶의 이야기가 참 궁금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친절한 행동.’ 우리는 이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예의 있게 행동하다’, 또는 ‘예의를 갖춰 행동하다’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영어로 예의는 ‘civility’이다. ‘Civil’은 시민이라는 뜻이다. 또한 ‘예의 바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Civilization은 ‘문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민이 된다. 문명인이 된다는 뜻은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 있게 행동하는 사람’, 즉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문명이란, 그런 사람들이 이룬 사회를 뜻한다.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인 사람, 문명 = 야만인/야만문명)

 

4. 창세기 37장은 네 번째 족장 요셉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참으로 비참하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문제의 발단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시작된다. 야곱은 슬하의 12명의 아들들 중 요셉을 가장 사랑했다. 야곱이 요셉을 가장 사랑한 이유는 그가 요셉을 노년에 얻었고, 또한 자기가 가장 사랑한 부인 라헬의 첫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다 보니 야곱은 네 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지만, 자신이 진짜 마음으로 사모하고 원했던 부인은 라헬이었다. 야곱이 네 명의 부인을 맞이하게 된 것은 라헬을 부인으로 얻기 위한 노력 중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일이다.

 

5.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친절했다. 야곱은 요셉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아들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그러한 마음은 요셉이 입고 다녔던 채색옷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셉의 동생 베냐민은 너무 어린 아이라 제외하고, 요셉의 형 10명은 채색옷을 입지 못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는 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낳았다. 요셉 이야기의 발단은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해서 발견된다. 사랑과 미움. 사랑의 마음도 강렬하고, 미움의 마음도 강렬하다. 이 두 마음이 아주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6.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은 양 떼를 몰고 집을 멀리 떠나 양 떼를 먹이러 갔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 안부를 전하고 그들에게서 안부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요셉이 자신들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본 형들은 미움의 마음을 표출할 기회를 얻는다. 미움의 끝은 죽음(폭력)이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때 형제들을 반기를 들고 나온 형제가 있었다. 르우벤이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다. 르우벤이 왜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에 반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르우벤의 친절한 행동은 요셉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르우벤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대지 않고 살려 둔 틈을 타서, 자신이 다른 형제들 몰래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7. 르우벤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이스마엘(에돔) 무역상이 애굽으로 장사를 하러 가던 것이 형제들 눈에 들어왔다. 이때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서,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일까지는 하지 말고, 요셉을 그 무역상들에게 노예로 팔아 애굽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은 유다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 사실을 몰랐던 르우벤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요셉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르우벤은 당황하여 옷을 찢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장자로서, 아버지 야곱에게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에게 발생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들은 사실은 숨기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갔고,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은 줄 알고, 심히 슬퍼했다. 정말 마음 아픈 장면이다.

 

8.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것이 야곱의 가정 불화를 통해서 발생할 거라는 것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절하지 않은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의 행동이다. 나의 행동은 어떠한가.

 

9. 성경에 보면, 누군가의 예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다윗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의 왕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덕분이었다. 요나단의 예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다윗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다. 이러한 예의, 친절한 행동은 다윗에게 전달이 되고, 다윗은 요나단처럼 친절한 행동을 이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뒤 다윗은 요나단의 후사를 돌본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거두어 재산을 물려주고 왕자들과 똑 같은 대접을 한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었다. 패망한 왕가의 자손이고 장애를 가진 자로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 죽을 운명에 처해있었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인생이 바뀐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뜻한 이야기)

 

10. 우리는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동양적인 사고를 한다.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공자와 맹자를 떠올린다. 그래서 예의라는 말을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웬 ‘예의’? 공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성경에서의 예의는 공자님과 맹자님이 말씀하신 것과 결이 좀 다르다. 성경에서 예의는 헤세드를 뜻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신다. 즉, 친절한 행동을 하신다. 하나님의 친절한 행동이 우리를 살린다. 그리스도인이 예의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고 증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행동은 무겁고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이 친절한 행동, 즉, 구원을 가져오는 행동이 되게 끔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은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행동에만 머물면 안 된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행동이 되도록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행동이어야 한다. 행동 하나 하나에 믿음을 담아서 하는 행동, 행동 하나 하나에 기도를 담아서 하는 행동, 그것을 ‘예의’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친절한 행동이고, 하나님의 헤세드가 역사하는 구원의 행동이다.

