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참 슬픈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가수 백설희 씨이다. 그 이후, 이미자, 조용필, 나훈아, 장사익 씨 등이 리메이크해 불러 대중들에게 더욱더 알려진 노래이다.
봄날은 간다,는 역설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한국전쟁 통에 봄날을 겪은 한(恨) 맺힌 한국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전쟁은 이렇게 비참한데, 여전히 봄날은 찬란한 역설적인 상황이 담겨 있다.
(비교적) 젊은 나는,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 <봄날은 간다, 2001년 작>를 통해 이 문장을 접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봄날은 간다’의 문장보다는 이영애의 미모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40대에 들어선 지금, 내게는 ‘봄날은 간다’의 문장만 눈에 들어온다. 문장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내 어린 시절, 이미자가 ‘봄날은 간다’를 부른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제목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가사가 기억난다. 20대 후반, 젊음이 넘칠 때 본 <봄날은 간다>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건, 영화 속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와 ‘봄날은 간다’의 그 시적인 표현만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이 슬프게 다가온다. 이 몹쓸 세상을 알아버린 탓일 거다. 세상의 이치에 나를 이입시킬 줄 알아버렸기 때문일 거다.
나는 어느 순간, ‘봄날’이라는 보통명사에, ‘나’의 존재를 이입시킬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봄날은 간다’의 주어인 ‘봄날’이 ‘내’가 된 것이다. 문장에서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 주어인 ‘봄날’은 하필이면 ‘간다’라는 서술어를 만나서, 슬퍼졌다.
만약, 주어 ‘봄날’이 서술어 ‘온다’를 만났으면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달려졌을 것이다. ‘봄날은 온다’라는 문장은 더 이상 슬프지 않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냐에 따라서 ‘운명’이 좌우된다. ‘봄날’이라는 주어 대신 ‘겨울’이라는 주어를 생각해 보자. ‘겨울은 간다.’ 이 문장에서 주어 겨울이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와 같은 서술어를 만났지만, ‘겨울은 간다’라는 문장은 ‘봄날은 간다’의 문장과는 다르게 슬프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이다.
이 문장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다. ‘봄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슬프다. ‘겨울’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내가 어떠한 주어의 모습을 하고 살고 있느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어인 내가 ‘어떠한 서술어를 만났느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만나면 따뜻해지는 서술어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생은 짧으니까. 봄날은 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