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7. 03:32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의 영이다

(겔 37:1-6; 8:6-11; 11:39-44)

오늘 우리가 읽은 세 개의 본문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산다! 한 마디로,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잘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Nothing)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생명, 즉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 즉 살아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죽음, 즉 죽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별별 행동을 다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니발(사육제)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어 간다(죽어간다)는 것을 잊고자 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지요.

 

또한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자살소동이나 자살도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죽음의 상태를 알리고 싶은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를 보십시오. 얼마나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다는 말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현실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른 뼈는 그들의 삶이 절망 자체요, 죽음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자비나 인권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고,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뿐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 가운데서 적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짐승처럼 남의 나라에 끌려왔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마른 뼈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것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만큼 대량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른 뼈 꼴짜기에서 발견하는 죽음이나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이나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뭉뚱그려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인도양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239명의 생사가 확인되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건 여객기 실종으로 인해 239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239가지의 사연을 가진 239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 입니다. 6백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6백만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건들입니까? 우리는 TV 매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접해서 남의 일 같아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숨이 콱 막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탓은 아니지만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마지막 날에, 즉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다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입술에서는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해 엄청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4)이나 지나서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냄새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는 동안도 그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살고 있으니까 생명 냄새를 더 풍겨야 할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고 죽음의 냄새를 더 풍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생명보다 죽음과 더 가깝게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운명은 죽음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인간 현실입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나 모두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절망하고 있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허무에 젖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까지가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똑같이 보는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 현실 너머의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단순히 이것을 보고 너희의 현재 상태를 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렇게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마른 뼈까지도 생명을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이 점잖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렇지, 에스겔의 대답은 점잖은 대답이 아닙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 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한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볼멘 소리입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볼멘소리 하는 에스겔 앞에서, 그가 똑똑히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때 그러셨듯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도대체 깨달아지거나 믿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넣어져 살아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이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만 젖어 있어, 생명을 간구하는 능력이 상실됐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한 번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음의 일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자들은 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육신 너머에 있는 영의 일, 생명과 평안을 볼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안에 품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생명을 보게 됩니다. 온통 생명의 일만 보는 우리의 삶 속에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되겠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른 뼈 같다고 실망(절망)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 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의 현실, 우리가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우세요? 힘드세요? 죽겠습니까?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생명을 보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보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생기가 넘치게 살아갑니다. 어깨를 좀 펴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살을 붙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귀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헛된 영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하는 자에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마른 뼈와 같은 상황에서뿐만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죽음을 맞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결국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른 뼈와 같은 소식, 무덤과 같은 소식들뿐이지만, 그런 소식들 앞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막막하게 서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과 질문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이 안에 품고 사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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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