 

12.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미국의 문명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문명(civilization)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 가치는 헤세드, ‘예의’에 담겨 있다. 친절한 행동. 구원하는 행동. 생명을 살리는 행동.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행동.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구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13.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자. 지금 나의 행동은 친절한 행동인가. 헤세드인가. 예의인가. 나의 행동이 친절한 행동으로서,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있는가. 순간순간 행동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고, 그 행동에 믿음을 담아서, 그 행동에 기도를 담아서 행동하라. 나의 행동이 예의가 되게 하라. 친절한 행동을 하라. 구원이 샘솟는 헤세드의 행동이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누리는 권세이자 행복이다. “예의 있게 행동합시다!” “친절한 행동을 합시다!” 예의를 통해서 우리 모두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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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11. 06:16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창세기 28:10-19)

 

1. 구약의 족장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네 명의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신앙을 형성해 나간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냥 삶의 여정인 것 같다. 내가 무슨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안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신앙을 곧바로 생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행과 같다. 생명의 여행. 또는 생명으로의 여행.

 

2. 족장 중에 야곱이라는 인물을 만나면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거짓말로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나는 것을 보면 야곱은 그렇게 의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영웅다운 면모도 없다. 그런데 왜 야곱은 당당히 족장의 반열에 들어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으며, 무엇이 그를 신앙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을까? 우리는 족장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3. 야곱은 위기를 자초한 듯싶다. 아버지를 속여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 때문에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했다. 아버지 이삭은 죽을 날이 가까워 형 에서의 살의를 막아줄 힘이 없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 칠 수밖에 없었다. 야곱은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 땅을 향해 무조건 길을 나섰다. 그에게는 오직 목숨을 건져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야곱은 도망쳤다. 그리고,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깜깜한 밤에 ‘한 곳에 이르렀다’.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4. 그런데 거기서 야곱은 놀라운 경험을 한다. 지친 몸을 바닥에 누이고 잠이 들었는데, 엄청난 꿈을 꾼다. 성경은 그 꿈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히브리어 ‘베히네이’를 네 번 사용하여 표현한다. 보라!’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보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5. 우리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어떤 긴장을 조성한다. 야곱은 ‘한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한 곳은 히브리어 ‘하마콤’인데, 바로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우연히, 뜻밖에 만나게 될 것을 넌지시 지시하고 있다.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들은 야곱의 이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가, ‘하마콤’이라는 용어에 이르러서, 긴장할 것이다. ‘와, 이제 곧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겠구나.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숨죽여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갈 것이다.

 

6. 야곱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을 ‘좋은 신앙’으로 안내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정말 우연히, 뜻밖에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위급한 상황은 하나님과의 우연한 조우를 더욱더 부각시켜 준다. 야곱은 집에서 멀리 떠나 혼자 위험에 처한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은 어두운 밤 중에 있는 사람이었다. 생명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던져진 사람이었다. 희망보다 절망이 컸고,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던 사람이다.

 

7. 지난 몇 주 사이에 보았던 신문 기사 중 마음에 남는 기사가 하나 있다. 가수 최성봉의 죽음이다. 2011년 코리아갓텔런트를 통해서 혜성처럼 등장한 최성봉이 최근 자살하여 죽었다. 3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았던 최성봉은 어느날 우연히 성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때로는 귀동냥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호의로 성악을 배웠다. 그리고, 코리아갓텔런트에 출연하여 심사위운들을 놀래키고, 그 이후 인생에 꽃이 피는 듯했다. 그러다, 몇 년 전 거짓 투병 사건이 탄로나 대중의 뭇매를 맞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지난 달(6월) 20일, SNS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여 죽었다.

 

8. 최성봉의 죽음에 대한 후속 기사를 보면,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는 가족이 없어서 무연자 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례식도 제때 못 치루고 있다는 기사였다. 최성봉의 죽음과 야곱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어두운 밤에 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어두운 밤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두운 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은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자신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 불현듯 놓이게 될 수 있다.

