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8. 12:00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룻기 2)

 

설교자로서 설교하기에 쉽지 않은 성경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를 단순하게 보면 영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사들의 영웅담이어서 재미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굉장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된말로 짜증나게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설교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사기와 함께 룻기를 주셨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몰락을 그리고 있는 반면, 룻기는 그러한 혼란과 어둠의 시대 가운데 저만치 혼자서 피어나는 제비꽃과 같이 희망과 빛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라는 러시아의 속담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희망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은 룻기서와 같이 희망을 주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환해집니다. 예배 시간에 성경 읽기는 설교를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자는 설교할 뿐입니다. 설교말씀보다,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설교말씀이 귀에 들리는 법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설교말씀에만 관심을 두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 증폭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지, 우리 인간을 증폭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구원입니다.

 

룻기의 1장 말씀은 나오미의 기구한 인생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22).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라는 시간적 배경은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이삭줍기에 나섭니다. 요즘에는 이삭줍기 같은 것이 없지만, 옛날에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이삭줍기를 못하면 그야말로 거지 신세가 되어 빌어먹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의 마지막 자존심인 셈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이 조렸겠습니까?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사는 저는 그 마음이 이해 갑니다. 차별 중에 가장 극복하기 힘든 차별이 인종차별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인종차별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요즘 한국도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데, “완득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소프트하게 그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터전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나, 다문화가정 친구들에게 잘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실 겁니다. 이방인이고, 여인이고, 남편도 잃은 상태의 룻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놓여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줄타기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 중에 가장 소외된 자였습니다.

 

그녀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를 하다가 우연히엘리메렉(룻의 시아버지)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형도 낯설고, 문화도 낯설고, 사람도 낯설었던 룻이 무엇을 알아서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겠습니까? 게다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 하려면 허리를 숙이고 정신 없이 이삭을 주워 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삭 줍는 여인이 룻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도 이삭줍기는 경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우연히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은 말로 설명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필연적인, 그리고 감사와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러한 우연,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없다면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거기에 우리는 감사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보아스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고, 유력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라고 하는 것을 보니,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있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보시죠.

 

보아스는 일터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건넨닙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God be with you!” 보통 사람 같으면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먼저 건네지 않을 것입니다. 잔소리부터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복을 먼저 빌어줍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보아스의 축복을 받은 일꾼들은 거기에 복 비는 말로 보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God bless you!” 참 훈훈한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꼭 나타나야 하는 훈훈한 장면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복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아멘안 하시는 분은, 그래도 복은 이 최고지, 생각하시는 분이죠?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 목사님도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영성신학자 안셀름 그륀의 책을 즐겨 읽습니다. 그의 책에서 배워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분들을 위해 복을 빌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를 통하여 하늘의 복을 받으셨습니다(안 받으시겠다는 분은 다시 돌려주십시오.). 저는 목사로서 하루의 일과를 어쩔 수 없이기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굉장히 힘듭니다만, 큰 특권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생각하며 그날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만나는 사람은 그냥 일반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일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덩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제 눈에 다 복덩이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만났는데도, 나를 들이받는 사람도 있습니다(지금 조시는 분, 또는 딴 생각 하시는 분!). 복이 둥글둥글하게만 올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복은 때로 뾰족하게도 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복을 간구했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뾰족하게 오는 복덩이에게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난 후에 오는 뾰족한 복덩이는 은혜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들 간에 어떠한 말을 주고 받는지 보면 그 공동체의 미래가 보입니다. 가정에서부터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복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부부 간에 의식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 becoming being, 즉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되어가는,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남녀의 관계(부부의 관계)가 참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동화 속에 나오는 고운 말을 씁니다. “공주님, 왕자님, 나의 로테, 나의 네페르타리” “내 눈에는 그대가 천사로 보여, 내 눈에는 그대가 아름다워요, 내 눈에는 너 밖에 안 보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어가 매우 인간적으로 바뀐다. 가장 인간적인 말을 씁니다. “이 인간, 저 인간그러다 더 심해지면 언어가 동물적으로 갑니다. “XX, XX”. 그러나 끝에 가서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를 씁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보금자리인 지구를 떠나게 되는 겁니다. 각자가 왔던 화성과 금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죠.

