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15. 11. 1. 14:29

비 오는 날의 도너츠

 

1989년,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와>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정작 그 영화는 1990년 2월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그 영화를 고2가 되기 전 봄 방학에 봤거나, 고2가 되고 난 3월쯤에 봤던 것 같다. 날씨가 좀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 영화를 함께 본 교회 누나(이문선)와 친구(오정환, 나의 죽마고우)의 두툼했던 옷차림도 기억난다. 교회 누나는 분명 바바리 코트를 입었었다. 그 영화를 본 장소는 종로에 있는, 그리고 단성사 앞에 있는 피카디리 영화관이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생각하면 단연 주제곡이 생각나고, 그 다음엔 혜성처럼 등장한 여배우 옥소리가 생각난다. 주제곡을 불렀던 세 사람(김현식, 강인원, 권인하) 중 김현식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예쁘던 옥소리는 인생의 풍파를 겪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조차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면, 사실 나에겐 <비 오는 날의 수채화>보다 한 발짝 먼저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 오는 날의 도너츠이다. 이건 어떤 영화나 노래 제목이 아니다. 이건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도너츠이다.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물론 비 올때마다 그러신 건 아니지만),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드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그렇게 건강식품은 아니었다. 계란 반죽을 한 밀가루를 기름에 넣고 튀긴 도너츠였다. 그야말로 요즘 말로 불량식품이었다.

 

그러나 건강식품과 불량식품의 구분이 모호했던 그 시절, 그리고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가 비 오는 날 해주신 도너츠, 일명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우리 형제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엄마가 해 주신 도너츠는 금방 동이 났다. 한창 자라고 있는 우리 형제가 게 눈 감추듯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어릴 때 그런 것을 먹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거라고 우긴다. 사실, 나는 아내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좀 서운하다. 물론 아내는 나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이겠으나, 나에게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불량식품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의 사랑이 배어 있는 음식을 ‘불량식품’이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 물론 나는 지금 ‘인간미’보다 실질적인 건강식품을 먹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 팔순을 넘기신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신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비가 온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들으며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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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