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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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