 

제 생일이 36일인데, 얼마 전 생일 날, 케이크 자르고 밥상 차려주는 집사람이 고마워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영숙이, 오빠 사랑하지?’라고 물어봤는데, 우리 집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일 날 죽고 싶어하더군요. ‘내가 애들 때문에 산다.’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내 몸에서 애기 냄새가 난다고 좋아하더니, 요즘에는 내 몸에서 독소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해독 주스를 들이댑니다. 내 몸에 있는 독소를 빼내야 한다면서요. 그거 먹느라 정말 힘듭니다. 안 먹으려 하면 도끼눈 뜨고 바라봅니다.

 

50, 60, 70대 남자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형님들, 내가 오늘 아침에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 달라 그랬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녀, 나는 오늘 집사람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 봤다 죽는 줄 알았어.” 가만히 듣고 있던 70대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동생들, 말도 마, 나는 오늘 아침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서로 복을 빌어줍시다.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라는 마음이 들어도 복을 빌어줍시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는 고운말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는데,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나에게는 이 말이 정말 실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내 존재가 달라집니다. 목사의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데,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을 비는 언어와 감사의 언어는 분명 하나님의 복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연습해봅시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부부끼리 복을 빌어주는 말은 이겁니다. “사랑해. 고마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힘내요. 내 맘 알죠?” 사실 최고의 복을 빌어주는 언어는 신체 언어입니다. 부부끼리는 뽀뽀가 최고의 복 빌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뽀뽀를 자주합니다(물론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복을 빌어주는 행위가 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손과 발이 실천하게끔 해줍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보시죠.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보아스가 일터에 와서 처음으로 한 말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을 보고, “저 여자는 뭐냐? 왜 남의 밭에 와서 허락 없이 이삭을 줍는 것이냐? 당장 내쫓아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복을 비는 말을 해 놓고, 복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보아스는 복을 빈 자답게 룻에게 선대합니다. 1)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자신의 밭에 머물 것을 허락합니다. 다른 밭에 가면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자신의 밭에서 계속해서 이삭줍기를 해도 괜찮다고 선대합니다. 2) 그리고, 부리는 일꾼들에게 룻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합니다. 이방 여인이고, 과부고, 젊은 여자로서 어떠한 해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보아스는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룻을 보호해줍니다. 3) 또한 마른 목을 축이게 해줍니다. 베는 자를 따라 허리를 숙여가며 이삭을 줍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금방금방 목이 마르기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물 먹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먹어야 하는데, 물 한 모금 얻어 먹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이방 여인인 룻이 낯선 곳에서 물 얻어 먹는 일로 고초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보아스는 그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룻을 구해줍니다. 4) 마지막으로 보아스는 일 하던 중간에 룻의 배고픈 배를 부르게 해줍니다. 이삭줍기를 한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뜻인데, 가난하다는 것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줍기를 하느라 얼마나 배고팠겠습니까? 아마도 배가 등가죽에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배부르게 먹여줍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복을 빌어주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선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경건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야고보서 127절에 나와 있듯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때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던때였습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행하던, 하나님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보아스가 롯에게 선대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롯이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을 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룻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예뻐 보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임하는지 보십시오. 나락으로 떨어졌던 두 여인(나오미와 룻)의 삶이 점점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날, 룻이 보아스의 보리 밭에서 이삭줍기를 통해 소득 한 것이 보리 한 에바였습니다. 에바는 광주리라는 뜻입니다. 한 광주리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대단한 수확입니다. 이삭줍기 해서 그 정도의 수확을 얻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룻은 일하느라 배를 굶어 배가죽이 등에 붙어 돌아온 게 아니라 오히려 배부르게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음식이 남아 그것을 챙겨 가지고 와, 하루 종일 굶었을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음식을 구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당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의무를 감당하게 하셔서, 룻을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시고, 두 여인의 고단한 삶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입니다. 룻기서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2).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 그리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이유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룻의 아름답고 신실한 결단,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다!”, 이것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마음을 두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순종이 만나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순종했고, 보아스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 모두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말씀)와 인간의 순종은 역사를 바꿉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미련해 보이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음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의 희망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십니까? 그것이 십자가처럼 미련해 보일지라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예수 믿는 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적인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결단이 여러분의 언어부터 바꾸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자의 언어는 은총의 언어, 축복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둔 마음이,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의 언어가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복을 불러 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 희망을 만들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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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