 

9. 나는 최성봉의 죽음을 기사로 접하며 다시 한 번 ‘친구 되어 주기’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았다. ‘사람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겠구나’하는 다짐을 했다. 너무 나의 일, 나의 고민에만 파묻혀,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어둠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어두운 밤을 맞이하거든 당황하지 말고, 야곱 이야기를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어두운 밤은 우연히, 뜻밖에, 준비를 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 내가 오늘 최성봉의 이야기와 야곱의 이야기를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장례조차 치르고 있는 그를 위로하고 싶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그리고, 좀 더 마음을 열고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라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쉽지 않고,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오는 친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 어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어둠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의외로 평소에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서로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11. 무엇보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 야곱이라는 족장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신앙이란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있던 야곱은 가장 중요한 것을 경험했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장소, 전혀 기대하지 못한 시간,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우리가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나눌 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려고 마음을 활짝 열 때,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12. 무엇보다 사는 게 힘든 이들이 많은 이 때에, 즉 누군가의 사랑이 그리워 몸부림 치는 사람이 많은 이때에, 우리는 더욱더 누군가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어줄 필요가 있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에서 독일 군인들이 병자들만 남기고 도망친 후, 열흘 동안 추위 속에 아무 식량도 없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프리모 레비가 동료에게서 빵 한 조각을 받아 나누어 먹은 장면을 기억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 “처음으로 죄수에서 인간이 되었다.” 어두운 밤에 있는 중에는 아무리 조그만 사랑의 나눔도 생명을 보듬고 살릴 수 있다.

 

13.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가 나눌 이 빵과 포도주도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오늘 간증도, 오늘 찬양도, 모두 이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고, 혹시 내가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다면, 바로 그 어둠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 어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빛으로 나아오길 빈다. God is here. I am your friend. Don’t worry. Be strong.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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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26. 09:38

이삭처럼 사랑하기

(창세기 25:19-28)

 

1. 창세기는 족장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크게 네 명의 족장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 족장들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뭘까? ‘파란만장’이 아닐까,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표현해 주는 대표적인 말은 야곱이 요셉의 배려로 애굽 땅에 도착하여 애굽의 바로(파라오)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 나타난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difficult/hard)을 보내었나이다”(창 47:8-9).

 

2. ‘파란만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족장들의 삶을 평가해 볼 때, 어느 족장도 파란만장 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은 족장은 없다. 그래도 순위를 매겨 보라고 하면, 요셉이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 다음이 야곱이고, 세 번째가 아브라함이고, 마지막으로 이삭이 위치하는 것 같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의 삶을 보면 다른 족장들에 비해 평탄한 데가 있다. 이삭의 죽음을 기록한 부분을 보아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8-29).

 

3. 이삭은 다른 족장들에 비해 튀는 데가 없다. 그의 성품은 온유하고, 우직하다. 나는 이런 성품이 마음에 들어 나의 둘째 아들에게 ‘이삭’(Isaac)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국어 이름은 ‘찬유’. ‘찬’자는 빛날 ‘찬’자인데, 원래는 ‘불 화 변’을 쓰는 빛날 ‘찬’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불화 변 대신 ‘구슬 옥 변’을 쓰는 ‘찬’ 자를 선택했다. 불 같은 온유가 아니라 옥 같은 온유를 이삭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구슬처럼 은은하고 수수하게 빛나는 온유함을 지닌 사람, 이삭이 그렇다. 그래서 그러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이삭/찬유’라고 지어주었다.

 

4. 그러나 나는 창세기의 이삭 이야기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삭이 끝까지 에서를 사랑하고 에서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려는 시도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장자권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가야 하는 것인데, 왜 이삭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축복하면서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축복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삭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쌍둥이 아들, 에서와 이삭의 출산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25장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다툼이 너무 심해서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이 상황을 하나님께 묻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5.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어떻게든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죽을 때 야곱을 불러 축복을 하고, 그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도록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삭의 이야기를 보면, 이삭은 결코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삭은 한결같이 생물학적 장자 에서를 가장 사랑했고, 마지막 축복을 해줄 때도 야곱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에서에게만 축복해 주기를 원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6. 창세기 25장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고, 이제 이삭이 혼자의 힘으로 가족들을 건사하며 인생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25장에는 세 개의 족보가 나온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에게서 낳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의 족보이다. 이스마엘은 다른 족보를 가진 다른 민족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 번째 족보는 이삭의 족보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족보를 잇는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1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형 이스마엘은 137세에 세상을 떠난다. 이스마엘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만, 이삭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7. 부모가 죽고 나면, 자신 만의 삶의 원리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이삭의 삶의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 산 제물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이다.

