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7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룻기 2

(룻기 1:15-22)


J. Crew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속도·가격이 더 중요해졌는데 제품·디자인 고집하다 뒤처져"라고 써 있었다. 이 기사가 안타까운 것은 J. Crew를 경영난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미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밀러드 드렉슬러이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미국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손을 거친 패션 브랜드는 모두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패션 브랜드 모두가 그의 경영을 통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GAP), 올드네이비(Old Navy),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메이드웰(Made Well) 등이 그의 통해 성공을 이룬 브랜드이다.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현직 CEO는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J. Crew의 경영자 밀러드 드렉슬러가 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머물다가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뜻이다.

 

나오미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자기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하고, 두 며느리의 살 길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결단을 내린다. 자신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의 백성과 그들의 신들에게로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정에 대하여 두 며느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오르바나 룻이나 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오르바는 자기의 백성(모압)과 신들에게로 돌아가고, 룻만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룻의 결심은 16절과 17절 두 절에 걸쳐 장엄하게 표현된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잘것없는 이방여인, 과부 룻의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없었다면, 룻은 오르바처럼 어쩌면 이름만 거론될 뿐, 아니,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당당하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의 고백이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이 신앙고백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이 바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한 룻의 뛰어난(남다른)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룻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타당한 결정은 무엇이겠는가?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아무도 자기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 돌아가 나머지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려는 살 길을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위에서 함께 읽은 신앙고백과 함께. 룻의 결정은 이러한 싯구를 생각나게 한다.

 

모른 척 돌아서 가면

가시밭 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른 척 돌아가지 않고자신의 현실을 맞닥뜨리는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바로 나오미이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가 나오미냐!”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나오미를 거론하며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 21).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의 이름처럼 기쁨이 없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라가 되었다. ‘마라,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약간 희극적인 표현을 섞자면,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면서도 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를 남다른 인생으로 만들어준 위대한 고백이다. 나오미는 모른 척,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남의 말 삼일 가는 법이니까, 못들은 척, 그런 일 없었던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또는 화를 내며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켄 블렌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올랜도 씨월드에 가서 본 샤무쇼(Killer Whale Show)’이다. 그는 그 포악하고 육중한 범고래가 수준 높은 재주를 부리는 이유는 사육사의 칭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며, 칭찬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며 통찰력이었지만, 지금은 칭찬이 한 사람이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샤무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단체들의 노력 덕분에 범고래는 다시 자신들의 고향인 바다로 되돌아 갔다. 칭찬이라는 빌미로 범고래의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의 EBS에서 '학교란 무엇인가-칭찬의 역효과'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칭찬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의 기억력을 평가하는 실험에서 '잘한다,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감독자가 밖으로 나가자 부정행위를 했지만, '노력했구나,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구나'와 같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커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소개한 현명한 칭찬 방법은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결과에 대한 칭찬은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지고 아이들 자신을 스스로 평가의 잣대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예쁘다'라는 칭찬은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으로 느껴져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캐럴 드웩 교수는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고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다음 사람들로부터 '쟤는 정말 천재인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열심히 하면 잘할 거야'라는 평가를 받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칭찬의 역효과'에 대해 연구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 박사 역시 '칭찬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칭찬 스티커' 따위의 외재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하여서도 한 번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쟤는 원래 신앙이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이게 말이 되는가?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데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원래 신앙이 좋은 데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에서 지적하듯이, 외적인 동기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오미에게서 배운다. 나오미는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직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른 척 돌아서지 않았다.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현실부정이 아니라, 현실직시이다. 현실직시 없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인 내적 동기는 절대 생기기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신앙이란 누군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다. 진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요즘은 다른 능력보다 인간력을 중요시 한다. ‘인간력이란 사람과 사귈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이 힘든가? 아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 교회생활에서 무엇이 힘든가? 내가 목회를 하면서 듣는 가장 많은 토로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사람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사람과 사귀는 능력을 인간력이라 한다면, 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은 영력이라고 한다. ‘인간력영력, 어떤 게 더 어려운가?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귀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더 어렵다. 훨씬.

 

나오미를 보라. 비통한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쳤다고 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쓴 맛을 다른 누구 때문에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쉬운가? 어떠한 사람이 자신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했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그 사람과 원수가 된다. 그런데,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안겨준 하나님을 원수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가 왜 베들레헴에 돌아왔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가장 사귀기 어려운 존재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해내는 사람은 그보다 쉬운 것을 문제 없이 잘 해내는 법이다. 하나님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갇혀 있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를 여시는 분이다.

 

가장 어려운 사귐의 대상인 하나님을 붙든 나오미와 룻, 별다른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어떠한 능력보다 영력(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에서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오미와 룻에게 열리는 미래를 보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들의 미래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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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