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0. 12:34

믿음이 있다는 것

(마가복음 4:30-41)

 

오늘 말씀에는 한 개의 비유와 한 개의 이야기(narrative)가 나온다. 비유는 겨자씨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씨에서 나온 나무는 새가 깃들 정도로 커진다.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과 공격이 심해졌을 때 시작되었다. 비유는 믿음 있는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장치이다. 믿음 없는 자가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지만, 믿음 있는 자가 들으면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과 공격때문에 비유로 씌어진 대표적인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조작하는 것도 이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박해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 복음이지, 점쟁이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언한 예지서가 아니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이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이다. 이것을 오용, 또는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 없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과 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원형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이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배제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내가 너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감사를 말한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핀잔을 자주 듣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배제의 공동체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는 바로 이 기도에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이에 반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용은 다음의 기도와 말씀에 잘 드러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3-14a).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과 같이 배제의 틀에 갇힌 자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의 자세를 갖춘 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는 배제하는 사람인가, 포용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너와 같지 않음에 감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배제 당하는 이들, 소외 당하는 이들과 연대(solidarity)하며 그들과 친구되는 사람인가? 참 쉽지 않은 자기 판단이고 과제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를 더 배우게 된다. 상황은 이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바다(호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 ‘광풍이 불어왔다. 갑작스런 광풍에 제자들은 기겁을 했고,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이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38). 여기서, 우리는 광풍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광풍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일상적으로 지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흔들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흔들림(광풍)’을 경험한다. 신앙인들에게 흔들림이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고,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 흔들림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 흔들림은 당연히 박해였을 것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지만, 박해가 가해져 오자 그들의 신앙은 흔들렸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들 곁에 없으시고, 그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박해의 상황에서 울부짖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하게 됐는데, 주님,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는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일 때문에, 잠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시는가?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깨어나자마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믿음 없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두려움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믿지 않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반대로, 믿음 있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과 관련된 구약의 대표적 인물은 여호수아이다. 그는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두려워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이렇게 위로해 주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

 

두려움과 관련된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두려워)’ 물에 빠졌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31).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심리를 치료하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하나님, 베드로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의 심리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치료하신다. 심리적 두려움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을 이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믿었어야 했고, 베드로는 물 위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다. 그들이 두려움에 젖어 든 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려움은 불의와 비리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병역비리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군대 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자는 불의와 비리를 저지른다. a) '귀신이 보인다'며 정신질환 행세하며 병역 기피, b) 커피를 마시고 괄약근과 팔에 힘을 주는 수법으로 순간적으로 혈압을 높여 4급 판정을 받아 병역 기피 c) 소변검사를 조작해 사구체신염 판정 받아 병역 기피 d) 멀쩡한 무릎을 수술하고 병역 면제 판정 받아 병역 기피 (수술 직전까지 스키 타는 거 즐겨)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인생에 부는 광풍(흔들림)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삶의 흔들림 속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두려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오히려 그것을 꾸짖어야 한다. ‘믿음 있는 자는 광풍(흔들림, 삶의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자이다. “광풍아, 잠잠하라!”(함께 외쳐보자.)

 

요즘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는 정유라의 이야기에 빗대서 설명해 보자면, 믿음 없는 자는 광풍앞에서 두려워 비리를 저지르게 된다. 대학이라는 광풍 앞에서 믿음 없는 자는 정유라처럼 비리를 저지르겠지만, 믿음 있는 자는 그 광풍을 꾸짖으며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능력에 맞는 학교를 선택하여 겸허하게 그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든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교를 겸손하게 선택하든가)

 

믿음 있는 자는 궁극적으로 이런 자가 아닐까 소개한다. 최근(2015)에 만들어진 영화 <The mountain man>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다스라트 만지가 그이다. 인도의 오지에 살던 그는 아내가 다쳤는데, 그녀를 제 때에 읍내의 병원으로 옮기지 못해 아내가 죽자, 마을을 막고 있던 돌산을 뚫어 길을 냈다. 그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던 돌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려면 직선거리로는 병원까지 1Km 밖에 안 되지만, 산 때문에 72Km를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 눈물도 안 나왔어. 그저, 길이 없어서 그랬다, 읍내로만 갔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만 들더구만. 장례를 어찌어찌 치르고 나선 정을 들고 바위를 쪼기 시작했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매달린 거지.” 그는 정과 망치만 가지고 총 915미터의 길을 뚫었다. 그렇게 돌산을 뚫는데 꼬박 22년이 걸렸다. 그는 길이 완공된 뒤 정부에서 수여하겠다고 나선 상도, 그가 살던 비하르주에서 주겠다는 표창장과 상금도 모두 거부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을 왜 주는지 모르겠더군, 도통. 내 할 일을 한 거야 나는. 게다가 사지 육신 멀쩡한데 뭐 하러 돈(상금)을 얻어 쓰나. 이제껏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불편한 것 없이 살았어. 더 가질 필요가 뭐가 있나.”

 

오늘 말씀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는,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삶의 흔들림앞에 두려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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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