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5

새로운 신앙의 경지

(하나님의 현현)

욥기 6

(욥기 42:1-6)

 

욥과 친구들의 지난한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정리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맨 마지막에 등장하신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이다. 좀 아는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게 투성이다. 이런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다.

 

고난은 늘 낯설다. 고난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고난은 낯설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은 늘 우리를 긴장시키고, 힘들게 한다. 그토록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고난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를 아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닥쳤을 때 그 이유도 모른 채,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온 몸으로 그 고난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난을 당했다. 고난이란 의인이나 악인이나 상관 없이, 인생을 살게 되면 겪게 되는 것이다. 악인의 고난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 누구든지 악인이 고난을 받게 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얼마큼이나 될까? 그러한 이들은 천벌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정해진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세월호 사건이라든지, 미국 찰스턴의 총기난사 사건 같은 것이다. 학생들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또는 그들의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그토록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수요일에 모여 성경공부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길래 찰스톤에서는 그렇게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값싼 위로를 받으며, 값싼 신앙을 내세우며 하루 빨리 잃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아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던 여주인공(전도연 분)에게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아들이 납치 살해 당한 것이다. 그 사건을 경험하고 여주인공은 거의 반실성상태에 들어서지만, 나름대로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겐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처절한 저항의 과정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받았다고 믿는 범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했냐며 분노에 못 이겨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로 변신한다.

 

악마(악마 같은 인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악마 같은 존재(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비극(고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이 그 비극을 잘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죽기보다 더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것은 평생 그것을 당한 이들에는 몸의 가시로 존재한다.

 

얼마 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가 있다. 완전히 미국적인 영화인데, 911 사건 등 테러단체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자국민이나 군인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어떤 젊은이가 애국심에 불타 특수부대에 지원하여 스나이퍼가 되어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의 전쟁 경험은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애국심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나약함과 참상이 있다. 특별히 아이를 이용하여 테러를 저지르는 테러단체의 악마성 앞에서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폭탄을 들어 뛰어드는 테러단체의 어린 아이를 스나이퍼로서 총으로 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갈등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쏴 죽인다. 그는 스나이퍼로서 명성을 날리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자꾸 파탄으로 치닫는다. 아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자꾸 정신이상 증세가 발생한다. 그는 결국 제대한 뒤,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쓴 결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처럼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예비역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이상자였던 한 예비역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우리 삶의 비극은 이렇게 자꾸 악순환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비극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내가 경험한 비극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헤어나올 수 있을까?

 

욥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고난, 비극, 고통에 순응하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절대로 내면화시키지 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끝까지 하나님께 따져 물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저항하고 따져 물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끝까지 맞서 저항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당한 고난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을 주신다.

 

물론, 욥기서에서도 왜 욥이 그러한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한 인과율적인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깨달아 알았을 때, 욥은 더 이상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인과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비그 자체라는 것이다. 신비는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감추어져 있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거나 질문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비극, 고통)을 극복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선 것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이것은 욥이 진짜로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가졌다는 뜻이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백문이 물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이다.

 

“overview effect”라는 말이 있다. 우주인인 Frank White가 만든 말인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모든 게 달라 보인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모든 이들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모두 “overview effect”를 경험했는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지구의 실제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지구는 굉장히 작고, 쉽게 깨질 것 같은 생명체 같은 것이었는데, 종이처럼 얇은 대기에 의해서 보호되고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국가 간의 경제는 사라지고, 사람들을 나누던 갈등은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바라보니,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한 그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지구 안에서만 아옹다옹 살던 때에 가졌던 생각 속에서 살지 않는다. 우주를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야말로 ‘overview effect’가 발생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영원히 바뀐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것이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가 다르게 다가 온다. 그렇게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고난(비극,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당당히 극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 욥이 취하는 자세를 보자. 그는 우선 하나님 앞에서 회개부터 한다. 욥의 회개는 싸구려 회개가 아니다.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의 갈구가 아니다. 욥의 회개는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자로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욥은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었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던 친구들과 화해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친구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들과 아옹다옹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무의미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이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순종을 하게 된다. 욥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원수같은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순종하지 못할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기만 한다면, 우리도 욥처럼 깊은 순종의 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욥은 참된 안식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나니, 욥은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받는다. 고난을 당하며 욥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바로 안식이었다. 욥은 안식을 달라고, 죽기를 갈망했었다. 죽는 게 오히려 낫다고 했다. 그게 오히려 안식을 누리는 길이라고 토로했었다. 그런데, 욥은 이제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기 42:10).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기 42:16-17).

 

욥의 인생에 이토록 안식과 평안이 넘쳤다. 그의 마지막 죽음도 안식과 평안에 싸여 있다. 욥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는 안식과 평안을 누렸다.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 밖에는 없는 듯 하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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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