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13. 03:53

구원은 은혜다

(민수기 21:4-9)

  

요즘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에 가장 많이 투자를 회사가 어디인지 아는가? 우버이다. 아마존이 유통업의 판도를 바꾸었다면, 우버는 운송업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우버의 목표는 손님, 또는 물건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정확하게운반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인공지능센서를 개발하고 지형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우버가 개발하고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는 타사(구글)에서 개발하는 자율 주행 자동차에 비해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만약, 자율 주행 자동차 시대가 도래했고,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기겠는가? 당연히,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길 것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장해 줄 초월자를 찾기 마련이다. 옛날 이집트는 나일 강을 주기적으로 범람시키는 신()인 하피를 섬겼다. 나일 강의 주기적 범람으로 인해서 나일 강 주변의 땅은 옥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사가 잘 돼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잘 범람하도록 하피 신에게 예배를 드리며 그 신을 만족시키려 했을 것이고, 나일 강을 어김 없이 범람시키는 하피 신을 신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왜 신뢰하는가?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댈 수 있는 따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고백하며 신뢰한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제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과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는 하나님은 사뭇 다르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은 매우 스윗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안전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의 재앙을 보냈고, 그 재앙 중 10번재 재앙이 임했을 때, 하마터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도 애굽의 장자들처럼 죽을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애굽 한 이후에도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홍해에 가로막혀 애굽 군대의 칼날에 죽거나 홍해에 빠져 죽을 뻔했다.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렀을 때도 그랬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데, 그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한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여러분의 몸을 실은 자율 주행 자동차가 안전하지 않거나 정확하게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불평할 것이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했던 불평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안전하게, 정확히 인도해 줄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평했다.

 

오늘 말씀에도 이스라엘의 불평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나아갔다. 그런데, 그 우회도로가 별로 좋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불뱀이 등장한다. 이것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불평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응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려움에 처하면 불평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떻게 사람이 불평하지 않고 사는가. 성경에 보면 불평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편에 보면, 대부분의 시가 탄원시이다. 탄원시는 시인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대표적인 탄원시인 1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리고 다른 대표 탄원시인 22장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라고 하는 장르로 대하고 있어서 그렇지, 이 탄원시들의 내용 자체는 매우 거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때로,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놓으라. 천벌 받을까 봐 무서워 하지 말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 시편에 보면, 불평으로 시작한 시편은 나중에 감사의 찬송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평을 감사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불뱀은 독이 있는 뱀을 의미한다. 어릴 적, 우면산 기슭에서 독사를 참 많이 봤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사는 까치독사와 살모사이다. 까치독사는 알록달록 색깔이 예쁘고, 살모사는 회색과 검정색 점이 박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화단을 꾸미려고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 까치독사가 나타난 적이 있다. 점심 시간이었는데, 오전반을 마치고 하교하는 저학년 아이들이 까치독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독사는 독이 바짝 올랐는지, 대가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한 아이에게 돌진했다. 나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밀쳐내고, 가져간 강목으로 독사의 머리를 후려쳐서 독사를 잡았다. (내가 이래봬도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의인이다.)

 

독사에 물리면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독사에 물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을 한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모세는 그들의 간청대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보통,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개되면, 우리는 이런 예상을 할 수 있다. 백성들이 회개하며 간청했고, 모세가 중보기도 했으니, 그들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뱀들을 물러가게 해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우선, 뱀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무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이 그들이 의도하고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뱀이 물러가고, 더 이상 뱀이 그들을 물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구원은 은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에베소서 2 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 말은 우리가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리는 공짜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구원이 공짜로 우리에게 선물로 임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 하며 좋아한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은 은혜다라고 하는 말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면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구원은 은혜다라는 말은 생명의 완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신비로운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을 설정해 놓고, 하나님이 그것에 맞게 구원해 주시기를 원한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을 날(공짜로)로 먹으려 하는 놀부 심보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가 있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열망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상정해 놓은 구원을 갈망하며 기도한다.’ 결혼하고 싶은 처녀나 총각은 자신이 원하는 신랑감이나 신붓감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취직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성취해 주시기를, 즉 자기의 뜻대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설정해 놓은 구원의 방식이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가?

 

결혼 하기 전 청춘 남녀는 너 없으면 못살아.” 그러다,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제 너만 없으면 살겠다고 한다. 취직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 회사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다가,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 회사를 퇴사한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퇴사한 사람과 퇴사를 꿈꾸는 사람.”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죽어라 공부했는데, 그 회사에 다니면서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퇴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열왕기하 18장에 가면, 불뱀(놋뱀)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남유다의 왕으로 등극해서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그 중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도 있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깨부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놋뱀을 향하여 아직까지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놋뱀에 임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놋뱀이 가졌던 신비한 능력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놋뱀이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무슨 능력이 있는 양, 목에도 걸고 다니고, 차에도 걸고 다니고, 현관에도 붙여 놓고, 집에도 구석구석 달아 놓는다. 십자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지, 십자가에 무슨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은혜다. 구원은 공짜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우리가 생각한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신비롭게 우리에게 임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말은 구원이 그들에게 공짜로 임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예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인 것이다. ‘구원이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

 

그러니, 너무 삶에 힘 주고 살지 말라. 지금 그거 안 되면 죽을 것 같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구원은 신비한 방식으로 임한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러니, 일이 좀 안 된 것 같아서 힘들어 하지 말고, 일이 좀 잘 된 것 같다고 들뜨지 말아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은 정도로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우리의 삶에 이루어 주실 것이다. 구원은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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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