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27

성령님, 예수님, 그리고 우리들

(마가복음 1:9-20)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이다 (특별히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복음서는 시작한다.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오실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실 이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예언된 그 오실 이가 실제로 등장한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그가 바로 그 오실 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세례 받을 때 하하늘부터 들려온 음성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런 후,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 받은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을 곧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이끌려 시험을 받는다.

 

그가 받은 시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모두 출애굽 2세대들이다. 1세대들은 여호와께 불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고,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사탄을 흔히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사탄을 표현할 때 뿔 달린 흉측한 모습으로 그린다. 사탄이 하는 기본적인 일은 시험하는 일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은 기소하는 일을 한다. , 어떠한 존재의 의로움을 달아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에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를 통해 공격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기소에 맞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가는 그것을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 당할 때 실패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험 당할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을 바라보았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시험에서 벗어날 줄로 잘못 생각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 당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것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악(더러운 귀신)과 싸우신다. 이 일련의 이양기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우연히, 어쩌다 오신 것이 아니라, 예언에 의해서 오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제자도의 퀄러티를 가르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낳은 자식과 예언, 또는 예정된 자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그 자식이 부모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너는 실수로 낳은 자식이야! 너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 자식의 자존감을 무너질 수밖에 없고, ‘자기 인식에 대한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생각해 보자. “너는 예언된 자식이야. 너는 예정된 자식이야.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야.”

 

성경에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예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이다.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를 일컬어 이렇게 평가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6:24).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27:3-10).

 

그러나,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가 하나님의 예언과 예정가운데 태어난 것에 대하여 찬송을 지을 정로도 기뻐했다 ( 1:67-79). 그 찬송 다음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1:80).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자기 인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퀄러티를 다르게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렀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믿으시는가?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광야에 나가서 시험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어떠한 일도 감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어떤가? 성령의 충만함 없이 어떠한 일을 하면, 사탄에게 기소 당하기 딱 쉽다. 거기에는 육신의 일이 가득하게 되어, 우리의 죄된 본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룟 유다를 보라. 성령의 충만함 없이 그가 저지를 일을 보라. 그리고, 저지른 후에 그가 행한 처신을 보라. 사악함과 죽음만이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이 가득한 상태에서 행하는 일에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함을 받았는가?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 성령 충만함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들짐승과 함께 있는 적막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천사가 거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머물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 성령의 열매 가득 맺히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