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5. 05:13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 그리스도의 빛에서 보기 -

(삼상 17:41-51)

 

사무엘상 17장은 다윗의 용맹성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은 정신적 병 때문에 고통 받던 사울의 수금 타는 자로 왕궁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 다윗을 수금 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소개한 자는 다윗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a mighty man of valor)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 16:18).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용기와 무용은 골리앗과의 대면에서 증명된다.

 

사무엘상 1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울 왕의 장남 요나단의 기지로 인해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한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 그런데 이때 블레셋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인 같은 장수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4절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골리앗의 위용은 압도적이다(삼상 17:4-7).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보는 것 같다. 골리앗의 위용에 주눅이 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무도 그와 대적하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었다. 골리앗은 그런 이스라엘 군사들을 조롱했고, 이스라엘 군사의 심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급기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까지 모욕한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17:10).

 

싸움을 돋우는 자골리앗의 모욕을 한 창 당하고 있을 무렵,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엘라 골짜기에 오게 된다. 다윗의 큰 형 셋이 그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기에 아버지 이새가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골리앗이 싸움을 돋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군대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이런 말만 주고 받았다. “(골리앗)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17:25).

 

다윗은 이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할 의사를 내비친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17:26).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는 이유를 상금 때문에 아니라 신앙 때문임을 밝힌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17:26).

 

다윗은 무엇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이다. 마음 속 깊이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이 진실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사울 왕은 다윗을 불러 참전 의사를 확인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골리앗)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17:32). 다윗의 이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래도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무리하고 생각한 사울 왕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니리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7:33).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그저 소년이 아니라, 양을 치면서 양을 잡아 먹으려 하는 사자나 곰 등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골리앗과 싸워 볼만한 무용을 갖춘 자라는 것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것은 단순한 용맹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신앙고백 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이리다”(17:37).

 

다윗의 용맹과 신앙을 확인한 사울 왕은 다윗에게 나가서 골리앗과 싸울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칼을 내어준다. 그만큼 다윗에게 신뢰를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과 칼이 불편하다고 말한 뒤,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물매와 돌 다섯개를 손에 쥐고 출전한다.

 

골리앗은 갑옷을 걸치거나 칼을 차지 않은 상태에서 물매만 가지고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나온 다윗을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43). 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싸움은 굉장히 싱겁게 끝난다. 그토록 이스라엘 군대를 숨막히게 했던 골리앗이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쓰러지고 만다. 골리앗은 이 싸움에서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에 비해서 허무하게 결말이 맺어진다. 그렇게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보다도 못한 개 한 마리 쓰러뜨리듯이 쉽게 쓰러뜨린다. 골리앗을 앞세워 전쟁에 나섰던 블레셋은 골리앗의 죽음과 함께 사분오열되어 도망친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것이 된다.

 

우리는 통쾌해 보이는 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 물리쳐야 한다?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히 놔두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 삶에 있는 전쟁은 모두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조건 이긴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교훈일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넘어서 위의 열거된 교훈의 위험성을 말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을 읽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다간 성경이 오히려 폭력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폭력을 끝내신 분이지 폭력을 조장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조장되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한 번 보자. 거기서 허용되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문구에서 온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17:26). 여기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할례 받지 않은이라고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타자성(otherness)’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은 몇 가지 절차를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타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려면 일단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행사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폭력행사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다.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그야말로 취급하며 한 방의 폭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골리앗을 자신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할례 받지 않은사람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읽혀지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유한 역사의식과 하나님 인식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역사는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빛에서, 즉 그리스도의 빛에서 봐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승리는 폭력에 의해서 쟁취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비록 다윗이 골리앗보다 외적으로 보기에 왜소했지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는 논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폭력의 극대화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폭력을 통한 승리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한 것은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폭력적인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폭력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승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밖으로 소외되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안에 있는형제자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자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여기서 더 나아가, ‘죄인까지도 밖으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때문이다(5:8).

 

우리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너무도 쉽게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다.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의 띠로 꼭 묶어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품고 있어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그저 다윗의 용기와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은 것이 좋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군으로서 유대인들이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다윗의 폭력 행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다윗이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언제나 비추이기를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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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