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6. 22:19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19:22-26, 4:7-12)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것은 마지막에만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사사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같은 구절이 176절에도 등장하고, 이야기의 말머리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요약된 말로 자주 등장한다.

 

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사기와 룻기는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읽은 이야기는 사뭇 너무도 다르다.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한쪽은 말 그대로 타락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말 그대로 거룩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로 봐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에 물리적인 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정말로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존재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진술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산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쉽게 말해,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사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 1~3계명을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십계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다른 말로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다. 우상숭배란 무슨 거창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한 눈 팔 때 생기는 현상이 바로 타락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처음 인간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처음 인간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아 생긴 인간의 타락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 그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있어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그 행위에 있지 않다. 문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다.

 

타락의 내용은 3무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감각, 무절제, 무질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감각이다. 무감각이 무절제와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타락의 내용인 무감각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사사기 본문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레위인과 그의 일행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하룻밤 유숙하게 된 베냐민 땅의 기브아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한 기사이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기브아 마을로 갔지만, 거기서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 노인이 그들을 집으로 맞이했는데, 그는 그곳 기브아 출신이 아니라,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출신이었다. 노인 집에서 유숙하며 한창 즐겁게 쉬고 있을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힌다.

 

우선 불량배들의 무감각을 보자. 이들은 노인의 집에 나타나 노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들과 관계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관계란 성관계를 의미한다. 그들의 무감각을 보라. 그들의 눈에는 노인의 집에 유숙한 사람들이 극진히 대접해야 할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손대접하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였다. 손님이 손님으로 보이지 않고, ‘관계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혀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무감각의 현상이 불량배들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불량배들의 횡포에 노인과 레위인은 맞서지 않고, 그들의 횡포를 잠재울 방안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다.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야기는 19장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그런데 레위인의 첩은 이야기에서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힘도 없는 약자로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강자인 노인과 레위인의 눈에 약자인 레위인의 첩이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불량배들이나 노인이나 레위인은 상대적으로 강자들이다. 그들이 약자인 레위인의 첩을 철저하게 유린한다. 약자인 레위인의 첩은 사로잡히고, 배반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문당하고, 끝내 살해당하고, 몸이 찢기고, 몸이 흩어진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타락이란 단순히 흔히 말하는 죄가 판을 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란 결국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이 임하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을 말한다. 구조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주는 사회,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 주는 삶,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가 룻기에 나온다. 같은 시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날 올 수 있을까, 매우 놀랍다. 룻기의 본문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보아스가 아내로 맞이하는 룻은 레위인의 첩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였다. 룻은 모압여인이었고(이방인), 남편을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해줄 가족이라는 울타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그리고 시아주버니까지도 모두 세상을 떠나, 홀로된 시어머니와 생계를 꾸려갔다. 룻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런데 룻기의 이야기는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 룻이 보아스라는 경건한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눈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름 없는 자, 약한 자가 이름 있는 자로 바뀌는 지를 말해 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진술이 거짓 진술인 것처럼, 보아스는 늘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는지, 그가 처음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하는 인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일꾼들에게 먼저 복을 빌어 준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기시를 원하노라”(2:4).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기브아의 노인이나 레위인, 그리고 불량배들은 처음 만남에서 여호와의 복을 비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필요, 관심사만 늘어 놓았다. 특별히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복을 비는 말과는 전혀 반대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가! 이와 대조되는 보아스의 축복은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인가!

 

하나님에 대한 보아스의 집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율법에 따라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 과정을 살펴 보면 절대로 질서를 어기거나 인내심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라고 함부로 룻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3:6-15).

 

기업 무를 자, 고엘법은 룻처럼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데, 궁핍한 때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가까운 친척의 의무였다(25:25-54). 룻과 나오미는 궁핍하여 죽은 시아버지의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하는데, 그 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땅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땅으로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이긴 했지만,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첫 번째 의무자는 아니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존재했다.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입장에서 보아스가 마음대로 고엘법을 실행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아스는 동분서주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고 고엘법을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척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벌인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이 고엘법 시행 의무를 포기한 후, 자기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합법적으로 고엘법을 시행한다. 엘리멜렉의 땅을 샀을 뿐더러, 그 땅을 통해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 거둔다.

 

거룩이란 이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타락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비극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인 것과는 매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실제의 삶에서 거룩한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한다.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 있다. 거룩이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들을 착취하고 유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걸쳐 있는 타락은 그들의 부도덕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위해 오히려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타락한 마음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착취하고 유린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둔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답게 여겨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가꾸어 간다.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왕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삶을 사시라.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있다. 그러니,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복되게 하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괴롭히는 타락한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복되게 하는 거룩한 자로 살 것인가? 도대체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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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