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5. 13:45

무심과 단순

(출애굽기 20:1-17)


구원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어떤 이는 “10원 빼기 1원이요.”라고 어쭙잖은 농담을 건네기도 할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가질 수는 있어도, 구원에 대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조차도 잘 모른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구원은 예수 믿으면 받는 거야.” 구원을 예수, 그리고 믿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구원의 개념이나 실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어떠한 것 때문에 완전한 생명에 금이 갔다. 그 어떠한 것이 무엇인가? 죄이다. 죄란 생명의 완전성을 헤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죄악이란 생명을 위협하는 부정한 것이다. 죄가 나쁘고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죄 짓지 말아야 하고, 죄를 멀리 해야 하고,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실존(Anthropology)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인간에 대한 비관론(Pessimism)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Optimism)이다. 비관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이야기 한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낙관론은 인간에게서 희망을 본다. 인간에게는 죄를 넘어서는 그 어떠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생명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비관론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는 낙관론도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은 생명책이다. ,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시다. 성령은 생명을 존재케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함께 읽은 십계명도 생명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온통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책이다.

 

율법은 단순한 법조항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이다. 율법에는 율법을 통해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생명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율법이 어느 순간 생명을 못살게 구는 존재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법이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손 마른자(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며, 예수를 죽일 놈 취급한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7-28).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온다. (안식일에 배고파서 밀이삭을 자른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율법은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인데, 어느 순간부터 율법이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의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건강하고 배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손 마른 자나 배고픈 자는 안식일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들의 생명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리고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이 그것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들은 손 마른 자와 배고픈 자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안식일에 몸이 아픈 자를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이유는 그가 율법에 담긴 희망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여러분에게 십계명은 무엇인가?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여러분을 구속(拘束,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하는 율법 조항인가? 우리는 흔히, 율법을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고, 귀찮게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이고 무지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사실 단 한 가지이다. 모두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크게 세 가지로 그 얼개를 나눌 수 있다. 1계명부터 3계명과, 4계명, 그리고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가 그것이다. 우선 1계명부터 3계명의 의미를 살펴보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기서 핵심은 우상이다. 우상(Idol)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헤치는 힘(power)’을 말한다. 반대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 가나안 전쟁이 그것이다. 특별히 여호수아서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고자 가나안 족속들과 피 튀기는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하는 이야기를 본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봐야 하는 문제이다. 가나안에는 각 부족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몰렉, 밀곰, 다곤 등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신들을 잘 섬겨야 그 땅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들을 섬길 때 인신제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킹콩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킹콩이 사는 섬의 부족은 킹콩을 잘 섬겨야 자신들이 멸망하지 않고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인신제사를 한다.

 

우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에 대한 경고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상숭배하면서 산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며 사는가? 또한 우리는 어떤 이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당하고 사는가? 우리는 우상숭배하면서, 그 우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면서 산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상숭배 속에서 사는 불쌍한 존재이다. 자기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지 말라. 남의 이익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 그러한 일이 있다면 저항하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3계명을 어기며 사는 것이다.

 

두번째로, 4계명을 살펴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은 쉬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기억할 때 일어나는 은혜이다. 모세오경에는 두 개의 십계명이 나온다(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 물론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부분이 있다. 4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이 다르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11).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창조때문이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이와는 달리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5:15). 신명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구원때문이다. 안식일은 구원의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누가 나를 창조하셨나?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신다.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26-32)

 

누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인가? 그렇다면, 왜 안식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얼마나 소진하고 있는가! 안식일에 들로 산으로 놀러가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쉬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이 철저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자기 스스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생명을 못살게 구는 죄에 상태로 우리를 밀어 넣고 말 것이다.

 

나머지 계명( 5계명 ~ 10계명)은 모두 이러한 신앙고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10계명은 욕심 부리지 말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다. 만족과 감사는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화처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때만 가능한 신비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는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한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얼마나 욕심쟁이로 사는가. 이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로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각 사람이 모두 시장(market)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에게 그 가치 외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소비력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욕망만 난무하는 타락한 시대이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집에는 전화기 한 대, TV 한대만 있었다. 그것으로 족하고 행복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누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 지 집안 사람들이 다 알았다. “준식이네 집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준식이 친구 영주입니다. 준식이 있어요?” “준식아 영주한테 전화왔다.” 만약 준식이가 영주한테 전화를 받고 바깥에 나가면, 집안 사람들은 준식이가 누구를 만나러 나가는지 다 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식이가 집을 나가도 누구 만나러 나가는 지 모른다.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레위기 2523절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땅을 영구히 팔지 말 것은 땅은 다 내것임이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욕심부리는가. 땅에서 난 소산은 다 주님의 것이다. 땅에서 나지 않은 것으로 만든 것이 어디 있나.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모두 땅의 소산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핸드폰도, 자동차도, 집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며 얼마나 욕심부리고 치사하게 굴며 사는가.

 

우리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 개인을 시장으로 보고 소비력이 없는 사람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은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았던 것처럼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신앙고백하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나, 3세계의 가난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제 5~10계명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시 한 편을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 한다. 이병률 시인의 <이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시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는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십계명의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이 시 중에서 다음 시구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무심함을 / 단순함을 /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우리는 무심하지 못하고, 단순하지 못해서,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아서, 우리는 살지도 버티지지도 못하고 먼지처럼 쓸모 없어진다. 참으로 비극이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나니, 우상을 숭배한다.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못살게 굴고 소진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 만드는 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여 남의 것을 탐하고 차지하느라 은밀한 죄를 지으면서 산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명의 완성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욕심부리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생명의 완성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다른 것들에는 무심하게 된다는 것을.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면, 단순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계명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무심함과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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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