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4. 15:18

기다리는 복

(마가복음 13:24-37)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다. 교회력은 대림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점은 기다림이 근본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기다린다. 그 순간을 재림(파루시아)’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완성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사랑과 의는 매우 부분적이고 완전하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도 바울이 사던 시대의 거울은 청동거울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거울처럼 형상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그래서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그처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의를 희미하게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는 사랑과 의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보는 것처럼, 전체를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보니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이상,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각 사람마다 기독교인이 된 경위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어릴 적에 우연히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누군가의 전도로, 누군가는 스스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를 결혼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경우도 있다.

 

교회에 몸을 담게 된 경위가 어찌되었든,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오늘 말씀은 성전파괴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전이 파괴되었고, 왜 자신들이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했다. 그때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유대인 신앙공동체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성전을 건축한 뒤, 그들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피어난 희망은 메시아의 도래였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헤롯대왕에 의해서 흡수되어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거대한 성전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AD 70년경, 그 거대한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만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성전파괴사건을 환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전이 또다시 파괴되면서 그 사건을 놓아두고 신학적 분석이 들어갔다. 왜 성전이 파괴되었을까?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와는 다른 해석이 들어갔다. 소위, 헤롯성전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형성되면서 굉장히 중요한 해석의 틀이었다.

 

대인들은 자신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를 거부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헤롯성전을 로마군대의 손을 빌어 없애시고, 새로운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 세상에 계시하시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방인)을 모으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유대인을 만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모른다.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 하며 친절히 대해주라. 그들 덕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을 히틀러가 알았다면, 홀로코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오늘은 그 주제를 설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후, 다시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 하나, 어떤 민족이든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일에 동참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참으로 신비롭다.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기다리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기다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거나, 시간을 하릴없이 흘려 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삶, 희망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는 부지불식 간에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른지, 밤중일른지, 닭 울 때일른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35). 고대 사회에서 떠났던 사람이 되돌아 오는 시점이,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등의 시간은 마땅한 시간이 아니다. 그런 때 온다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고 수사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저 좀 깨워 주세요!”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도 바울도 이 말을 쓰고 있는데, 특별히 에베소서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는 말과 더불어 깨어 있으라는 말을 쓴다. 그 당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당시 술은 디오니소스(바쿠스) 신을 섬기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술 취한다는 것은 잡신의 스피릿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혼란케 하는 나쁜 영을 물리치고,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흠 없이 보존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우리의 영은 어떠한 영인가? 우리는 깨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떠한 잡신에게 내어주고 있는가? 요즘은 모두가 spirit of money에 사로 잡힌 듯하다.

 

나는 골드러쉬 주(Gold Rush State)인 캘리포니아에 이사와서 그것을 더 강력히 경험하고 느낀다. 모든 게 다 돈이다. 그런데, 교회가 좋은 것은 교회는 세상의 스피릿과 반대로 흐른다. 세상은 봉사를 하면 돈을 받는데, 교회는 돈을 내고 봉사한다. 이것은 매우 이 세상을 전복시키는 행위이고, 이 세상의 spirit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spirit의 실천이다.

 

우리가 세상의 spirit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깨어 있기위함이다. 세상의 스피릿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스피릿, 성령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놓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자.

 

 

기도

 

희망의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사랑과 의를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의를 경험하고 실천하고 있지만,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의를 완전히 경험하고 실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

깨어 있는 일에 실패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더욱더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시고 희망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0) 2017.12.18
위로  (1) 2017.12.12
하나님이 피난처  (0) 2017.12.02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1) 2017.11.28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0) 2017.11.23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