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16. 14:18

꿈보다 해몽

(창세기 41:1-8)


오늘 말씀은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보다 무의식이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 책을 썼다. 그는 신경증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무의식의 세계, 즉 꿈에 집중했던 것이다.

 

성경이 쓰인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계시의 통로로 보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꿈을 꾸고 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관심이 많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서적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잠을 자면서 꿈 꾸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방향으로 오래 순종하는 것(Long obedient toward one direction),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성실성을 갖춘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요셉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만약 팔자타령 하면서 망가졌다면 기회가 왔어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의 인생은 꿈 때문에 겪은 일이 결정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샀다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요셉이 묶은 곡식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 결국, 이렇게 애굽의 노예가 된 것은 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요셉을 힘들게 한 것도 꿈이지만, 요셉을 세워 준 것도 꿈이다.

 

어느 날,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꾼다.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에게 잡아 먹히는 꿈과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킴을 당하는 꿈이었다. 바로는 이 꿈을 꾸고 이 꿈이 흉몽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번민하여 잠을 잘 못 잤다. 날이 밝자, 바로는 애굽에서 내로라 하는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말해주고 그 꿈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사실, 해석을 못한 게 아니라, 바로를 만족시키는 해몽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바로의 측근에서 바로를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자신의 석방을 예견했던 요셉을 떠올린다. 그는 그때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요셉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2)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바로의 꿈이 그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나게 했다. 꿈 때문에 요셉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앞에 불려간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꿈은 애굽에 불어 닥치게 될 흉년에 대한 것이다. 7년의 흉년 전에 7년의 풍년이 있을 것인데, 7년의 풍년의 때에 흉년을 잘 대비하면 흉년이 오더라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의 꿈 해석이었다. 요셉의 꿈 해석은 바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그 결과 바로는 요셉을 총리대신에 세워 풍년 동안 흉년을 대비하는 일을 관장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의 꿈 해몽의 핵심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선포한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꿈은 사람이 꾸지만 그 꿈의 실현은 하나님께 있다!” (잠언 16:9).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꿈이란 무엇인가? 꿈이란 단순히 우리가 잘 때 꾸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꿈이란 자기 욕망의 실현도 아니다. 꿈이란 운명론도 아니다. 성경에서 꿈이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말한다. 꿈이란 생명, 즉 사는 일과 사는 길에 대한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30:15). 이 말씀에 나와 있는 도식을 보면, 생명은 복이고, 사망은 화이다. 우리는 돈과 건강과 명예가 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인사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새해에는 돈 많이 버시고, 건강하시고, 명예로운 일이 많길기원한다.

 

본문 가운데는 애굽의 점술가들이나 현인들이 바로의 꿈을 듣고 어떠한 해석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미루어 보아, 그들은 모두 바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 꿈을 돈, 건강, 또는 바로의 명예와 관련하여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의 일상에서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인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인가, 얼마나 명예가 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의 꿈을 그러한 것들에 맞추어 해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의 꿈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집중, 그것이 요셉이 꿈의 해몽을 통해서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꿈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분만을 바라는 이유는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 생명의 완성을 본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완성해 가시는 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본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돈이나 건강, 명예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꿈을 꾸는가? 꿈을 꾸었을 때 꿈 해몽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셉에게서 배우는 꿈 해몽의 핵심은 생명의 완성,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한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문태준의 시 봄볕이다.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 문태준의 시집 <그늘의 발달> 중에서

 

봄볕 아래서, 이러한 감수성을 발하다니, 대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감수성이다. 꿈을 꾸면서 그 꿈이 나에게 어떠한 부와 건강과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헛된 꿈이 아닌, 꿈을 꾸면서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일,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 자리에 드는 행위 자체가 꿈을 꾸는 행위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로 삶을 살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명의 완성,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흔히, 내가 하는 일, 또는 나의 처지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러다 보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가 행하는 일, 우리 교회의 현재 상황보다는(주보에 나오는 출석, 헌금 통계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그냥 통계일 뿐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교회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는 잠 자리에 들기 전, 기도한다. 오늘 나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리고 내일 나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주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한다. “주님,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입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날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감사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벅차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우리의 삶, 우리의 교회공동체) 하실 일을 기대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저, 싸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꿈꾸자.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거기에 집중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요, 식물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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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