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6. 04:35

배수진

창세기 52

(창세기 42:29-43:14)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온다. 일단 양식을 구해 오는 것에는 성공을 한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둘째 아들 시므온이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볼모로 애굽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양식 자루 속에는 돈뭉치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영락 없이 사기꾼으로 몰린 위기에 처해 있다. 마지막으로 애굽의 총리는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또 얻기 위해서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려움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양식을 구해 돌아온 아들들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하게 말해준다. 애굽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비탄에 잠겨 통곡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부모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은 자식을 잃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미 죽은 것처럼 산다. 자기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었는데 무슨 낙이 있겠는가.

 

야곱은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야곱은 죽은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괴로움을 얹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둘째 아들 시므온도 잃게 생겼고,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감지한 장남 르우벤이 나선다. 그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도 찾아오고 양식도 구해오고 베냐민도 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쩐지 야곱은 장남 르우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추측 건데, 르우벤은 빌하와의 간통 사건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다(53:22, 49:4).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신뢰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법이다.

 

해결책에 대한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기근은 계속 심해지고, 애굽에서 얻어온 양식마저 떨어진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2).

 

아버지 야곱의 이 말에 이번에는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선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유다는 베냐민과 함께 가지 못하면 절대로 양식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애굽의 주인이 말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은 괴로워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유다는 필사적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뿐만 아니라, 아들들의 생명, 그리고 아들들의 가족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과 함께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뿐이라고 유다는 말하며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될 것과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살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결단을 재촉한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43:10).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유다의 설득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냥 가지 말고, 그 옛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랬던 것처럼, 예물을 가져 갈 것과 돈을 두 배 더 가져갈 것을 지시한다.

 

여기에는 배수진을 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배수진이란 물을 등진 진지(陣地)라는 말로, 어떤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배수진을 치고 싸울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수진을 친다.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유다는 자신의 목숨과 평생 죄인의 낙인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치고 양식을 구하는 일에 협조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배수진이 한 개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보내는 것인데, 사실 베냐민을 보낸다는 것이 곧 베냐민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야곱은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베냐민을 보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믿음을 지니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이런 저런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신앙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라는 칭호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계시된 것이고(17:1),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사용했고(28:3), 야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다(35:11).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다.

 

야곱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호칭이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빈 적이 있다(28:3).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을 도륙한 일로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35:11). 나중에 죽음을 앞둔 야곱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도 자신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셨다고 고백한다(48:3).

 

이렇게 야곱에게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찾아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어려울 때마다 찾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지금, 야곱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늘 그랬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담긴 기도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른다. 잘 되고 있을 때 곧 닥치게 될 어려움을 모르고, 어려움을 겪을 때 곧 잘 되게 될 것을 모른다.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에 파묻혀 지내고,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냥 어려움에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 우리의 인생은 참 가련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즐거움이나 괴로움 가운데 조금만 눈을 돌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겸손하게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야곱.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과연 자식을 잃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을 배수진으로 치고,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야곱에게 꿈에도 생각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난다. 자식을 잃게 되기는커녕 잃은 줄로 알았던 자식(요셉)까지도 도로 찾는 일이 일어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배수진, 한 번 쳐 볼만하지 않은가!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