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8. 06:36

복을 베푸는 자

창세기 59

(창세기 47:1-12)

 

<예언과 성취>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예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예언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신앙인)로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성경의 저자들의 관심사와 행보를 맞추는 것이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땅으로 가게 되는 사건은 예언의 성취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4:13-14).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이 예언이 오랜 세월이 지나 야곱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예언과 성취>의 구조가 인간의 숙명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신비에 속하는 것이지, ‘숙명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인간의 미래를 속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지 속박하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의 점치는 행위와 하나님의 예언은 분명히 다르다. 점치는 행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점치는 행위는 숙명론에 사로잡히는 우상행위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참 해방의 길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해주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희망 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능히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기근이 있을 때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계획을 갖는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강구할 때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했다. 이삭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내려가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모든 여건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야곱의 때였다. 그 일은 형들의 시기를 사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야곱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방 땅(애굽)에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고센 땅에 도착한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몇몇 자녀들과 함께 애굽의 왕을 알현하게 된다. 애굽 왕과 야곱의 만남은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드라마틱 했는지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야곱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7). 야곱은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곱의 신과 바로의 신은 달랐다. 쉽게 말해서, 불자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신자 앞에서 불자가 부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존중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야곱은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야곱의 축복을 받은 애굽 왕은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네 나이가 얼마냐?” 한글 성경은 애굽 왕이 야곱에게 매우 거만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영어 성경만 봐도 애굽 왕이 야곱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어 나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ow many years have you lived?” ,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묻는다. 굉장히 공손한 표현이다.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에는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두 단어로 표현한다.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이 그것이다. 나그네는 마고르라는 히브리어로 거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야곱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거주했다는 뜻이다. 야곱의 고향은 브엘세바였다. 그라나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피신한 뒤, 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꾸려야만 했다.

 

또한 야곱의 세월은 참으로 험악했다. 홀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의 속임수 아래 험한 세월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뒤 야곱의 삶은 고통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사랑하는 딸 자식의 강간 사건을 겪어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낳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야곱이 이렇게 초면인 사람, 그것도 애굽의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그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었고 그의 삶이 험악한 삶이었지만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야곱이 당당하게 애굽 왕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네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은 오히려 인간의 자아를 망가뜨리고 고십불통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야곱이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임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애굽 왕에게 들어가면서 복을 빌고, 나오면서 복을 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10). 이 장면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사실 이 장면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남의 복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야곱의 이름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이는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라는 뜻이다.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만큼 비열한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복을 베푸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베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야곱이 그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 이름이 지닌 뜻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언은 인간을 숙명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또한 그 말씀 안에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의 비유와 같다. 밭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거기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는 그 보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그 보화만 있으면 그 아무 것도 부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베푸는 자가 되지 않는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가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보화, 즉 하나님의 말씀, 예언을 발견한 자가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게된 것은 그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식하는 자에서 성취된다. 예언의 신비는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게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성취된다. 그리고 예언의 성취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푼다. 참 자유를 주고, 생명을 구원하고, 삶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자의 삶은 어찌 보면 나그네 인생이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 야곱만 특별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가운데서 삶을 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야곱처럼 이스라엘이 되어서 예언을 성취하고, 빼앗는 자(철 없는 자)에서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어도 철 들지 못하고 여전히 빼앗는 자로 남의 발뒤꿈치를 잡은 인생으로 사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은 세상에 희망을 안겨주기는커녕 탄식 소리만 늘려놓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남의 발뒤꿈치를 더 효과적으로 잡는 인생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의 성취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야곱처럼 발뒤꿈치를 잡는 자(남의 것을 빼앗는 자)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연륜은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야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잘 자라나고 있는가!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