 

8. 이스마엘 사건은 어린 이삭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른들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창 21:9-10).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다른 형(그런 개념이 없었을 것)을 내쫓는다. 이 일로 이스마엘과 하갈은 광야에서 거의 죽을 뻔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아니었으면, 아브라함에게 내쫓긴 이스마엘과 하갈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 후에, 이삭에게 또다른 시련이 닥친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자고 하더니, 그곳에서 자신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삭에게 정말 평생의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9.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진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하는가?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인다.

 

10.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삭을 ‘믿음이라는 잣대로’ 판단하기 쉽다. 언약을 내팽개친 이삭을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삭은 언약을 내팽개치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장남 에서를 사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처럼 족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삭의 ‘믿음 없음’에 실망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언약을 어기고, 끝까지 에서를 감싸고 도는 이삭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약을 마음에 두고 야곱을 사랑한 엄마 리브가보다 이삭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11. 나는 유대인 랍비가 쓴 책을 보다가, 이러한 고민을 한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뻤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민이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때 기쁘다. 유대인 랍비들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해석을 내놓았다. 성경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삭이 마지막으로 에서에게 축복했을 때, 자신의 축복을 받은 아들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삭은 분노를 표출한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창 27:33). 그리고 에서는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향해 살기를 품는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12. 이삭은 왜 그토록 에서를 사랑했을까? 어떤 사람은 에서가 “날랜 사냥꾼”이었다는 말로부터 에서가 덫을 놓아 이삭을 속였다고 말한다. 에서는 실제보다 훨씬 경건하고 종교적인 척, 하나님을 잘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에게 속아 에서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이다.

 

13.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이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다.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았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다.

 

14.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이다. 이삭의 경험은 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이다. 이삭은 아버지와 ‘단절’을 경험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다. 야곱은 하란 땅으로 떠나는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는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야곱과 요셉은 다행히도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다.

 

15.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 이야기를 보면, 에서가 그렇게 훌륭한 아들은 아니다. 아버지 이삭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준 것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이었다. 특별히 결혼 일로 에서는 부모의 속을 정말 많이 썩였다. 그러나, 이삭은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끝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

 

16.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한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한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한다. 사랑은 구원이다.

 

17.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믿음의 조상 반열에 당당히 들어선 이삭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교훈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거 하나 만으로도 다른 족장들이 보여주는 삶의 교훈보다 더 크고 값지다. 사랑은 결단이다. 밖에서 오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능동적 감정이다. 주변여건사정을 판단해서 사랑을 줄만 하면 사랑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주지 않는 수동적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사랑은 결단이다. 주변여건사정에 상관없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이삭은 그렇게 에서를 사랑했다. 언약을 신경 쓰지 않았고, 에서의 행동에 실망해서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기로 결단했다. 그것이 이삭이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었고, 에서를 구원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도 이삭처럼 사랑하면 좋겠다. 자식을, 가정을, 교회를,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면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 사랑이 나와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사랑은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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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20. 05:51

미래를 여는 신앙

(창세기 23:1-11)

 

 1. 성경을 읽다보면, 삶의 추억을 되새겨 주는 본문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창세기 23장의 이야기가 딱 그렇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죽은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서 매장지를 가나안 땅의 원주민 헷족속에게서 구입하는 이야기다. 127세에 세상을 떠난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땅을 산다. 그곳에 굴이 있었다. 막벨라 굴. 아브라함은 이곳에 죽은 아내 사라를 묻는다.

 

2.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이 구절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서 ‘막벨라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교회 건축 프로젝트였다. 아브라함이 낯선 가나안 땅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얻는 땅이 막벨라였다. 그처럼, 우리도 땅을 구입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우자는 의견을 모아, 교회 건축 프로젝트의 이름을 ‘막벨라 프로젝트’로 정하여 진행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년만에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추억이 아득하다.

