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1. 06:41

기쁨의 향연

창세기 56

(창세기 45:16-28)

 

정체를 밝힌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제 기쁨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기쁘다. 살맛 난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기쁨의 향연이 날마다 벌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살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생은 환대 받을 때 기쁘다. 예수께서는 모든 자들을 환대하셨다. 환대 받지 못해 외로움에 치를 떨던 자들을 환대 해주셨다.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죄를 지어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의 사케오 이야기이다. 사케오는 세리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케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주시고, 그를 아브라함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이 진술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매우 레디컬하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는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잃어버린 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은 처음에 애굽의 총리(요셉)에게 환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것을 알고 형들은 기뻐했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환영 받는 상황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왕과 신하들도 기뻐하며 그들을 환대해 준다. 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의 덕과 인품, 그리고 그의 사회적 공헌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해 결국 버림 받은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품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색동옷을 입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요셉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환영 받지 못한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결말이 슬프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환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동물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하물며 사람이랴.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삐뚤어진다. 대인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환영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좋지 않는 것이 외로움이다. 환영 받지 못하면, 외로워지는데,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정신적 상처)를 준다. 몸이 아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환영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도 있지만, 오히려 환영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존재감을 그렇게라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도 자기를 환영해 주거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옛날 성경은 이 부분은 독처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독처한다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인 여자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가 사람(아담)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산을 위한 것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외로움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결혼이 외로움을 더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함(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제정하셨는데 막상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외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2-25).

 

소외감,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정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성격(기질)에 따라 그 현실을 체념하거나 그 현실에 공격을 가한다. 체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신처럼 아프게 만든다. 둘 다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이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 당하고 외로움에 처해지고, 결국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체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환영 받는다면, 다른 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버지 야곱 또한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 요셉을 잃고, 그는 외롭게 살았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이 잘 된 것 같지 않다. 더군다나 야곱은 아들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애굽의 왕과 요셉이 제안한 애굽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리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 준다. 요셉과 형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이었는데, 바로 그 옷이 화해의 선물이 된다. 참 의미심장하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과 곡식을 가득 실어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겉으로 보면 요셉이 철없는 형들을 걱정해서 말한 것 같으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다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가즈떨다, 흔들리다, 동요하다는 뜻으로, 흔히 두려움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요셉의 형들이 많은 물품을 싣고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강도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르우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로 해석한다. 아무튼, 요셉은 끝까지 형들과의 화해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걱정대로, 또는 당부대로, 형들 일행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해한다. 여기서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서 상황을 다시 표현해 보자면, 야곱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할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었다. "니네들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는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과 얼마나 서원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 옛날 요셉이 들판에서 죽었다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그들은 피에 젖은 옷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셉이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야곱의 귀에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이 외에도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일이 많다. 장남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질 않았나,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강간 사건 때 아버지 모르게 세겜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내 놨더니,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게 해 놓고 돌아 왔으며, 양식 값을 치르기 위해 준 돈도 자루에 도로 가지고 와 놓고 왜 그것이 여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또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여준 환대가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아들들의 말을 못 믿었지만,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내온 환대(암나귀 열 필에 가득 실린 선물과 양식들)를 보고 야곱은 아들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상황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27).

 

그렇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기운이 소생했다는 말은 영이 살았다는 말이다. ,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들들을 믿지 못해 외로움 가운데 살았던 야곱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는 뜻이다. 요셉을 잃고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살았는데, 게다가 이제 베냐민 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비로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쁨은 외로움이 극복될 때 온다. 환영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에 던져지지만, 환대 받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다. 환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원의 빛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을 때 죽음에 처해졌지만, 팔려간 애굽에서 환대 받았을 때 자존감을 회복하여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씻어내고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애굽에서 환영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 받았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운데 그 동안의 죄책감을 씻어 버리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야곱은 외로움 가운데 살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의 향연을 보는 일은 가슴 벅차다. 그 기쁨이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옮겨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구든지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누구든지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우선 배제부터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들의 몸 짓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렇게 소외되어 외로움 가운데 처해지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외로움에 처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듯이, 우리도 서로 환영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결국 구원의 기쁨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