 

3.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살 어렸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가족이 하란을 떠날 때 사라는 65세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지시하시고, 그곳에서 ‘땅과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나안에 아브라함을 위한 땅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고, 사라의 태가 활짝 열려 있어서 자식을 금방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땅과 자손의 약속이 성취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자식의 약속이 먼저 성취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나이는 100세이다. 그러니까, 자식의 약속을 받은 뒤 25년 후에 약속의 성취가 이뤄진다.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더 오래 걸렸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까,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고, 하란을 떠날 당시의 나이는 75세였으므로,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6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5.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income mobility across generations(세대 간 부의 이동)’ 통계를 2018년도에 발표했다. 나라마다 저소득층(하위 10%)이 중산층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OECD 국가의 평균은 4.5세대이고,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국가는 덴마크로 2세대 만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장 느리게 이동하는 국가는 콜롬비아로 11세대가 걸린다. 한국은 5세대가 걸린다는 통계가 나왔다. 가난은 대물림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6.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 쉽지 않다.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 부푼 꿈을 안고 가나안 땅에 왔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 오자마자 기근이 닥쳐 애굽으로 몸을 피해야 했고, 그곳에서 하마터면 아내 사라를 잃을 뻔했다. 조카 롯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약속 문제로 가정불화를 겪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자식이 하도 들어서지 않으니까, 아내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어 보려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 일로 가정이 깨질 뻔했다.

 

7.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 인생의 클라이맥스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는 이 사건을 아주 세밀하게 다루기도 한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로, 문자의 형태로 이삭 사건을 접해서 그렇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사건이 실제 내 삶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재구성을 해보면, 가족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가져다줄 만한 엄청난 사건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의 성취로 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도 이해가 안 가고, 바치라고 했다고 아들을 바치는 아버지도 이해가 안 가는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기에 충분한 사건이고, 이삭과 아내 사라는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8. 그리고 얼마 후, 아브라함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은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 가족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삭은 엄마의 죽음 때문에 방황했다. 나중에 나오지만, 이삭이 방황을 멈추게 된 것은 아내 리브가를 얻으면서였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 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 남편 아브라함의 슬픔은 창세기 23장에 이렇게 표출되어 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창 23:2). 아브라함 가족은 트라우마와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다. 아브라함의 삶은 쉽지 않았다.

 

9. 아브라함의 녹록지 않은 인생 여정은 아내 사라가 죽은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내가 죽었다. 그런데 아내를 묻을 땅이 없었다. 땅에 대한 약속을 일곱 번이나 받았는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묻을 땅이 없었다. 이게, 보통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땅에 대한 약속을 일곱 번이나 해주셨는데, 결국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아내를 묻을 땅 한 켠조차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신세 한 탄 하면서 골방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며 하나님을 욕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만한 상황이다.

 

10.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자기의 인생을 후퇴시키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2-4).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사건을 통해서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묻을 땅을 사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엄마를 잃고 슬퍼하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는 일이었다.

 

11.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참혹한 일로 기록된,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 사건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물 겹다. 홀로코스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들을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제의적 용어를 고유명사로 변경하여, 현재 인류 역사는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대한 연구를 실행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그러한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트라우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였다.

 

12. 그 중에,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인한 배우자들에게도, 또한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했다. 그들은 그곳의 언어와 관습을 새로 배웠다. 직업을 찾았고, 경력을 쌓았다.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았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미래를 건설했다”(조너선 색스, <매주 오경읽기 강론>, 57-58쪽).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갔던 사람들에서 보이는 이러한 행동 유형은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강조되는 것들이다.

 

13. 바벨론 포로기 시절,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경험하며 민족적 트라우마에 걸려서 방황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 깊은 집단 트라우마의 늪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 위대한 선지자들의 처방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행한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곳(바벨론)에서 번성하라는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4-6).

 

14.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생명력을 소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명력을 소멸시키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마다 구체적인 경험은 다르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생명력을 소멸시키는 일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때, 우리에게 신앙은 어떠한 의미인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의 아버지인 이유는 그가 트라우마와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러한 것 때문에 생명력을 소멸시키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 행동했다는 것이다.

 

15. 아브라함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가나안 땅의 원주민 헷족속에게서 땅을 샀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헷족속과 지난한 거래를 한 끝에 가나안에서 드디어 땅을 얻었다.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아브라함은 엄마를 잃고 상심에 젖어 있는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배필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몸종을 먼 곳에 보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자신이 떠나왔던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의 배필, 리브가를 데리고 온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또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미래를 열어갔다. 그렇게 그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었다.

 

16.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앙은 미래를 열어준다. 가난하던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 풍요를 누리게 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사람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슬픔에 휩싸여 꼼짝 못하던 사람이 그 슬픔을 이겨내고 미래를 열어간다. 의미 없던 인생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팔다리에 힘을 얻는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미래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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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